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五章 사령현신(死靈現身) (4)
아걸은 움직임을 멈췄다.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가도 상관없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다. 그런데…… 뭔가 께름칙한 느낌이 든다.
아주 기분 나쁜 느낌!
지금 이대로 달려가서는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아걸은 주위를 쓸어봤다.
눈에 띌 만한 위험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저기에 있고, 저기도…… 저기 또 한 명.’
곳곳에 숨어 있는 무인들을 찾아냈다. 몸을 납작 숙이고 있지만, 옷자락이 보인다.
저들을 표적으로 정하고 쳐 나가면 된다.
자신이 칼을 쓰면 저들은 막지 못한다. 혹, 막는 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자라면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눈에 띈 자들은 모두 베인다.
그런 사실을 안다. 그런데도 쳐 나가기가 께름칙하다.
‘뭔가가 있는데…….’
아걸은 주위를 쓸어봤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상한 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이목을 숨기고 있는 것이라면 이건 대단한 은신술이다. 지극히 위험한 자일 것이다.
‘유음류?’
아걸은 위험의 정체를 짐작해냈다.
동영 인자 유음류다. 지옥에서 흘러나온 검이 숲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아걸은 동영 인자의 은신술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다.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절묘한 은신술이라도 역시 사람이 펼치는 것이다.
‘은신술이라면…… 살과 뼈로 된 몸을 감춰야 해. 가려져 있을 뿐, 실체가 있다는 거네. 그러면 찾아야지.’
아걸은 나무 위에서 조용히 숨을 골랐다.
자신이 저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저들 역시 자신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공격해 왔을 것이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은 눈 감고 귀 막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자신이 바로 곁에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아니, 몇몇은 짐작하고 있다.
검이 꿈틀거린다. 검 끝이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서 겨눠져 있고, 계속해서 꿈틀꿈틀 공격의 기미를 보인다.
저들은 어떤 공격이 효과적일지 망설이고 있다.
검첨이 밑으로 내려간다. 사선으로 비틀어 올려진다. 그러다가 다시 제 위치로 간다. 이 초식, 저 초식……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 초식이 번갈아 교차된다.
이것도 확신이 가지 않고, 저것도 자신이 없는 것이다.
저들은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검초를 쳐낼 때는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적을 죽이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내 안전을 먼저 모색한 후에 검초를 쓰려니 저토록 힘든 것이다. 수없이 가상의 싸움을 해보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것은 모두 안전보장이 되지 않아서다.
사실 자신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많이 움직였다. 은밀하게 움직인 것도 아니다. 매우 빠르고 신랄하게 움직였다.
그러니 눈썰미가 조금이라도 예리한 자라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무인도 몇몇뿐이다. 대다수 무인은 아무것도 없는 숲만 노려본다.
‘그런가. 이 자들이 희망인가?’
아걸은 이십사 위문 무인들이 물러서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어쩐지 이상했다. 죽여도 죽여도 아걸 무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면서 계속 버텼다. 마치 목숨을 던져서 버틴다는 인상까지 들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저 죽음을 맞이한다?
그 이유가 뭔지 궁금했는데 역시 유음류였다.
이들은 동영 인자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동영 인자들이 필살초 한 수만 터져주기를 고대한다.
이런 기대감은 완벽한 은신술 때문에 일어났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은 동영 인자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자신들과 어울려 있는데도 찾지 못했다. 어쩌면 바로 옆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찾지 못했다면…… 어쩌면 동영 인자라면 아걸에게 치명타를 안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아걸은 일격을 당한 상태다. 이미 독비에 맞았다.
아걸이 당한 사실은 많은 사람이 안다. 직접 지켜보았기 때문에, 아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기 때문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상하게 안다.
비록 흘려 맞은 일격이지만, 매우 효과적이었다.
어쩌면…… 이들이라면…… 좋아! 끝까지 버텨보자!
츠으읏!
아걸은 몰안을 일으켰다.
전신 감각을 말살시키고 오직 두 눈의 진기를 집중시킨 후 주위를 쓸어본다.
