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480화 (480/600)

第九十六章 천하제일(天下第一) (5)

“아걸은?”

“자.”

“또? 지금 얼마나 자는 거야?”

“여섯 시진은 넘었지?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있네. 인제 그만 기운을 차릴 때도 됐는데.”

아걸은 나흘 내리 잠만 잤다.

일부러 잠을 청하는 것이 아니다. 잠이 쏟아지는 듯하다.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고개를 뚝 떨구고 꾸벅꾸벅 존다. 하루 종일 자고도 잠이 모자라 보인다.

잠에 취해도 단단히 취했다. 잠귀신이 달라붙어도 굉장히 센 놈이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다른 때하고 다르네. 확실히 일홀도를 얻긴 얻은 것 같은데. 그렇지?”

“탕산에서 본 일홀도는 끔찍했는데.”

한항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아걸을 깨우는 방법이 있다. 지금 즉시 아걸이 자는 방으로 뛰쳐들어가서 공격하면 된다.

그래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아니다. 즉각 잠에서 깨어 반격한다. 한항이 끔찍하다고 중얼거린 탕산 일홀도가 재현된다. 그리고 주검만 남는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물론 아걸은 칼을 조절할 수 있다.

잠결이지만 살기가 깃든 공격과 장난삼아 던져오는 공격은 대번에 구분한다.

장난으로 일으킨 공격은 무시한다.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는다. 검이 피부에 닿아도 마찬가지, 반응하지 않는다.

아걸은 살기 깃든 공격에만 반응한다.

다시 말해서 아걸을 깨우려면 검에 살기를 담아야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살기를 거둬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는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 아걸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검에 맞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해야만 한다.

그만큼 깊은 살심을 담고 검을 휘두를 때만 아걸이 잠에서 깨어나 반응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가는 죽음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아걸을 깨울 수 있는 방도가 없다.

“얼마나 더 잘까?”

“내버려 둬. 깨운다고 해서 깨워질 게 아니니까.”

“하기는 그렇지?”

은거 무인들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걸의 행동을 이해한다. 아걸이 왜 잠만 자는지 알 것 같다.

그들은 지금도 탕산 싸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너무 놀라서 입이 쩍 벌어지던 그 순간을 어떻게 잊겠나. 평생 그날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탕산 싸움이 있기 전에도 아걸의 일홀도는 무척 강했다. 은거 무인 중에서 아걸과 맞싸워 이긴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다. 일대일은 물론이고, 이 대 일이나 삼 대 일로 싸워도 아걸을 꺾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지금은 또 변했다.

지금은 아예 싸움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부딪히면 죽는다는 오직 한 생각뿐이다.

지금 아걸은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머리는 잠들어 있지만, 몸은 일홀도를 정비하는 중이다. 탕산에서 보여준 일홀도를 가다듬고 있을 것이다.

은거 무인들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그들의 무공도 일가를 이룬 경지다. 이런 무공을 가만히 앉아서 얻은 게 아니다. 부단한 노력과 치열한 싸움을 치르면서 한 계단씩 쌓아 올렸다.

그들에게도 도약의 순간이 있었다.

어느 날 어떤 때, 한순간이 불현듯 찾아온다. 극한의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한 순간이 온다. 그러면 희한하게도 삶의 의욕이 툭 꺾이면서 무력해진다.

“자자, 오늘은 기운도 낼 겸 고저제(烤猪蹄: 매운 족발)나 먹어 볼까? 어때?”

“그거 만드는 데 시간 좀 걸리지 않아?”

“지금 준비하면 저녁에는 먹을 수 있지. 족발 좋은 놈으로 사다가 푹 졸여서 먹어보지 뭐.”

“사 오는 김에 술도 좀 사와.”

“킥킥! 한가하니 좋을 때도 있네. 어떻게 요즘은 매일 술판이야. 우리 엊그제까지만 해도 싸움 걱정하던 놈들 맞아? 너무 탱탱 놀아대니까 미안해서.”

“하하하! 놀 때 놀자고. 언제 또 무슨 걱정을 하게 될지 모르니까.”

