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六章 천하제일(天下第一) (4)
명부판관에게 취화원 살수가 찾아오는 일은 이상하지 않다. 너무 당연한 일에 속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취운이 찾아왔다.
“아니, 어떻게?”
한항이 깜짝 놀라서 급히 취운을 맞이했다.
취운은 취화원의 머리다. 그녀가 수집한 정보와 판단이 몽설의 결정을 이끈다. 취운의 실수는 곧바로 몽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진다.
취운은 오곡주이자 취화원 부원주다.
그녀가 몽설 부재 시에 취화원을 이끈다는 사실은 이미 중원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말은 취운도 이미 암살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취화원을 무너뜨리고자 할 때 제일 먼저 노리는 사람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런 취운이 단신으로 아걸을 찾아왔다.
“저 혼자 오지 않았어요. 호호! 일곡이 주변에 배치되어 있어요. 안심해도 되요.”
취운은 한항이 놀란 이유를 짐작한다. 그래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명부판관 일은 부곡주에게 시켜도 되는데.”
한항은 취운이 방문한 이유가 다음 징벌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명부판관은 다섯 번째 징벌로 노정문 강유를 척살했다. 그리고 잠시 휴식이다.
휴식을 취하는 시기가 딱 좋았다.
다섯 번을 징벌한 후에 잠시 휴식한다는 관례를 만드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된다.
이제 또 움직일 때인가?
“상군께서는…….”
“그게…….”
한항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칼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는다.
온종일 칼만 생각하다가 갑자기 칼 생각이 뚝 끊기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세상이 텅 빈 것 같고 굉장히 무료해졌다.
아걸은 혼란스러웠다.
가열차게 달려오던 칼의 길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니 몸도 마음도 멍청해진다.
스륵!
반철도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여 봤다.
삼십육 문주의 일홀도도 되새겨봤다.
초대 문주의 환부살도 십이식 백이십팔초에서부터 사부의 진기통타까지…… 하지만 뜨거운 열기가 일어나지 않는다. 흥미가 일어나지 않는다.
도법은 도법일 뿐이다. 칼은 칼이다.
허도기의 발검도 떠올렸다.
눈부시게 피어나던 검화(劍花)!
하지만 역시 심드렁해졌다.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무기력하지? 도무지 칼에 대한 의욕이 생기지 않으니.
아걸은 잠을 청했다.
잠이 쏟아진다. 갑자기 세상이 무료해지니 잠자는 일 밖에 남아 있지가 않다.
“상군, 오랜만입니다.”
취운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걸은 잔뜩 졸린 눈으로 취운을 맞이했다.
한항이 급히 깨워서 일어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잠에 취해 있는지 멍한 표정이다.
“갑자기 무슨 일로…… 앉으세요.”
아걸이 쏟아지는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
‘이건 무슨……?’
취운은 눈빛을 반짝였다.
아걸은 매우 나태해졌다. 두 눈 가득히 졸음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취운에게는 차분한 모습으로 비쳤다.
냉정할 정도로 침착한 것과 느긋한 여유가 흘러나오는 차분함은 완전히 다르다. 얼음 같은 침착함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반면에 아걸이 보여 주는 여유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아걸은 긴장, 압박, 허세 등등을 완전히 떨쳐 버렸다.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자유인이다.
은거 무인들은 아걸이 잠에 취해 있다고 말하지만, 취운은 진정한 자유를 본 느낌이었다.
“축하드립니다.”
그녀도 모르게 축하 인사부터 나왔다.
“축하? 뭘요?”
아걸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일홀도 봤어요. 탕산에서.”
“아! 그거…….”
아걸이 피식 웃었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싸움 도중에 칼이 변하신 것 같은데, 맞게 봤나요?”
“아함! 아! 실례.”
아걸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기지개를 켠 듯하다. 그러다가 취운을 의식하고는 급히 사과했다.
은거 무인들 말대로 아걸은 진짜 잠에 취한 모습이다.
“방금 무슨 말을…… 아! 일홀도. 그 말이 싸움 도중에 일월도를 얻었느냐는 물은 거라면…… 맞아요. 그러니 칼은 당연히 변했을 거고. 너무 흉했나?”
