第九十四章 상불출래(想不出来) (3)
천호문주는 답답했다. 아니, 절대 무위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자신이 미웠다.
아걸의 일홀도는 잔인하다.
‘진법도…… 암수도…… 화살 공격조차도 무기력하게 만드는 힘이라. 좋군. 후후!’
천호문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펴지 못했다.
아걸은 어떤 공격도 단숨에 뚫어 버린다. 아걸이 암수를 사용하거나 절대병기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나마 위안이 되겠다. 아걸은 오직 무공만으로 뚫어 내고 있다.
저 힘! 저 무공!
그 언젠가…… 검을 처음 잡았을 때 저런 힘을 꿈꾼 적이 있다.
저런 무공으로 중원을 오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환상적인가.
하지만 무공을 수련하면서 어떤 무인도 절대 강자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누구든 실수는 한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실수는 웃으면서 넘겨 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인이 저지른 실수는 곧바로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다. 단칼에 목이 떨어진다.
무림에는 무인의 힘을 빼는 방법이 수천 가지나 있다.
미약, 독, 술, 여자…… 방법을 찾아 보면 어느 사람이든 한두 가지의 암수에는 걸려든다.
이래서 무정검(無情劍)이라는 것도 나왔다.
부모 형제가 인질로 붙잡혀 있다? 상관없다. 그들과 인연을 끊었는데 죽든 살든 무슨 상관인가.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다면 무조건 베어 넘긴다.
어젯밤 살을 섞은 여인이 암수를 전개한다? 즉시 죽인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적이라고 판단하면 평생지기라도 단숨에 벤다.
오죽하면 무림에 이런 검공이 생겼겠나. 그만큼 제 생명 하나 지키는 것도 힘들다는 말이지 않나.
술에 취해 있어도 제 무공을 발휘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간혹 만취 상태에서도 제 무공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중간하게 취해 있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만취 상태에서는 천하제일 고수도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누구든 무너질 수가 있다.
그래서 무림을 장악하려면 이기는 방법을 갖는 게 빠르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연무와 구비추명공은 좋은 사례다.
구비추명공은 확실히 뇌에 몹시 나쁜 영향을 미친다. 구비추명공을 펼친 열아홉 명 중 일곱 명이 쓰러졌다. 뇌혈관이 터져서 세 명은 절명했고, 네 명은 반신불수가 되었다. 물론 검을 잡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흑우한살검도 마찬가지다. 이 공부를 수련한 놈들은 사람을 아주 태연히 죽인다. 기가 질릴 정도로.
무정검은 장난으로 여겨질 정도로 인성을 상실한다.
미친놈이 칼을 잡으면 어떻게 되나?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바로 흑우가 그렇다.
그래서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흑우는 가차 없이 죽인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천호문에 해를 끼칠 것이다.
무공 외에 다른 방법으로 무림을 장악하려면 그에 따르는 대가도 지불해야 한다. 모든 방법에는 항상 음과 양이 존재한다. 어둠을 뿌리치고 밝음만 취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무공이 필요할 때도 있다. 또 지금이 그럴 때이다.
하지만 아걸의 절대적인 일홀도는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더 싸울 수 있겠나?”
흑우에게 물었다.
“으……!”
흑우는 신음만 흘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하기는…… 어떤 무공을 수련해야 저런 무공과 흔쾌히 맞닥트릴 수 있을까?
연무 속에 투입한 흑우는 모두 열두 명이다.
구비추명공을 사용할 수 있는 흑우, 전원을 투입했다. 하나같이 그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받드는 수족 중의 수족이다. 결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 중 일곱 명이 죽었다. 그것도 단숨에.
“활을 계속 쏠까요?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부문주가 물어 왔다.
“계속 쏴야지. 의미가 없을지라도.”
문주가 말했다.
“그럼 호각은 떼겠습니다. 소리가 오히려 놈에게 도움을 주는 듯해서.”
“소용없을 거네. 연무를 거둬야 그나마 효과가 있을 것 같긴 한데, 저게 걷어질 게 아니잖아?”
천호문주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숲에 깔린 연무는 쉽게 거둬지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거둘 방법도 없다. 계곡에 강한 바람이 불어와서 안개를 쓸고 나가야 한다. 그전까지는 흑무가 계속 앞을 가린다.
