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六章 천하제일(天下第一) (2)
스읏!
아걸은 반철도를 늘어트렸다.
‘더는 불필요한 싸움…….’
문득, 이 싸움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상당히 많은 무인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다.
죽은 자들은 온갖 방법을 총동원했다. 활을 쏘고, 암기도 날리고, 화약도 터트렸다. 독무(毒霧)도 피워냈고, 전갈이나 독사도 내던졌다. 독 모래, 독사(毒砂)를 뿌리기도 했다.
발밑은 처처가 함정이다.
올가미나 발목을 낚아채서 허공으로 끌어올리는 챌목매는 귀여울 정도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공격이 펼쳐졌다.
동영 인자들도 적극적인 공세로 돌아섰다.
아걸이 은신술을 눈치챘으니 계속 숨어 있을 필요가 없다. 기습 공격이 불가능하다면 살수 비기를 사용한다. 연무(煙霧)로 눈을 가리고 독침을 쏜다. 은밀히 기어 와서 발목을 벤다. 사방에서 일제히 합격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무공을 고집한 무인들도 있다.
검망(劍鋩)은 검과 그물을 사용한다. 그래서 검망(劍網)이라고 불렀는데, 그물 망 대신에 서슬 망 자로 바꿨다. 그리고 아예 문파 이름도 검망으로 지칭했다.
그렇다. 검망은 허도기의 도움을 받은 신흥 문파다.
그들은 검과 작은 손 그물을 병용해서 사용한다. 투망보다도 훨씬 작은 그물로 상대의 병기를 낚아채기도 하고 다리를 붙들어 놓기도 한다.
일단 상대의 몸부터 고정한 후에 격타한다.
검망은 아걸을 생선으로 본 듯 연신 투망을 던졌다. 물론 탕산에서 사용하는 투망에는 독가시가 박혔다. 그래서 살짝 스치기만 해도 중독되어 죽는다.
아걸은 이런 모든 공격을 뚫었다.
아걸의 움직임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절한 움직임이 닥쳐오는 공격을 적합하게 받아쳤다. 그리고 죽음을 만들어냈다.
일도일사(一刀一死)!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도법이다. 너무 간단해서 도법을 펼치는 것 같지도 않다.
아걸은 무적이다. 당할 수가 없다.
열 명이 덤비면 열 명이 쓰러지고, 스무 명이 달려들면 스무 명이 쓰러진다.
기가 질릴 정도로 강하다.
그런데도 주위에는 아직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무인들이 있다. 검을 꼭 움켜잡고 투지를 이끌어 낸다. 두 눈에서 뜨거운 기운이 철철 흘러나온다.
아걸은 반철도를 늘어트린 채 그들을 쳐다봤다.
“…….”
“…….”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할 것인가? 공격해 보라고? 개죽음당하지 말고 인제 그만 물러나라고? 아니면 다시 또 움직여서 일도일사를 만들어 볼까?
아걸은 조용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그들을 쓸어봤다.
스으읏!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숲속에 진한 피비린내가 피어났다.
탕산은 발길 닿는 곳마다 시신이 늘어져 있다. 죽은 자들이 흘린 피가 계곡물을 빨갛게 물들여 놓았다.
이곳은 지옥이다.
아걸은 잠시 주위를 훑어본 후 계류로 걸어갔다.
스스슷! 스스스슷!
이십사 위문 무인들이 재빨리 진형을 정비했다.
아걸이 움직인다. 어느 쪽에서 칼을 쳐낼까? 누구부터 죽일 생각일까?
그런데 아걸이 반철도를 물에 담그고 핏물에 씻어냈다. 도신에 묻은 핏물을 씻고, 방패막이와 손잡이에 묻은 피도 정성 들여서 꼼꼼하게 씻었다.
핏물로 빨갛게 물든 물로 반철도를 씻었는데, 그래도 핏물이 씻긴다.
깨끗이 씻은 칼을 옆에 놓고 이번에는 두 손을 핏물에 담갔다. 그리고 손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이미 굳어서 끈적끈적해진 피를 씻어낸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적이 병기를 곧추세우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병기를 손에서 놓아 버렸다. 그리고 손을 씻는다.
그래도 무인들은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스으읏! 끼이익!
무인 몇몇이 석궁에 살을 재웠다.
석궁은 방아쇠로 당겨진다. 살이 작아서 유효거리가 짧지만, 철시를 쏘아내기 때문에 위력은 강력하다. 적중률도 일반 활보다 훨씬 뛰어나다.