“아뇨. 놀라웠어요. 오의를 얻으신 거죠?”
“하하! 난 참 이상해요. 지금까지 뭔가를 몇 번 얻었는데, 그게 꼭 싸우는 중에 깨달아지더라고요.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팔자인가? 지금까지 보면 항상 그랬어요.”
아걸이 웃었다.
“상군이니까 가능한 얘기예요.”
취운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아걸이 워낙 특출해서 싸우는 중에도 오의를 깨달은 것이다? 아니다.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다. 싸우는 도중에 오의를 얻었다는 말은 재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걸은 오직 칼만 생각한다. 온종일, 일 년 열두 달 칼에 파묻혀 산다.
칼! 칼! 칼!
칼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
밥을 먹는 중에도, 잠을 자는 중에도, 몽설과 밀어를 속삭일 때도 칼이 떠나지 않는다.
그만큼 칼에 집중하게 되면 오의는 저절로 따라붙는다.
싸움은 병기와 병기가 섞이는 극한의 순간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장감이 가득 틀어박혀 있다. 그러니 칼에 집중된 집념이 극한의 환경 속에서 변화를 찾아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함!”
아걸이 또 길게 하품을 했다.
“명부판관, 계속하시겠어요? 원주님께서 여쭤 보라고 하시네요.”
“몽설이?”
“네.”
“거참 어려운 일을 시키네. 난 생각 같은 거 잘하지 못하는데.”
말을 하는 아걸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몽설을 말하면서 그녀를 생각하고 있다. 칼에 관한 생각을 잊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지 않나.
아걸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걸려 있지 않다. 그렇다고 청명한 하늘도 아니다. 온 세상이 희뿌옇다. 구름은 없지만, 태양도 보이지 않는다. 매우 흐린 날씨다.
“오곡주, 어떻게 할까요?”
아걸이 문득 물어왔다.
“그러시면 당분간 더 쉬시겠어요?’
취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상하게 요즘 너무 졸려서 쉬기는 쉬어야 하는데…… 언제까지 쉬면 될까요?”
아걸이 물어왔다.
“흑화방에서 백살도축에 대한 말을 전해왔어요. 그래서 급히 대비했는데, 모두 지키기는 어려울 거예요.”
“백살도축?”
아걸이 금시초문인 듯 물었다.
“명부판관은 공부의 수족을 자르고 있어요. 그러니 허도기도 역공을 취해온 거죠. 우리 수족을 잘라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허도기는 탕산 싸움이 하루 만에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 만에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싸움의 종결은 이십사 위문이 지었어야 한다.
아걸이 이십사 위문을 짓눌러서는 안 된다.
아걸을 묶어 놓고 그사이에 백살도축을 행한다. 명부판관이 입힌 손해를 백 배, 천 배로 되돌려준다.
“우선 우리 취화원이 지금은 움직일 수 없어요. 백살도축에 끌려들어 가는 바람에.”
“흠!”
아걸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취운이 계속해서 말했다.
“변방에 나가계신 대장군도 손발이 묶였을 거예요. 간자들 때문에.”
“하하! 그게 쉽게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니까.”
아걸이 졸린 눈으로 웃었다.
허도기는 많은 곳에 사람을 심어놨다. 그중 가장 선급한 곳이 황궁과 군부, 그리고 취화원이다. 이곳에 섞인 간자만큼은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간자가 움직이지 않는다. 허도기가 중원을 떠나 있는 지금은 더더욱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이 움직이는 시기는 아마도 허도기가 변방에서 돌아올 때일 것이다. 아니면 직접 명령을 받아도 움직이겠지만, 허도기도 이 부분은 조심한다.
결국, 간자를 모두 색출하지 못했다.
이런 점은 군부가 훨씬 심하다. 군부는 함정을 파서 알아낼 방법조차도 없다.
휘하 장수가 허도기 사람인지 아닌지는 전쟁터에서 판가름 난다. 전쟁터에서 조위 장군의 뒤통수를 치면 허도기 사람인 것이고 명령에 순순히 따르면 허도기 사람이 아니다.
아니, 이것도 믿지 못한다. 지금은 명령을 순순히 따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칠 수가 있다.
