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五章 사령현신(死靈現身) (3)
탓! 타타탁! 타탁!
허공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듯 작은 불꽃이 여러 번 터졌다. 그리고 광풍 같은 바람이 일어나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걸이다. 아걸은 지극히 멀쩡한 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걸은 화린을 뚫고 나왔는데도 그을음조차 묻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걸은 숨도 차지 않는지 대단히 편안해 보였다. 이마에 땀 한 방울 맺히지 않았다.
불길을 뚫고 나온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츠읏!
아걸이 반철도를 들어 올렸다.
“으으……!”
이십사 위문 무인들은 기가 질려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들도 이 불길로 아걸을 완벽하게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걸이라면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지독한 모순이지만 그런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하나.
아걸은 워낙 예측이 불가한 고수다.
죽음이 명확한 곳이지만 아걸을 잡기에는 뭔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빠져나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건 반칙이다.
인간들 싸움에 천신의 보호를 받는 자가 끼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아걸은 최소한 화상이라도 입었어야 한다. 화린을 뚫고 나오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서로 간은 다 본 것 같고.”
아걸이 담담히 말했다.
“지금부터는 최대한 살도를 펼칠까 해. 너희에게 원한은 없어. 오늘 너희가 죽는다면 내 앞을 가로막아서이고. 그러니 칼 얻어맞기 싫으면 비켜.”
아걸의 음성이 잔잔하게 울렸다.
살기라거나 분노가 담기지 않은 평범한 음성이다. 마치 책을 읽듯이 편안하다.
그래서 더 무섭다.
칼을 든 사람이 일체 감정을 배제했다. 지금부터는 감정 없이, 혼이 없는 실혼인(失魂人)이 칼을 휘두른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 정말 살도가 터질 것이다.
아걸이 담담하게 말했다.
“죽은 듯이 엎드려 있어도 돼. 그러면 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막아서는 자는 무조건 베. 이건 너희에게 주는 명부판관의 마지막 충고야. 아니, 혈도비자의 마지막 충고지.”
아걸이 말을 하면서 주위를 훑어봤다.
“으…….”
이십사 위문 무인들은 부르르 치를 떨었다.
“지금부터 열을 헤아린다. 열을 헤아린 후 혈도비자가 살계를 연다. 하나, 둘, 셋…….”
아걸은 빠르게 수를 헤아렸다.
너희가 생각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투다. 열을 헤아리고 난 후에는 무조건 살도를 펼칠 테니 각오하라는 거다. 너희가 내 말을 무시할 것도 이미 알고 있다는 투다.
“일곱, 여덟, 아홉, 열.”
열이라는 숫자가 금방 채워졌다.
쒜에에엑!
아걸은 즉시 움직였다. 사전에 예고한 대로 거침없이 무인들 속을 파고들었다.
“커억!”
“아아악!”
순식간에 다섯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아걸의 움직임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어떠한 검법이나 무공도 바로 무력화시켜 버린다.
반철도가 허공을 가르면 여지없이 한 명이 죽는다.
아걸은 정확히 허점을 파고든다. 도검을 섞지 않고도 몸통을 가격할 수 있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보다 아걸이 배는 빠르다.
몸이 빠른 것은 아니다. 아걸은 매우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한데 칼이 순간적으로 번뜩인다.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몸통을 가격해 온다.
무조건 피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검초를 마주쳐가면 즉시 격타당한다.
쾌검은 쾌도에서 밀린다. 중검(重劍)을 써서 힘으로 밀어붙여도 도검이 부딪치지 않으니 방법이 없다. 환검 역시 통하지 않는다. 아걸은 검초의 변화를 아예 환히 들여다보듯이 반응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초식을 환히 아는 상수가 맞대응한다는 느낌이 든다.
아걸처럼 빠름에 워낙 큰 차이가 생기면 어떠한 무공도 무력화되어 버린다.
더욱이 아걸의 도법은 매우 강력하다.
지금까지는 병기의 효용을 매우 잘 살린 도법이라는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무조건 도끼는 내리찍듯이 후려쳐 버린다. 검이건 육신이건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조건 쳐내 버린다.
검을 들어서 막으면 검이 부서진다. 쾌도를 쓰면서 힘도 곁들여 있다. 쾌도임과 동시에 패도다.