차앗! 츠츠츳! 차착!
쓸어보고 또 쓸어본다. 이럴 때는 급하게 찾겠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찾아도 그만, 찾지 않아도 그만…… 무심히…… 하지만 예리하게 훑어본다.
주위와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는지 찾아낸다.
숨은그림찾기다.
‘이상한데?’
아걸은 나무에 주목했다.
나무가 어딘지 조금 이상하다. 어디가 이상하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보통 나무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상하다. 느낌이 그렇다.
‘일단 확인해 봐서 나쁠 건 없고…….’
슛!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신형을 튕겨냈다.
나무를 향해 빠르게 쏘아갔다. 다른 쪽으로는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바로 옆에 이십사 위문 무인이 숨어 있는데도 건드리지 않았다. 목표는 나무다!
순간, 사방에서 무엇인가가 급하게 터졌다.
쒯! 쒜에에엑! 쒜에에엑!
아걸은 황급히 신형을 틀어서 날아오는 물체를 피했다.
날아오는 게 무엇인지 파악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조건 몸부터 틀어내야만 했다.
쒜에에에엑!
비표가 보였다.
삼각, 사각, 오각…… 각종 모양의 비표가 숲을 가르며 날아왔다.
아걸은 비표를 피한 즉시 다시 목표로 한 나무를 향해 쏘아갔다. 반철도 또한 이미 날카로운 궤적을 그려내는 중이다. 여하간 나무를 치려고 한다.
나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아걸이 나무를 잘라버릴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만약, 나무에 누군가가 숨어 있다면 당장 신형을 튕겨내야 반철도를 피한다.
그런데도 나무는 꿈쩍하지 않는다.
쉐에엑!
반철도가 가차 없이 나무를 쳤다.
그 순간, 또다시 비표 한 무더기가 날아왔다. 아걸이 칼을 거두지 않으면 비표를 맞을 수밖에 없는 절묘한 상황이다.
아걸도 칼을 멈추지 않았다.
팍!
나무가 잘리면서 피가 튀었다.
맞다! 이곳에 한 명이 숨어 있었다!
반철도에 맞아서 나무껍질이 벗겨졌다. 그리고 또 다른 나무껍질이 나타났다.
‘위장포!’
아걸은 나무를 치는 것과 동시에 수직으로 뚝 떨어졌다.
쒜에에엑! 쒜에엑!
그를 노리고 달려들던 비표가 간발의 차이로 빗나갔다.
아걸은 땅을 밟음과 동시에 다시 솟구쳐 올랐다. 상대방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움직임, 갈지(之)자로 어지럽게 움직이면서 적의 눈길을 속였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자신이 벤 나무를 자세히 살폈다.
나무에서 피가 솟구쳤다. 사람이 칼을 맞았다. 한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있다. 사람이 죽어 있다. 죽은 자는 칼을 맞은 후에도 나무에 달라붙어 있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나무를 꼭 부둥켜안고 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떨어지지 않고 찰싹 달라붙어 있다.
‘웅조(熊爪)!’
아걸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죽은 사내는 두 손과 두 발에 쇠갈고리를 끼고 있다. 철웅조, 일명 곰 발바닥이다. 곰 발바닥과 닮은 철조(鐵爪)를 손과 발에 끼우고 나무에 박아넣었다.
동영 인자들은 사람이 붙어 있을 수 없는 곳에 붙어 있다. 그래서 찾아내기 힘들다. 더욱이 인자들이 입고 있는 옷은 나무 색깔과 완전히 똑같다.
숲처럼 그늘이 짙은 곳에서는 나무인지 사람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은신술만은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이런 은신술 때문에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약점을 가진다. 움직이면 바로 발각되기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여건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공격하나? 절대적인 기회가 올 때까지 진득하게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일초필살(一招必殺)의 기회를 찾아내서 공격해야만 한다.
이들의 공격이 치명적인 이유는 그만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 때문이다.
동영 인자는 절대적인 기회를 기다린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선택한 최후의 절공이다.
‘그렇군.’
슈우우우웃!
아걸은 신형을 쏘아냈다.