조위 장군은 마음껏 나가서 싸울 수가 없다.
얄미운 것은 상황이 이런데도 허도기는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외팔국이 중원을 노리고 노리는 게 확실하지만, 그들 속에서 허도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허도기는 여전히 공부다.
그가 중원으로 들어와도 왜 역모를 저질렀느냐고 다그칠 수가 없다. 간자를 심은 이유조차 물어볼 수 없다. 공부는 티끌만 한 증거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취운이 말한 ‘간자’라는 말에는 이런 모든 상황이 복합적으로 함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군. 될 수 있으면 멀리 움직이지 마시고 당분간은 여기서 쉬시는 걸 권해드려요.”
“여기서?”
“네. 기왕이면 경치 좋은 곳을 찾으셔도 되고요.”
취운이 방긋 웃었다.
당분간 무림 활동을 하지 말라는 권유다.
“오곡주, 그건 왜……?”
옆에서 잠자코 듣기만 하던 장태전이 기어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장태전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도 취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방주께서는 제 말, 아시죠?”
취운이 흑화방주 흑후를 보며 말했다.
“쩝! 무림에게 수습할 시간을 주라는 거지 뭐. 이십사 위문이 박살 났으니 무림이 발칵 뒤집힐 거 아냐. 이번 싸움에서 전력을 대부분 잃은 활검문이나 팔천검문 같은 경우에는 문파 보존도 하지 못할걸? 송가검문 같은 경우에는 조금 낫지. 문주만 죽었으니 바로 문주를 세우면 별다른 영향은 없을 거야. 좌우지간 이번 일로 무림 판도가 완전히 바뀔 거야.”
“그게 뭐 하루 이틀 사이에 정리되는 게 아니잖아?”
한항이 되물었다.
“당연히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 하지만 지금 당장 또 건드려서는 안 되지 않을까? 저들에게도 운신할 시간을 줘야지. 차라리 님 곁에 있는 게 어때?”
흑후가 말했다.
몽설에게 가라는 말이다. 당분간 일홀도에 관한 생각을 완전히 접고 푹 쉬라는 거다.
“그것도 백살도축이 끝난 후에…….”
취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취운은 아걸이 몽설 곁에 가는 것까지 만류했다.
명부판관은 허도기의 수족을 자르는 일이다. 그러니 허도기도 백살도축을 행한다.
양쪽 모두 죽고 죽이는 싸움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허도기에게 무척 유리하다. 몽설은 허도기의 수족을 많이 알지 못한다. 허도기는 황제나 조장군의 수족을 너무 잘 안다.
백살도축이 끝날 동안만이라도 서로 견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사실 명부판관으로 허도기를 들쑤신 것은 허도기가 행동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다. 한시라도 빨리 허도기가 공부라는 탈을 벗고 반역도라는 이름으로 나서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자면 명부판관의 징벌이 오 회에 그쳐서는 안 된다. 삼십 회, 사십 회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한다. 그러면 허도기도 마음이 급해질 것이다.
명부판관의 징벌은 최소한 반년 후를 보고 벌인 일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금군, 취화원 그리고 군부에서 허도기의 간자를 모두 잘라냈다면 지금 당장 몰아쳤을 것이다. 중원이 깔끔하게 청소되었을 거다.
하지만 대다수의 간자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정계와 재계 인물만 제거한다고 달라질 것은 거의 없다.
취운은 그런 생각에서 명부판관 일을 잠시 쉬라고 했다. 몽설과도 떨어져 있는 편이 낫다고 했다. 백살도축이 끝날 때까지는 허도기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생각이다.
취운이 이런 생각을 한 데는 아걸이 일홀도를 얻은 것도 아주 크게 작용했다.
이것은 매우 큰 상황 변화다.
이제 아걸이 중원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준동하지 못한다.
일홀도가 간자를 억누른다.
굳이 명부판관이 나서서 사람을 죽일 이유가 없다. 싹 솎아내는 것이라면 감수하겠지만 일부만 솎아내는 것이라면 움직일 이유가 없어졌다.
“후후! 내 의견을 들으러 온 게 아니네. 손발을 묶어 놓으려고 왔네.”
아걸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