쒜에에엑! 퍼억! 퍼억! 퍽퍽퍽!
아걸은 순식간에 수십 명을 쓰러뜨렸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은 암기도 쓰지 못했다. 아걸이 자신들과 섞여버렸다. 그러니 화살을 쏠 수도 없고 화약을 터트린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다.
양 떼 속에 뛰어든 늑대!
아걸이 무인들 틈으로 파고들었고 그들 곁에서 칼을 쳐낸다.
모습을 보였는가 싶으면 사라지고, 사라졌는가 싶으면 다시 나타나 살도를 펼친다.
아걸은 귀신이다. 종적을 잡을 수 없는 귀신이다.
쒜에에엑!
반철도가 무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반철도를 맞이한 무인이 무릎을 팍 굽히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아걸이 칼을 멈췄다.
“나야, 나. 한항.”
아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오지 말라니까.”
“안 올 수가 있나.”
“또 누구……?”
“누구라고 할 게 있나. 모두 다 왔지 뭐.”
“살계를 열 겁니다. 모두 피하라고 말해 주세요. 자칫하면 제 칼에 당할 수 있습니다.”
한항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걸이 일부러 은거 무인들을 죽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벨 수는 있다.
아걸은 탕산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한다. 앞에서 공격할 수도 있지만, 뒤에서 벨 수도 있다. 살계를 연다는 것은 정면에서 싸우지 않고 무조건 죽이겠다는 뜻이다.
한항은 아주 지독한 살심을 감지했다.
아걸은 이십사 위문 무인들을 중원 무인으로 보지 않는다. 무림 동도로 보지 않는다. 이런 식의 싸움에 가담한 자들은 검을 들 자격이 없다고 본다.
자신에 대한 공격 때문에 살의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비겁한 행동에 가담했기 때문에 살의를 일으킨 것이다.
아걸의 살심은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아걸 스스로 꺼트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가세요.”
아걸이 한 마디 툭 던지고는 신형을 쏘아냈다.
나무 위로 솟구쳐 오른다. 아니, 어느새 사라졌다. 그리고 비명이 터지면서 한 사람이 뚝 떨어져 내렸다. 나무 위에 숨어서 활을 쏘려던 무인이다.
“휴우!”
한항은 한숨을 토해냈다.
한항 같은 사람이 반철도를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저들은 어떨까? 반철도를 맞받을 사람은 몇몇 문주 외에는 없을 것이다.
저벅! 저벅!
한항 곁으로 한 사람이 걸어왔다.
두 손에 돌멩이를 가득 쥔 장태전이다.
“이거 쓸 기회도 없겠는데.”
장태전이 두 손에 든 돌멩이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쓸 데는 있지.”
한항이 고갯짓으로 옆 산을 가리켰다.
산 양쪽에서 거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쌍겸과 황열이 절정 검수들을 맞이해서 난투를 벌인다.
“다행히 송가검문이 싸움에서 빠졌어. 덕분에 빈 곳이 많아. 그들마저 가세했다면 어려운 싸움이었을 텐데.”
“쌍겸과 황열을 얕보지 마. 저들 정도면 충분히 떨치고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이야.”
“그래도 우리가 도와주면 한결 편하겠지?”
“그것보다는 앞으로 가서 지당검과 나통에게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이 사정을 모를 테니까.”
“흑후가 있잖아. 벌써 말했을 거야. 그리고…… 아걸이 곡구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어.”
“……?”
장태전이 한항을 쳐다봤다.
“아걸, 이십사 위문을 뚫을 생각이 아니야. 몰살시킬 생각이지. 그러면 이 싸움, 무척 길어져. 아무리 아걸이라고 해도 곡구까지 가려면 족히 하루는 걸려.”
“으음!”
장태전이 신음했다.
탕산에서 벌어질 살육전이 환히 그려진다.
아걸은 명부판관이라는 별호 대신에 혈도비자를 말했다. 피를 머금은 미치광이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그래도 우린 빨리 뒤쫓는 게 좋겠지? 저쪽 일부터 빨리 마무리 짓자고.”
“그럼 나는 왼쪽.”
