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五章 사령현신(死靈現身) (5)
반철도가 노리는 곳은 나무줄기다.
잎이 무성한 곳도 아니고, 뿌리가 박혀 있는 곳도 아니다. 나무 한가운데를 노린다.
츠읏!
상대가 움직였다.
그는 자신이 표적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또한, 아걸은 반드시 칼을 쳐낸다는 사실도 안다. 자신들이 날리는 비표는 반철도를 막아서지 못한다.
끝까지 숨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수련을 해왔지만, 죽음이 빤히 보이는 데 참고 있을 수는 없다.
순간, 아걸도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타앙! 타아아앙!
도약하고, 허공에서 또다시 탄력을 얻으며 쏘아갔다.
역시 공전이다. 사람은 허공에서 속도를 변화시킬 수 없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수직 강하는 논외로 한다. 수직 강하는 가속력이 붙을 수 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옆에서 옆으로 이동하는 수평 이동이다. 나무에서 나무 위로 건너뛰는 것이다.
이런 경우, 허공에서 재차 추진력을 얻을 방도가 없다. 나무에서 도약한 속도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없다. 그런데 아걸은 추진력을 일으켰다.
쒜에에엑!
아걸이 쏜살같이 쏘아져 갔다. 상대보다 배는 빠르게 쫓아갔다.
상대는 유유히 나는 나비고 아걸은 먹이를 노리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박쥐다.
쫘악!
반철도가 상대의 등짝을 후려쳤다. 칼은 등을 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빙글 휘돌기까지 했다.
등에서 이어진 칼이 상대의 목에 걸렸다.
툭!
상대의 머리가 몸에 분리되어 날아갔다.
아걸은 떨어지는 상대를 밟으며 다시 나무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숨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만 공격한다는 유음류가 드디어 깨졌다.
이제는 저들이 아걸을 찾아야 한다. 나무로 뛰어오른 아걸이 감쪽같이 신형을 감췄다.
휘이이잉!
숲에 바람이 불었다.
숲에는 많은 사람이 숨어 있지만, 숨소리조차 크게 흘리지 않는다. 안으로 잔뜩 움츠러든 긴장감만 거칠게 피어난다.
아걸은 나무 위에서 주위를 쓸어봤다.
‘아!’
아걸은 눈을 좁혔다.
또 한 사람…… 아는 자가 보인다.
이곳은 활검문이 맡은 지역인 듯하다. 방금 청수검 왕유를 베었는데, 또 다른 십검이 보인다. 유운검 길상이다. 청수검과 마찬가지로 인의대협으로 명성이 높다. 하지만 그 역시 한 사람을 죽이겠다고 탕산에 들어섰다.
‘유운검이 있다면 활검문주도 있을 텐데.’
맞다. 그도 있다. 대략 사오 장 떨어진 곳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아걸과 활검문주의 눈이 마주쳤다.
아걸이 먼저 문주를 찾아냈고, 그 후에 문주도 아걸을 찾아냈다. 아걸이 일부러 강기(罡氣)를 드러내어 투지를 전했기 때문에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순간, 활검문주가 웃는 듯이 보였다.
아걸도 웃었다. 하지만 몸은 웃지 않았다. 활검문주를 향해서 쏜살같이 날아갔다.
금적금왕(擒賊擒王)이라고 했다. 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으라는 말이다.
아걸은 병법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쟁터에서는 적장을 잡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사실만은 안다. 숲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중에서 제일 먼저 쳐야 할 사람은 당연히 이십사 위문 문주다. 지금은 활검문주다.
쒜에에엑!
활검문주가 마주쳐왔다.
활검문 오검 중 적하검법(赤霞劍法)이다. 검에서 붉은 운무가 뭉실 피어난다.
아걸은 이 검법을 잘 안다.
활검문주가 펼치는 것은 처음 보지만 십검 중 노룡검 구지유가 펼치는 모습은 몇 번 봤다.
설혹 보지 않았어도 상관없다. 처음 보는 초식이면 어떤가? 아걸은 이미 눈에 익은 무공과 처음 보는 무공 사이의 차이를 좁혔다. 모든 무공에 대응할 수 있다.
쉐에엑!
반철도가 부드럽게 흘렀다.
그가 이번에 전개한 칼은 사대문주의 탄궁도다. 칼과 적의 심장을 일직선으로 연결한 후, 일직선으로 쏘아간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순간적으로 해치운다.
탄궁도를 펼치면 섬광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아걸이 펼친 탄궁도는 예전에 펼쳤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매우 부드럽고 유약했다.
아걸은 오늘 탕산 싸움에서도 탄궁도를 몇 번이고 펼쳤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썼다. 일직선으로 그어내는 칼은 가장 쓰기 편했다. 탄궁도의 묘리를 알고, 진기가 속도와 힘을 받쳐주면 반드시 죽음을 끌어낸다.