“그래. 그 말이 맞아. 어떻게 저놈이랑 붙어 다닌 후부터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니야. 무슨 사단이 이리 많이 일어나는지. 툭하면 죽을 걱정을 해야 하니. 하하하!”

은거 무인들이 마음을 풀어놓고 웃었다.

아걸은 자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잠이라는 요물은 자고, 자고 또 자도 채워지지 않는다. 아니, 잘 수록 잠이 늘어난다.

눈을 뜨면 ‘또 잤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도 치민다. 하지만 흐릿한 눈으로 밖으로 쳐다보다가 어느새 또 잠이 들고 만다.

‘또 잤네.’

아걸은 고개를 돌려 밖을 쳐다봤다.

밖이 환하다. 낮인 것 같다. 잠에서 깨어보면 어떤 때는 낮이고 어떤 때는 밤이다.

배가 고프면 일어난다. 은거 무인들이 일어나면 먹으라고 갖다 놓은 음식이 있다. 그것을 먹고 다시 드러눕는다.

“죽겠네. 왜 이렇게 졸리지?”

아걸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침상에 앉아서 중얼거렸다.

인제 그만 일어나자고 생각하는데, 눈꺼풀은 생각과 다르게 철근이 묶여 있는 듯 뚝뚝 떨어진다.

꾸벅! 꾸벅!

아걸은 잠시 앉아서 졸았다.

그렇게 자고도 또 잠이 쏟아진다. 자신도 모르게 잠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

아걸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정말 칼에 대한 마음을 탁 풀어버린 것 같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시위가 탁 끊어져 버렸다. 칼에 대한 긴장감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무료함이 찾아왔다.

눈을 돌려 침상 옆에 놓인 반철도를 쳐다봤다.

탕산 싸움을 벌일 때 ‘칼은 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는 말이다. 칼은 칼일 뿐이다. 그러면 언제는 칼이 칼 아닌 다른 것이었나? 글쎄…… 모르겠다. 지금은 반철도에서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애병(愛兵)인 반철도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다.

이대로 놓고 가라면 그러겠다. 싸우다가 잃어버려도 찾을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애병…… 그저 투박한 칼일 뿐인데.

지금 아걸에게 반철도가 주는 의미는 할배가 만들어 준 병기라는 의미 외에는 없다. 그동안 자신과 생사를 함께한 병기라는 의미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칼은 칼일 뿐이다.

도법도 마찬가지다. 도법이란 칼을 쓰는 방법일 뿐이다.

“일어나자. 일어나야 해.”

아걸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침상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걸음을 떼자마자 걷기가 싫어졌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잤는데 허벅지가 땡땡하게 굳어있다. 다리를 움직이자마자 허벅지에서 묵직한 통증이 울리며 피곤해진다.

‘힘들어. 걷기 싫어.’

털썩!

아걸은 다시 침상에 주저앉았다.

몸이 물 먹인 솜처럼 무겁다. 다리는 천 리를 달려왔을 때처럼 힘들어한다.

아걸은 느닷없이 쏟아지는 잠이 그동안 입은 상처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다.

초가평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다. 화상도 심한 편이다. 아직 낫지 않았다. 그런 몸으로 탕산 싸움을 접했으니 몸이 마구 뒤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병석에 누워서 운신도 하지 못할 몸을 가지고 싸움을 치렀다.

이십사 위문 무인들은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몸으로 사백여 명을 죽였으니 나가떨어질 만하다. 사흘이고 나흘이고 잠에 빠질만하다.

사실, 탕산에 들어설 적만 해도 걷기조차 힘들었는데 막상 들어서고 나니 아픈 것을 싹 잊어버렸다. 싸움이 시작된 후에는 아픔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몸이 힘들었을 것이다. 무척 고된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잠이 쏟아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몸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고 있다.

아걸은 흑화방의 도움을 제대로 받고 있다. 흑후는 탕산 싸움이 끝나자 제일 먼저 몸부터 살폈다. 의원을 네 명이나 붙이고 밤낮으로 돌본다.

탕산 싸움에서는 상한 곳이 거의 없다.

