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七章 전운감지(戰雲感知) (4)
황제가 친히 적랑대의 부활을 보장했다.
적랑대를 위한 터전까지 마련해 주었다. 풍도곡을 기반으로 한다면 중원 최대 문파를 유지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살수 문파의 준동을 허락한 것은 아니다.
살수 문파는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집단이다. 어떤 황제가 이런 문파를 용인해 주겠나.
살수 문파는 때려잡기 딱 좋다. 허도기가 적랑대를 그토록 심하게 몰아붙일 수 있었던 것도 악의 뿌리를 뽑아낸다는 대의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적랑대가 어떤 일이 하든 상관없다. 딱 하나,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일을 했다면 멸문지화를 당해도 마땅하다. 그런 일에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이런 점은 명부판관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만약 돈을 받고 명부판관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치자. 명부판관이 손을 댄 사람이라면 악인이 뻔하다. 하지만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돈을 받았다면 대의명분은 소멸해 버린다.
아무리 좋은 일도 돈 받고 하면 검은색이 덧칠해진다.
황제가 허락한 것은 적랑대다. 무엇을 해도 좋으나 살행만은 허락되지 않는 정상적인 문파다.
적랑대가 살행을 하고, 그 일로 인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가차 없이 죄를 물어올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만 아니라면 황제가 직접 보호해 준다.
사실, 살수문파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는다.
세상 전체를 적으로 삼을 배짱으로 살수 문파를 창건한 사람들이 보복을 두려워하겠나. 언제 어느 문파든 보복해 올 수 있다. 그 정도는 항시 각오한다.
마른하늘에 벼락 맞듯이 기습을 당해 죽는 것, 이것이 살수 문파의 숙명이다.
“감사합니다. 이건 받지 않을 수 없군요.”
임지정이 황제의 친서를 뜯어보지도 않고 품에 찔러 넣었다.
“많이 힘들어?”
아삼이 물어왔다
“조심한다고 하는데 많이들 다치네요. 유음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요.”
몽설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동영 인자들은 ‘형체 없는 칼’이라고 불린다. 매우 은밀하게 다가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선물하고는 돌아간다. 올 때도, 갈 때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러니 취화원도 사력을 다해야 한다.;
“아걸 그놈은 뭐해? 지 할 일 끝났으면 와서 좀 도와주지.”
아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몸이 많이 상했어요. 싸움도 계속 이어졌고…… 이번에는 꽤 오래 몸을 추슬러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그놈 옷 한 번 홀딱 벗겨 봐야겠어.”
“네? 왜요?”
“어디 성한 구석이 있어야지. 이놈에게 칼 맞고 저놈에게 찔리고. 하루라도 몸 성한 날이 있어야 말이지. 그만한 칼을 가지고 왜 당하고 다니는지. 몸이 멀쩡한지 좀 봐야겠어.”
“그러게요.”
몽설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기왕 내려온 김에 그놈 좀 보고 가야겠는데, 어딨는지 알아?”
몽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느 날, 아걸은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훌쩍 사라졌다.
은거 무인도 사라졌다. 흑후도, 흑화방도…… 마치 땅으로 쑥 꺼진 듯 모두 사라졌다.
취화원은 그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럼 적랑대도?’
아삼이 아걸의 소식을 물어오는 것을 보면 적랑대도 아걸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소리다.
“그러면 적랑대도 오빠 소식을 모르는 거예요?”
몽설이 임지정을 쳐다봤다.
임지정이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랑대라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을 다 주시하고 있을 수는 없다. 물론 아걸은 특수 주시 대상이지만, 탕산 싸움이 끝난 후에는 잠시 주시를 늦췄다.
마침 아걸이 숨을 고르는 시기였다. 탕산 싸움을 끝낸 후이고, 전에 당한 부상이 도져서 당분간은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봤다. 또 실제로도 아걸은 잠만 잤다.
취운이 명부판관에 대한 말을 물었을 때도 당분간은 쉬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래서 아주 잠깐 눈을 돌렸는데, 그 순간에 아걸이 사라졌다.
“그러면 지금 오빠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네요.”
몽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그놈 소식을 모르는데 누가 알아! 다른 놈은 몽땅 한눈팔고 지랄을 떨더라도 너만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지켜봤었어야지! 쯧!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
“없어야지! 무슨 할 말이 있어!”
아삼이 매우 사납게 힐문했다.