활검문주를 향해서 쏘아져 가는 칼은 탄궁도처럼 빠르지 않다. 일직선으로 쏘아가지도 않는다. 일직선에서 약간 밑으로 휘어진다. 활처럼 부드럽게.
얼핏 보면 십이대 문주의 유성비도와 흡사해 보인다.
까아아앙!
허공에서 도검이 부딪쳤다.
이 순간, 반철도는 활검문주의 검을 단숨에 으스러뜨렸다. 그리고 계속 뻗어 나가서 문주의 머리를 찍었다.
퍼어억!
반철도가 활검문주의 얼굴을 그어 내렸다. 목을 지나고 가슴까지 일직선으로 쪼갰다.
심장을 노리던 탄궁도가 아니다.
“큭!”
활검문주가 또 웃었다.
“이곳이 온 게 당신의 죄.”
아걸은 뚝 떨어지는 활검문주를 뒤로하고 유운검 길상을 향해 쏘아갔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비표가 또 날아왔다.
‘저기! 그리고 저기!’
아걸은 비표가 날아온 나무를 정확히 짚어냈다.
길상을 공격한 후, 곧바로 들이칠 목표다. 활검문주와 싸우면서 탄궁도에 힘을 푼다. 일직선으로 궤적을 그리지 않고 칼을 밑으로 떨궈서 흘린다.
그러면 반드시 동영 인자들이 비표를 날려올 것이다. 적어도 활검문주와 두세 번 정도는 도검을 섞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빈틈이 드러난다.
그런데 결과는 아걸이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다.
반철도를 밑으로 살짝 떨궜는데 오히려 일직선으로 뻗어낸 탄궁도보다 더 빨랐다.
일직선으로 쏘아내지 않고 밑으로 떨궜기 때문에 반철도는 더욱 부드럽고 유약해 보였다. 하지만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반철도가 일직선으로 최단 거리를 쏘아간 반철도보다 더 빨랐다. 간발의 차이지만 확실히 빨랐다.
이것은 아걸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다.
활검문주와 두세 번 정도는 병기를 부딪칠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아걸의 본의와는 상관없이 반철도가 이미 활검문주의 검을 박살 냈다. 그리고 더욱 빠르게 달려들어서 몸까지 갈라버렸다.
활검문주를 벤 움직임은 몸에 밴 것이다. 틈을 보자마자 몸이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니 문주를 벤 칼은 돌이켜볼 필요가 없다. 그건 당연하다.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흐른 칼이다.
칼에 대한 상식이 깨졌다.
점과 점을 잇는 최단 거리로 칼을 쏘아내는 것이 반드시 빠른 것만은 아니다. 일직선으로 뻗어내는 칼이 제일 빠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아니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부분이 있다.
동영 인자는 접전 순간에 여지없이 비표를 날렸다.
아걸이 칼을 쓸 때 허점을 드러냈다는 뜻이 된다. 절체절명의 허점처럼 보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형의 탄궁도를 전개했을 때보다 신형이 늦춰진 것만은 틀림없다. 본형의 탄궁도를 펼쳤다면 저들은 비표를 날리지 않는다. 틈을 찾을 수 없어서.
몸은 느리게 움직였는데, 칼은 오히려 더 빨랐다.
방금 펼친 칼과 비슷한 칼이라면 유성비도가 있다. 유성비도는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면서 내리긋는다. 맞다. 유성비도 역시 섬광처럼 빠른 칼이다. 하지만 유성비도가 탄궁도보다 빠르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실제로도 그렇다. 칼 중에 제일 빠른 칼은 탄궁도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기적이 아니다. 우연도 아니다. 이유는 칼의 궤적에 있다. 칼이 그려내는 궤적이 너무 완만해도 안 되고, 너무 늘어져도 안 된다. 정확하게 어느 한 궤적을 그릴 때만 일직선보다 빠를 수 있다.
칼의 무게가 일으키는 가속력과 최적의 흐름!
쒜엑! 쒜에엑!
유운검 길상이 검을 마주쳐왔다.
검이 종이를 겹쳐 놓은 듯 층층이 겹쳐진다. 오검법 운몽검법(雲夢劍法)이다.
이 검법 역시 잘 안다. 치유현 동승 마방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활검문 무공에 대해서는 거의 손바닥 보듯이 아는 편이다.
아걸은 다시 탄궁도를 떨쳐냈다.
이번에도 반철도를 약한 밑으로 흘렸다. 어떤 궤적을 그려내자는 생각은 없다. 모든 것을 칼과 몸에 맡긴다. 칼이 이끄는 궤적대로 몸이 따라간다.
퍼억!
여지없이 반철도가 유운검을 격타했다.