초반에 동영 인자의 독비에 당했지만, 그 후에는 스치는 정도의 상처밖에 입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극심하게 움직인 탓에 아물던 상처가 벌어졌다. 그 상처가 도검에 상한 상처보다 훨씬 큰 편이다. 달리 손해 본 곳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후후! 이건 몸의 문제가 아니군. 마음의 문제야.”

아걸은 반철도를 쳐다봤다.

애병 반철도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나무 조각처럼 볼품없다.

“칼을 잃은 건가?”

칼이나 도법에 대해서 일체 애착이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린다. 반철도가 처음 본 물건처럼 낯설다.

스읏!

손을 뻗어서 반철도를 들었다.

익숙한 느낌이 전해진다. 반철도 손잡이에서 손바닥과 손가락 자국이 느껴진다.

휘릭!

손가락만 움직여서 반철도를 움직여 봤다.

반철도가 장난감처럼 가볍게 휘돈다. 익숙하게…… 전혀 낯설지 않게 움직인다. 자신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반철도가 알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몸에서 떨어져 있을 때는 한낱 철도에 불과했는데 손과 접촉하자 몸의 일부가 되었다. 칼인지 손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스읏!

반철도를 다시 내려놨다.

칼을 잃어버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반철도를 들어도 예전처럼 바싹 당겨지는 팽팽한 느낌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어떤 느낌도 들지 않는다.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그만 일어나자. 정신 좀 차리고.”

아걸은 머리를 세차게 휘둘렀다.

아걸이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어? 저거 누구야? 그래도 일어나긴 하네?”

한항이 제일 먼저 아걸을 발견했다.

“족발 냄새가 풍겼나?”

“그러면 뭐야? 식탐이 수면욕을 이긴 건가? 하하하!”

은거 무인들이 아걸을 놀렸다.

“일어났으면 세면부터 하지. 오늘 씻지도 않았지? 어휴! 저 머리 떡 진 것 좀 봐. 도대체 며칠을 씻지 않은 거야?”

흑후도 아걸을 놀렸다.

아걸은 털썩 주저앉으며 매운 족발을 집었다.

“맛있겠네.”

족발에서는 매콤한 고추기름 냄새가 확 풍겼다. 깨까지 뿌려서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으적!

아걸은 족발을 입에 넣고 씹어 먹었다.

“먹는 거 보니까 멀쩡하네. 이제 다 잔 거야?”

한항이 물었다.

“좀 쉬어야겠어요.”

아걸이 입안에 고기를 가득 베어 물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쉬고 또? 이제 좀 움직이지?”

“아니. 이렇게 쉬는 게 아니라 제대로 쉬어야겠어요. 넘어진 김에 쉬었다가 가려고요.”

“지금은 쉬는 거 아닌가? 충분히 쉰 것 같은데, 좀 움직이지? 취화원은 정신없이 움직이는데. 네가 움직여야 명부판관 일도 또 하지. 세상에 악인이 좀 많아?”

쌍겸이 말했다.

“절에 들어갈까 하는데, 아무도 없는 암자라면 더 좋고. 적당한 데 없어요?”

아걸이 흑후를 보며 물었다.

“암자?”

“쌀 몇 말 들고 들어갈까 하는데.”

“진심이야?”

“진심이죠.”

아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홀도를 정비하려고?”

“무슨 소리를. 쉬려고 한다니까요.”

흑후와 은거 무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아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정말 쉰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홀도를 다시 정리한다는 것인지 숨은 뜻이 읽히지 않았다.

아걸의 표정을 보면 정말 쉴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좋은 데가 있긴 하지.”

흑후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일 년 열두 달 사람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곳인데, 경치는 기가 막혀. 다만 산세가 험악해서 가는 길이 힘들고, 사람 발길이 닿지 않으니 맹수도 심심찮게 나와. 뭐 독사나 독충은 득실거리고. 무공 수련하기는 딱 좋아.”

“그럼 퇴짜. 다른 데는요?”

“퇴짜? 가보지도 않고? 왜?”

“그동안 말한 걸 뭘로 들었어요? 움직이기 싫다니까. 그냥 편히 쉴만한 곳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지어 먹고 빈둥거릴 수 있는 곳. 그런데 없나?”

아걸이 족발을 집어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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