방아쇠를 탁! 잡아당기기만 하면 철시가 튀어 나간다. 아걸을 공격할 수 있다. 그런데……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석궁을 잡은 손에 진한 땀이 배어 나왔다.
지금 아걸은 차분하게 손을 씻는다.
아걸은 싸우지 않는다. 아걸의 모습으로 짐작하건대 이제는 싸움을 정리하려고 하는 듯하다. 한데 이 시점에서 화살을 쏘면 아걸은 다시 칼을 잡고 움직일 것이다.
숲에 피바람이 분다.
살을 쏜다고 해서 맞출 자신도 없다. 다른 사람 같으면 십분 자신할 거리이지만, 아걸은 인간이 아니다. 귀신이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석궁을 쏘면 피바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으음!”
석궁을 들었던 무인들이 힘없이 신음을 흘렸다.
몇 번을 살펴봐도, 뚫어지게 주시해도…… 아걸은 무방비 상태다. 확실하다. 석궁을 쏘면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도 석궁을 쏘지 못했다.
스읏!
손을 씻은 아걸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주 태연하게 반철도를 집어서 허리춤에 찔러넣었다.
아걸은 숲에 무인들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듯 신경 쓰지 않는다.
아걸은 싸울 생각이 없다.
그래도 평소라면…… 임무를 부여받은 이십사 위문 무인들이라면 물러서지 않는다. 상대가 싸울 의사가 있건 없건 무조건 달려들어서 목숨을 끊는다.
무림은 죽이지 못하면 죽는 곳이다.
검을 들고 무림에 나섰다면 내 목숨 또한 언제든지 떨어질 각오를 해야만 한다. 그러니 목숨에 연연하지는 않는다. 아걸 같은 무인에게라면 언제든 죽을 수 있다.
목숨을 초개같이!
이십사 위문 검사들은 나름대로 검로를 충실히 걸어왔다고 자부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검을 쳐내지 못했다. 아걸이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막아서지 못했다.
스읏!
아걸이 눈앞을 지나간다.
공격? 못한다. 공격하면 죽는다. 아걸은 공격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크윽!”
“후후!”
비통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자조 섞인 웃음도 새어 나온다.
그래도 검은 쳐내지 못하겠다. 단 일 푼이라도 가능성이 있어야 공격하지.
공격? 방어? 누구 마음대로?
탕산을 지배하는 사람은 아걸이다. 모든 게 아걸 마음이다. 그가 죽이고 싶다면 칼을 들 것이다. ‘귀찮은 것들, 살려주자’라고 생각하면 칼을 거둔다.
아걸이 죽이고자 하면 죽고, 살려주면 산다.
누가 아걸의 칼을 막아낼 수 있겠나. 진기를 가득 끌어 올려서 최상의 검초를 전개한 것이나 손 놓고 앉아서 칼을 맞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아걸은 감당할 수 없는 고수다. 귀신…… 차원이 다른 인간이다.
“지당검?”
아걸이 숲에 매복해 있던 지당검 고사를 찾아냈다.
스읏!
지당검이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지 말라니까.”
아걸이 걸어가면서 말했다.
고사가 옆에 바싹 붙어서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지. 그런데…… 너…… 정말 내가 아는 아걸…… 맞나?”
지당검이 못 믿겠다는 눈으로 아걸을 쳐다봤다.
“훗!”
아걸이 피식 웃었다.
“아걸 맞네. 칼이 다르니 사람이 달라 보여서.”
지당검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잔뜩 굳어져 있었다.
지당검이 아걸을 보고 긴장할 리는 없다. 아걸과 생사 결전을 벌일 이유도 없고…… 그런데 긴장한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질 정도로 심하게 긴장한다.
지금까지는 아걸이 그저 심금을 털어놓고 지낼 수 있는 편한 동생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뭔가 굉장히 달라졌다. 굉장히 어려워졌다. 말조차 편하게 할 수가 없다.
아걸이 풍기는 위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내가 준 술, 상당한 독주였는데. 꽤 빨리 풀었네요?”
아걸이 농담으로 말했다.
“간이 워낙 튼튼해서. 키키!”
“그럼 오늘 또 한 잔 드려야겠네.”
“또? 이번에는 느낌이 좋지 않은데? 흑후도 손쓰지 못할 요상한 걸 먹이는 거 아냐? 사양! 사양!”
지당검이 비로소 긴장을 풀며 말했다.
농담을 하다 보니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 근육이 풀렸다. 환하게 웃음까지 지을 수 있다.
아걸은 아걸이다. 변하지 않았다. 예전에 알던 아걸이 맞다.
저벅! 저벅!
어느새 등 뒤로 네 사람이 달라붙었다.