병기는 부딪히지 않았다. 유운검이 쳐낸 검은 아걸의 어깨를 스치며 내리그어졌다. 빗나갔다.
아걸은 한순간에 숨이 끊어져 버린 길상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를 옆으로 들려 세웠다.
파파파팟!
동영 인자들이 쳐낸 비표가 길상의 등을 격타했다.
아걸은 이미 숨이 끊어진 윤길상을 방패 삼아서 앞에 세우고 목표로 한 나무를 향해 쏘아갔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비표가 날아온다.
아걸은 길상의 시신을 비표를 향해 내던졌다.
파앗!
반철도를 번뜩였다. 나무를 싹둑 썰리고…… 핏물이 확 솟구쳤다.
동영의 유음류가 또 깨졌다.
은신술이 깨진 동영 인자는 허약하다.
이들은 다른 무공도 지니고 있다. 은신술만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독이든 암기든 아걸에게는 통하지 않으니…… 정말 답답할 것이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은 최후의 발악을 시작했다.
그들은 진기를 촉발해주는 잠력단(潛力丹)을 복용했다.
사마외도가 주로 쓰는 방법인데, 진기를 격발시켜주는 대신에 인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한다. 자칫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고 혈관이 찢어지기도 한다.
간이 손상되는 것은 피하지 못한다. 잠력단의 약효가 워낙 사나워서 복용 즉시 간이 무너진다. 그러니 정말로 불구대천의 원수와 싸울 때가 아니면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마단이다.
그런 마단을 거침없이 복용했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이십사 위문 무인들의 검초는 두 배 이상 빨라졌다.
하지만 아걸은 매우 유유히 움직였다. 저들이 아무리 빠르고 강해도 아걸 눈에는 여전히 느렸다.
공전을 얻었고, 탄궁도보다 더 빠른 궤도를 습득했다.
진기를 크게 소모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강력하게 쳐내는 방도를 알아냈다.
이 싸움은 아걸의 일홀도를 더한층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모순되게도 이십사 위문 무인들이 오히려 일홀도의 완성을 도와주고 있는 셈이다.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든 걸 안다고 장담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바보나 하는 짓이다.
허도기는 이십사 위문 무인들을 내던지면서 이 싸움이 오히려 아걸을 한층 더 강하게 성숙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돌이켜보면 성검문 십검 초가평과 싸울 때까지는 예전의 일홀도를 사용했다.
땀과 피로 이룬 일홀도다.
그때까지의 일홀도는 칼에 쏟은 정성만큼 성장했다. 은거 무인과 겨루면서 자연도를 얻었고, 그 칼로 남만족을 괴멸시켰지만…… 그때 얻은 일홀도 역시 땀과 피로 쌓은 일홀도였다.
수련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 후의 싸움부터는 뭔가 달라졌다. 온몸이 화상으로 얼룩진 상태에서, 칼도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노정문주와 겨룰 때부터는 예전의 일홀도가 아니다.
각성으로 이룬 일홀도다. 수련의 결과물이 아니라 깨달음의 결과물이다.
깨달음!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칼이 환히 보인다. 눈이 뜨였다. 세상을 보는 안목이 완전히 달라졌다. 똑같은 탄궁도를 펼치면서도 ‘이걸 왜 이렇게 펼쳤지? 이렇게 펼치면 되는데’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일홀도는 탕산에서 두 배 이상 강해졌다.
웃기는 일도 있다. 탕산 싸움을 벌이는 동안 공부 허도기의 검이 보인다.
허도기가 쓰는 검이 보인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이 펼치는 검초 속에서 공부의 검초를 본다. 예전에는 그토록 당황하고 힘들었던 검초인데, 지금은 매우 무난해 보인다.
쒜에엑! 쒜에엑!
검이 날아온다.
잠력단을 복용해서 두 배, 세 배는 빨라진 검이다. 또 매우 난폭하다.
잠력단을 복용하면 실성한 사람처럼 이성이 마비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육신에 힘이 넘쳐 흘러서 칼에 맞아도 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잠력단을 광혼단(狂魂丹)이라고도 부른다.
거기에 절정검을 수련한 사람이 떨쳐내는 검이라면 정말 무시할 수 없다.
파앙! 팡!
한순간,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터진다.
공검문주는 공기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다. 검초에 공기를 담을 수 있다.
아걸은 고개를 돌려서 공검문주의 검을 피했다.
퍼억!
파육음이 터졌다.
공기의 저항을 제거하고 뻗어낸 검, 공검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기도 전에 반철도가 문주의 몸을 갈랐다.
“이, 이렇게 빠른!”
공검문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입을 벌린 채 말을 잊지 못했다.
아걸은 돌아섰다. 이미 다른 사람을 향해 쏘아가고 있다.
아걸에게는 문주나 문도나 똑같다. 탕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이번만은…… 용서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