아걸은 몸이 좋지 않은 상태다. 그런 몸으로 탕산 싸움까지 치렀다. 탕산 싸움이 예정되었을 때는 누가 봐도 죽을 게 뻔한 싸움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압도적인 승리였지만, 이런 승리는 손톱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삼은 아걸에게서 눈길을 돌린 몽설이 서운한 것이다.
서로서로 평생 반려자라고 생각한다면서 어떻게 이런 지경에서 눈길을 돌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할아버지. 다음에는 꼭 놓치지 않고 지켜볼게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정말 두 번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만은 지켜볼게요. 믿어주시고, 화 푸세요.”
몽설이 아삼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다.
* * *
몽설이 자리를 비웠다. 황제 곁을 지키던 취화원 살수도 일제히 물러났다.
당분간 취화원은 백살도축에 전력을 집중한다.
황제의 안위는 근위대가 지킨다.
- 우리가 예전부터 해왔던 일이지. 별다를 게 없어. 금군 안에 파고든 간자가 문제였는데, 모두 처리했으니까. 색출해내지 못한 자가 있다고 해도 함부로 준동하지 못할 거야. 개죽음을 감수하고 지금 상황에서도 움직이려나?
근위대장이 자신 있게 말했다.
원래는 금군이 맡아야 할 일을 취화원이 맡았다. 아무래도 동영 인자들과 살법으로 싸우는 일은 금군보다는 살수 문파가 나을 것이라고 여겼다. 금군이 고관대작을 지켰다면 벌써 백살도축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취화원에서 사상자가 많이 나오고 있다. 밤을 지내고 나면 환궁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
몽설까지 나서서 전력을 다해야 할 판이다.
취화원이 비킨 자리는 원래대로 금군이 채웠다.
근위대는 간자를 아흔네 명이나 색출했다. 그리고 하룻밤 새에 모두 처단했다.
하지만 아직도 숨어있는 자가 있다. 미처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틀림없이 있다.
허도기 쪽에서 움직이는 자들은 캐고 캐도 끊이지 않고 나온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또 나온다. 질릴 정도로 나오고 있다. 그들 모두를 다 제거한다면 아마 금군을 해체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까지 든다.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엄청나게 많은 것만은 사실이다.
황제를 지키는 금군조차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 이러니 원래대로라면 호황위가 자리를 비켜서는 안 되겠지만, 한 명…… 근위대장을 믿고 자리를 비웠다.
근위대장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황제를 지킬 사람이다.
저벅! 저벅!
황제가 걸음을 옮겼다.
풍광을 즐기던 연못에서 암습을 받은 이후 미송림(美松林)으로 산책로를 변경했다.
물론 황제가 산책을 하기 전에 금군이 먼저 숲을 뒤진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숨지 못할 정도로 샅샅이 훑는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발견되면 즉시 제거한다. 티끌만 한 위험 요소도 남겨놓지 않는다.
오늘은 아무런 일도 없다.
저벅! 저벅!
황제는 뒷짐을 지고, 머리를 떨군 채 깊은 생각을 하며 걸었다.
“쿨룩! 쿨룩!”
가끔 거친 기침도 했다. 오음절맥이 더욱 악화되어서 낯빛이 백지장처럼 창백하다.
“도공.”
“네.”
환관이 즉시 대답했다.
“좀 쉬었다 가야겠다. 앉자.”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환관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평평한 곳을 골라서 의자와 다탁을 놓았다. 다른 환관은 광주리를 열어 다과를 꺼냈고, 또 다른 자는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서 불을 피웠다.
황제가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게끔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
저벅! 저벅!
황제가 걸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째잭! 짹! 째애액!
미송림에는 맑은 산새 소리가 기분 좋게 번져갔다.
숲은 고요하다. 세상이 움직임을 멈춘 채 차분히 가라앉은 느낌이 든다.
“여기는 이렇게 조용한데…….”
관중에 거란인이 운집한다는 보고를 받은 후다. 관중을 염려하고 있는 듯하다.
황제의 말에 응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일 뿐이다.
“대장군이 알아서 하겠지. 그렇지?”
“네. 그러실 겁니다.”
도공이 대답했다.
“오늘 차는 뭐야?”
“기침을 많이 하셔서 도라지 끓인 물을 준비했습니다. 따뜻하게 데워서 곧 올리겠습니다.”
“도라지? 쯧! 미송림에서는 차를 마셔야 제격인데.”