아걸을 죽이고자 피워 낸 흑연인데, 지금은 오히려 아걸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아걸이 연무를 가림막으로 이용하고 있다.
화살은 아걸을 찾지 못한다. 연무 속에 투입한 자들은 속속 죽어 나간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연무를 피우지 않고 싸웠으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놈들은 코빼기도 안 보입니까?”
부문주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 올 것이다.”
“그렇겠죠. 후후!”
이십사 위문은 송가검문과 천호문을 이미 버렸다.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철수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면 송가검문처럼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공부의 검을 받을 수 있나?”
“…….”
부문주가 말을 잇지 못했다.
송가검문은 문파의 존망을 팽개쳤다. 탕산에서 벗어나면 문파를 접을 생각이다. 그러니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하등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천호문은 다르다. 천호문 본문에는 소문주가 남아 있다. 아직도 지역의 패자로 군림한다. 아들이 계속 위엄을 이어가려면 문주도 이곳에서 사력을 다해 싸워야 한다.
아니다. 철수는 아예 불가능하다. 이십사 위문이 뒤를 막고 있는데 어떻게 철수하나.
천호문의 운명은 정해진 거다.
“자! 흑우! 너희는 하던 대로 해. 암수를 사용해서 아걸을 죽여 봐. 최소한 상처라도 입혀!”
“네!”
흑우가 대답했다.
문주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난 너희와 함께하지 못한다. 그래도 내가 천호문 문주인데 너희와 같은 자리에 누울 수는 없지.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 나도 곧 뒤따라갈 테니.”
“이해합니다!”
흑우들이 대답했다.
흑우는 마공을 사용했다. 아걸이 탕산 전체가 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말했다.
천호문주도 죽을 것이지만, 그는 천호문 문도와 함께 죽는다. 음지를 버리고 양지에서 죽는다. 천호이십사검과 함께.
“연무 속으로 뛰어들지 마라. 저 속에서는 오히려 아걸에게 유리해. 저놈의 감각은 사람 것이 아니야. 일홀도에 죽는다면 억울하지도 않지. 얼마 안 있으면 그 칼에 도전할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하하!”
문주가 웃었다.
연무 바깥에서 싸워도 아걸을 어찌할 방도는 없다.
아걸은 팔천검문의 검진도 뚫었다. 그러니 아걸을 잡을 방법이 전혀 없다. 여기서 죽는 게 유일한 탈출구다.
이제는 다른 이십사 위문도 이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죽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어. 너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펼쳐 봐.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문주가 걸어가며 말했다.
이곳 탕산은 죽을 자리다. 아걸이 죽을 자리가 아니라 자신들이 죽을 자리다.
잘못 찾아왔다.
천호문주는 고개를 내돌렸다.
“후후후! 후후!”
활검문주가 웃었다.
곁에 선 문주들 중 일부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웃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한결같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우리 이십사 위문을 모두 소집할 때, 공부가 참 너무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를 무시해도 여간 무시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한데…… 이러면 공부의 판단이 정확한 거네.”
공검문주가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다. 아걸을 죽이기 위해서는 이십사 위문이 합공을 취해야 한다.
팔천검문의 검진은 분명히 막강하다. 어지간한 무인이었다면 당장 도륙 났다. 그런 검진을 어떻게 빠져나오나. 하지만 아걸은 어지간한 무인이 아니다. 매우 특출나다.
어떤 검진도 아걸 같은 자는 잡지 못한다.
송가검문주는 정면 대결을 벌인 끝에 죽었다. 송가검문주가 같은 고수가 일 초에 나가떨어졌다.
천호문은 정도 문파가 취할 수 있는, 아니 취할 수 없는 최악의 수법으로 공격했다. 그런데도 무너졌다. 확실히 아걸은 무공으로 싸우면 안 된다.
“여기 동영에서 온 놈들이 깔려 있을 텐데.”
“찾고는 있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대단하지? 우리 눈을 피해서 숨다니.”
낙일검문주가 말했다.
“음! 체면이 말이 아니군. 그놈들에게 목숨을 맡겨야 하나? 중원이 동영에게? 하하!”