쌍겸, 황열, 장태전, 한항…… 뒤쪽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사람들이다. 이십사 위문이 아걸은 놓쳤지만 은거 무인들만은 반드시 죽이겠다고 달려들었는데…….
그 싸움도 싱겁게 끝났다.
아걸이 절대도(絶對刀)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모든 싸움이 스스로 그쳤다.
탕산에서 아걸에게 죽은 무인은 사백 명가량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상당히 많은 무인이 죽었다. 하지만 옛날에는 이보다 더한 살상도 벌였다.
진평에서 대산방과 싸워 혈도비자라는 별호를 얻을 때…… 그 당시에 반철도에 쓰러진 원혼이 사백삼십팔 명이다. 남만족 전사 칠백 명을 죽인 적도 있다.
아걸은 대 살인귀다.
오히려 지금은 그때보다 희생이 적다.
하지만 칼이 완전히 다르다. 대산방이나 남만족을 쳐낼 때는 인간의 칼이었다. 그러니 죽이고 또 죽여도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언젠가는 아걸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인 이상 힘이 빠질 테니까.
지금은 인간의 칼이 아니다.
아걸이 사용한 칼은 하늘에서 내린 천도(天刀)다.
“일홀문…… 일홀도…….”
무인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중원 무인 중 일홀도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인전승인데다가 일홀문의 명맥도 이십여 년 전에 끊어졌다. 그 후의 일홀도는 풍도곡에만 존재했다.
하지만 아직도 몇몇 무인은 일홀도를 안다.
일인전승이라는 말은 매우 잔인한 말이다. 한 사문에 제자가 열 명이 있다면 아홉 명은 죽어야 한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대다수 일인전승 문파는 제자를 한 명만 거둔다. 딱 한 명에게만 비기를 가르친다.
일홀문은 제자를 많이 거둔다. 그러면서 일인전승이다. 사형제끼리 싸워서 최강의 칼을 탄생시키라는 것이다. 즉, 일홀도에는 반드시 사형제의 피가 묻어 있다.
이제 중원 무인들…… 중원을 지배하는 검사들이 일홀도의 실체를 봤다.
아무도 일홀도를 상대하지 못했다.
일홀도가 유유히 탕산을 벗어나고 있는데도 누구 한 사람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 * *
“그러냐?”
“네.”
사령이 공손히 대답했다.
“내가…… 일홀도를 만들어 주고 말았네. 일홀도를 만들라고 멍석을 깔아줬어.”
허도기는 직감적으로 일홀도의 탄생을 알아챘다.
아걸이 진짜 일홀도를 얻었다. 자신이 두려워했던 형의 친구, 삼십육대 일홀문주의 일홀도처럼……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일홀도를 찾아냈다.
탕산 절혼곡은 천험의 요지다. 열 명이 천 명을 막아낼 수 있는 험지다. 이십사 위문이 탕산의 지형을 잘 이용하면 아걸 정도는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걸이 오히려 탕산에서 기회를 찾아냈다.
“하하하! 하하! 하하하!”
허도기는 크게 웃었다.
“역시 진골. 우리 허씨 핏줄이야. 하하하! 하하하하!”
허씨의 무재(武才)는 남다르다. 허씨 핏줄 쳐 놓고 무재 아닌 사람이 없다. 용이 용을 낳지 뱀을 낳을까. 아무리 못난 놈을 낳아도 역시 용이다.
용은 어떤 무공이든 단숨에 깨우친다. 검초를 수련하는 모습만 보고도 바로 모방할 수가 있다. 그만큼 무공을 수련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하물며 아걸은 용골 중에서도 진골이다.
용 중에서도 최상의 용이다. 천하제일인이라고 칭송받는 자신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진골 소리를 들은 조카다. 형 허도강, 그리고 조카들 허문승, 허문학, 허문기…… 그들 모두 진골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오직 한 명, 아걸만 진골 소리를 들었다.
무공이라 하면 하늘의 은총을 받아서 태어난 무인 가문에서도 아걸은 특히 은총을 받았다.
그러니 그런 조카가 일홀도를 얻은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일 것이다.
“조카…… 하하하! 일단 축하해야겠군.”
허도기는 지필묵을 들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걸…… 아니, 조카 허흔에게 보내는 축하 편지다.
허도기도 아걸의 성취를 축복했다.
그렇다고 일홀도가 자신의 검을 이긴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왜? 자신의 검은 천하제일검이니까.
천하제일이라는 말뜻을 모르나?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검이라는 거다. 위가 없는 검, 옆도 없는 검, 오직 아래만 존재하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검이다.
조명십해는 하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