황제가 불만스러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슛!
뭔가가 움직였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움직이는 형체가 보인 것도 아니지만…… 무엇인가가 움직였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저절로 고개가 돌려 쳐다보게 된다.
쒜에에엑!
뒤이어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울렸다.
한데…… 어느새 황제의 등 뒤로 한 사람이 내려섰다. 그리고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성난 매처럼 사납게 달려드는 검은 물체를 정확하게 격타했다.
까아앙!
검에 퉁겨 난 물체가 멀리 날아가 떨어졌다.
자루부터 날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비수다. 언뜻 봐도 독에 물든 것 같다.
쒜에엑! 쒜엑! 쒜에엑!
이번에는 이쪽에서 움직였다.
송림 안으로 금군 네 명이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어느새 비수가 날아온 지점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다시 일어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놓쳤다!
네 명의 행동만 봐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다. 분명히 암습이 있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멍청한 놈들!”
근위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공격해 들어갔던 네 명은 즉시 물러나서 황제 곁으로 다가왔다.
“다녀오겠습니다.”
근위대장이 차갑게 말했다.
“몇이나 되지?”
“넷입니다. 하지만 하나밖에 잡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나가 죽어도 물러서지는 않겠지?”
“그럴 것 같습니다.”
“오늘 산책은 틀렸군. 그래도 차는 마시고 가야지? 기껏 도라지를 끓여왔는데.”
“다녀오겠습니다.”
저벅! 저벅!
근위대장이 검을 축 늘어트린 채 숲으로 걸어갔다. 방금 금군 네 명이 물러선 바로 그곳이다.
“네놈들이 나를 너무 가볍게 봤구나. 장난질을 치더라도 누구 앞인지는 알고 해야지. 적은 무시하고 잔재주에만 매달리면 목숨 잃기 딱 좋아.”
슈웃!
근위대장이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슛슛슛! 쒜에에엑!
근위대장이 검을 쳐 낸 것과 사방에서 돌풍이 일어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까앙! 깡깡!
근위대장은 기습을 예상한 듯 거침없이 검을 휘둘러 비표를 퉁겨냈다. 그러면서도 애초에 목표로 찍어놓은 나무를 향해 신형을 쏘아냈다. 검도 휘둘렀다.
퍼어억!
길게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장검이 나무 기둥을 싹둑 잘랐다.
푸아앗!
핏물이 확! 솟구쳤다.
나무에 달라붙어 있던 동영 인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뚝 떨어졌다.
즉사다.
유음류의 오대 은신술 오형술(五形術) 중 하나인 목형술(木形術)이 깨졌다.
동영 인자가 나무 기둥에 은신한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무인이 알고 있다. 아걸이 탕산에서 이들을 베어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숨는지 안다. 동영 인자를 직접 상대해야 하는 금군이나 취화원이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근위대장이 동영 인자를 즉시 찾아낸 것도 이미 목형술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우우웃!
근위대장은 나무를 자름과 동시에 다시 신형을 날렸다. 곧바로 다른 나무를 잘라냈다.
쒜에엑! 퍼억!
또 다른 나무가 싹둑 잘려나갔다.
하지만 피는 솟구치지 않았다. 사람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무껍질만 요란하게 퉁겨나갔다.
동영 인자는 벌써 사라졌다.
목형술이 깨지면 즉시 지형술(地形術)로 바꾼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땅으로 스며들었다.
츠으으으읏!
근위대장은 진기를 끌어올려 땅을 살폈다.
동영 인자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이들은 공격만 하지 않으면 완전히 잠적할 수 있다. 숨조차 쉬지 않고 숨는 듯하다. 아예 목석으로 변해버린다.
유음류는 그런 상태에서 몇 날 며칠을 버틴다.
스읏!
근위대장은 검을 거뒀다.
목형술을 파악하고 있지만, 지형술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황제 곁으로 돌아와 굳건하게 버티고 섰다. 사방을 쳐다보지만 긴장하지는 않았다. 황제에게 지금 바로 돌아가야 한다는 직언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숨을 가라앉힌 채 조용히 서 있기만 한다.
“차가 딱 드시기 좋게 덥혀졌습니다.”
환관이 도라지 차를 가져왔다.
“다음에는 녹차를 준비해. 송림에서는 녹차를 마셔야 제격이야. 다른 차는 격이 안 맞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훌쩍!
황제가 차를 마셨다.
암습이 있었고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숲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고요함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