공검문주가 웃었다.
그들이 비수를 날렸다. 모두 똑똑히 봤다.
동영 인자는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나서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그놈들이 나서면 아걸도 반드시 상처를 입는다. 딱 한 번 날린 독비가 아걸에게 상처를 입혔다.
아걸에게 상처를 입힌 독비는 동영 인자가 날린 것이다.
천호문 흑우도 독비를 던질 수 있다. 하지만 동영 인자만큼 고명하지 않다.
정확한 기회 포착과 정확한 출수!
저들은 이십사 위문 문주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죽음의 틈새를 잘 잡아챈다.
“우리가 죽는 동안 그놈들은 기회를 엿본다. 허허! 이거야 원. 천하의 이십사 위문이 허수아비라니.”
이십사 위문 문주들은 어떤 식으로 공격해야 하는지 안다.
동영 인자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악착같이 달려들어서 이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그럴 바에는 동영 인자들이 움직일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 최선이다. 잘하면 자신이 죽기 전에 아걸이 죽을지도 모른다.
이십사 위문 문주들은 그동안 토론했던 공격 수단들을 쓸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폭약, 쇠뇌, 연환사, 밀밀합격(密密合擊)……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이제부터는 아귀다툼이 벌어진다.
이 싸움이 끝난 후에 온전히 살아남은 문파는 거의 없을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누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서로 또 보게 된다면 그때는 사심 없이 술 한잔합시다.”
공검문주가 말했다.
“무운을.”
활검문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공검문주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 자신의 문도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낙일검문주도 돌아섰다. 한 명, 두 명……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던 문주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간다.
“옛날에 잡았어야 해.”
활검문주가 중얼거렸다.
아걸의 태동은 치우현 동승에서 시작되었다. 활검문이 자리 잡은 곳이다.
그 당시의 아걸은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다.
활검문에도 소축십검처럼 십검이 있는데, 그중 두 명이 그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비록 아걸에게 죽은 것은 아니지만, 일홀도의 태동 때문에 죽은 것은 맞다.
‘그때 십검을 모두 풀었다면…… 아니, 내가 직접 나섰어야 해. 그랬다면…….’
무인의 실수가 치명적이듯 후회 역시 치명적이다.
무인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 생사가 갈리는 싸움판이 뒤집힌다.
그 당시의 아걸은 분명히 활검문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데 지금은 활검문주 스물네 명이 모여 있어도 아걸 한 명을 두려워해야 한다.
“너희도 준비해라.”
활검문주가 말했다.
그는 활검문에 사검을 남겨 두었다. 이곳 탕산에는 사검과 문도 이백 명을 데리고 왔다.
이 정도면 대단한 위세다.
활검문 십검의 위명이 자자한데, 거기에 문도 이백 명까지. 어디 전쟁이라도 하러 가나?
전쟁은 전쟁인데 이쪽이 망하는 전쟁 같다.
활검문에 사검을 남겨 두었지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탕산에서 문도와 사검이 죽는다면, 남은 사검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럴 바에는 팔검을 모두 데려오는 건데.
‘또 후회인가? 웬 놈의 후회가 이렇게 많은지. 후후! 후회가 많다는 건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 확실히 이번 싸움은 어려워.’
활검문주는 고개를 끄떡였다.
어설프게 싸워서는 안 된다. 아걸은 그렇게 상대할 적이 아니다. 이십사 위문이 전력을 다해서 덮쳐야 한다.
늑대와 양 떼의 싸움이다.
늑대가 돌아다니면서 양을 한 마리씩 물어 죽이고 있다.
양들은 늑대를 피해서는 안 된다. 우르르 달려들어서 들이받고 물어뜯어야 한다.
그 와중에 양 떼가 무수하게 죽어 나가겠지만, 혹시 아나. 늑대를 죽일 수 있을지.
아니! 죽일 수 있다!
죽일 수 있으므로 공부가 이십사 위문을 부른 것이다.
공부의 판단은 정확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싸웠어야 한다. 괜히 지금까지 시간과 사람만 소비했다.
팔천검문 검진, 송가검문주, 천호문 흑우…… 모두 개죽음이다.
스릉!
활검문주가 검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