눈앞에 무인이 있다. 그를 향해 칼을 쳐 나간다. 지금까지 해왔던 그대로 이십사 위문 무인들을 공격한다. 앞을 가로막는 자, 모조리 베는 일을 계속한다.
순간, 아걸은 상대방의 얼굴을 봤다.
“아!”
아걸의 입에서 무심결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걸은 상대방을 알아봤다. 활검문 십검 중 한 명인 청수검 왕유다. 활검문 오검법 중 초상검법의 고수다.
활검문은 성검문을 본떠서 십 일마다 공개비무를 열고 있는데, 청수검 왕유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또 상대방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걸은 할배 아삼과 함께 활검문 본문이 위치한 치우현 동승에 머무른 적이 있다. 당연히 청수검 왕유에 대해서도 잘 안다. 왕유가 한낱 마부를 주시할 일은 없다. 하지만 아걸은 그가 비무를 할 때마다 예의 주시했다.
청수검 왕유도 한때는 자신이 상대하기 버거웠던 고수다.
그 당시, 활검문 십검과 싸운다면 일대일이면 승산이 있고, 이대일이면 평수라고 생각했다. 삼대일이면 당연히 밀린다. 그만큼 무시할 수 없는 검수다.
그자가 눈앞에 있다.
파앗!
반철도가 청수검 왕유를 향해 터졌다.
상대방이 인의(仁義)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타앗!
청수검 왕유도 나무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파앗! 팟!
허공에서 검과 칼이 갈렸다. 신형과 신형이 스치며 지나갔다.
순간, 반철도가 청수검의 명치에서부터 오른쪽 허리 아래까지 휘둘러 그어졌다.
퍼억! 파아아악!
살과 뼈가 갈린다. 핏물이 흩뿌려진다. 그리고 청수검이 힘없이 떨어졌다.
활검문 십검 청수검 왕유가 아걸의 일 초에 무너졌다.
그때, 또다시 비표가 날아왔다.
쒜에에엑! 쒜에엑! 쒜에에에엑!
형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흐른다. 느낌으로만 알 수 있을 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표는 지극히 은밀하게 던져졌다.
하지만 아걸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움직이면 반드시 비표가 날아올 것이라는 걸 알았다.
단순히 움직이기만 해서는 날아오지 않는다. 동영 인자들에게 절대적인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비표가 날아올 수 있도록 틈을 보여야 한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을 공격하면서 신형을 흩트리는 것이다.
청수검 왕유를 공격할 때부터 그런 심산이었다. 마침 상대가 청수검이었을 뿐…… 누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아걸의 목표는 이십사 위문 무인이 아니라 동영 인자였다.
아걸은 청수검의 반격에 매우 놀란 듯 신형을 비틀었다. 그러자 오른쪽 반신이 환히 드러냈다.
청수검을 베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동영 인자에게 틈을 보여주었다. 절대적인 기회, 계속해서 청수검과 싸워야 하므로 신형을 다시 비틀 수 없는 상황이다.
비표를 날리면 반드시 맞출 수 있다.
그러자 어김없이 비표가 날아들었다.
이 비표, 예상했다.
파앗!
아걸은 불가능한 움직임을 시전해 냈다. 허공에서 두 번이나 신형을 비틀었다. 한번은 청수검의 반격에 놀라서 억지로 비틀어냈다. 그리고 이번에 또…… 비표를 피하면서 비틀었다.
불길을 뛰어넘으면서 공전을 시험해 본 것이 이번에도 도움이 되었다.
아걸은 자신의 반철도를 발판으로 삼았다. 반철도를 발밑으로 휘둘렀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 다리를 오므려서 반철도를 살짝 디뎠다. 자신의 칼을 자신이 밟았다.
그러자 신형이 툭 튀어 올랐다.
쉐에에에엑!
비표가 등 뒤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순간 아걸은 이미 나무 위에 안착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튀어 올랐다. 나뭇가지를 밟자마자 곧바로 신형을 퉁겨냈다.
패애애앵!
반철도가 움직인다.
나무! 나무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