“좋아. 그럼 내가 쌍겸에게 가지.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정도 문파를 궤멸시키는 일이야. 자칫하면 오늘 이후로 마인이라는 딱지가 얹혀질 수도 있는데…….”
“그럼 어때? 우리가 언제 그런 말에 연연했나?”
“그렇지? 후후!”
한항이 죽어가는 무인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크아악!”
“아악!”
그들이 말하는 이 순간에도 탕산에는 비명이 터져 울리고 있다. 많은 무인이 속절없이 죽어 나간다.
아걸 손에 죽는 무인들은 허수아비가 아니다. 나름대로는 무림을 쥐락펴락하던 절정 검수들이다. 그래도 문파가 위치한 지역에서는 최대 강자로 손꼽히던 무인들이다.
그런 검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아걸 걱정이 손톱만큼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이 걱정된다. 한 명이라도 탕산을 벗어나는 게 이로울 것 같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합류하자고. 자칫하면 정말 고사와 나통이 큰일 나겠어.”
쉬이이잇!
장태전이 왼쪽 산봉으로 신형을 날리며 말했다.
아걸의 움직임이 상당히 달라졌다.
성난 들소처럼 무조건 돌진하지 않는다. 표범처럼 나무 위로 올라가며 신형을 감춘다. 그리고 다시 몸을 드러낼 때는 어김없이 죽음이 일어난다.
나무 위에서 목표를 정하고 공격한다.
이런 식의 공격은 죽음을 더 정확하게 이끌어 낸다. 숨어 있는 무인을 찾아낸 후에 공격하기 때문이다. 무작정 돌진하는 것보다 더 빠르다.
즉, 상대를 보지 않고 격살한다.
이미 흑후가 진행 상황을 두 사람에게 전달했을 터이지만, 혹여 전달하지 않았다면…… 일이 잘못되어서 전달할 상황이 아니라면? 어쩌면 두 사람은 은신처에서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쒜에에엑!
장태전이 왼쪽 산으로 치달려 올라가면서 돌멩이를 던졌다.
퍼억! 퍽!
남만 토탄사의 절기인 비석탄이 터졌다.
황열을 포위 공격하던 이십사 위문 무인들이 머리가 깨지며 쓰러졌다.
비석탄은 머리를 절반쯤 날려 버린다.
살을 일그러트리고, 뼈를 가루로 만든 후에 아예 얼굴에서 떼내버린다.
비석탄에 맞아 죽은 사람들은 얼굴 형체가 완전히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다.
비석탄은 남만에서도 매우 잔인한 공부다.
“뒤에 적이다!”
“비석탄! 장태전이야!”
무인들이 분분히 소리쳤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은 은거 무인들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파악해 놓고 있었다.
그들은 느닷없이 뒤쪽에서 장태전이 나타나자 크게 당황했다.
사실 그래봤자 고작 한 명이다. 한 명이 더 달려들었을 뿐이니 변한 게 없다.
하지만 무인들은 이상하게도 자신들이 오히려 앞뒤에서 협공을 당한다는 착각이 들었다.
장태전이 주는 압박감은 그만큼 무거웠다.
이미 황열의 승표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터라서 더욱 압박감이 크게 들었는지도 모른다.
쒜에에엑!
무인들 쪽에서 누군가 화살을 쏘았다.
“응?”
장태전은 미간을 찡그리며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쒜에에엑!
화살이 몸을 스치며 지나갔다.
이들이 아걸이 아니라 자신들에게까지 화살을 쏠 줄은 몰랐는데. 이제는 정말 무인으로서의 자긍심은 버린 것인가? 그때!
꽈아아아앙!
장태전의 등 뒤에서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장태전은 부서져 나온 파편에 등을 격타당했다. 한순간, 불에 덴 듯 화끈한 통증이 일어난다.
‘아걸이 왜 혈도비자를 말했는지 알겠네. 옆에서 보는 것과 직접 당하는 게 이렇게 다른가?’
장태전은 살심이 돋아났다.
쒜에에엑!
진기 실린 돌멩이가 무인들에게 던져졌다.
장태전도 이 싸움이 오직 목숨을 빼앗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만족과 싸울 때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퍼어억!
비석탄에 맞은 무인이 머리가 깨지며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