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八章 일점집중(一點集中) (2)
월영은 동영 인자가 습격해 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구곡주 모두 그만한 자신감을 가질 것이다.
구곡주는 사생락을 전임 취화원주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몽설이 이끌어 주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아마 암영검을 습득하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구곡주는 뛰어난 기재가 아니다. 옛날 취화원 멸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살수일 뿐, 무공이 뛰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굳이 말하자면 취화원 살수 중에서는 평범한 정도다.
몽설이 아주 특이한 수련으로 깊이 잠들어 있던 감각을 끌어냈다.
몽설이 혈검을 쓰면 사생락이 자극을 받는다. 혈검에 대항해서 극한까지 끌어 올려진다. 수련을 거듭할수록 피부에 돋아난 솜털까지 감지되었다.
이런 감각들은 암영검을 단숨에 절정으로 이끌었다.
암영검이 절정에 이르자 사생락도 한눈에 보였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사라지고 공격할 수 있는지…… 숨을 쉴 때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동영 인자들이 날고뛴다고 해도 사생락을 견디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방에서 밀려오는 흑기(黑氣)를 보니 숨이 턱 막힌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단지 살기만 드러냈을 뿐인데도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흑기…… 인자씩이나 되는 자들이 기운을 흘릴 리는 없고…… 흑기가 감지된다는 것은…… 검진이네. 어떤 진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진법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야.’
월영은 주위를 쓱 돌아봤다.
인자는 땅에 있지 않다. 지형술을 썼다면 기운까지 감춰졌을 것이다. 땅에 숨은 사람들이 검진을 펼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진법은 생명은 유동성(流動性)인데, 지형술은 절대 침묵, 부동(不動)을 요구한다.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인형술!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 저들…… 저 사람 중에 있어!’
월영은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민초들을 쳐다봤다.
정말 저들 속에 동영 인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평범한 자들이다. 하지만 있다. 확신한다. 틀림없이 오가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포위됐어.”
월영이 말했다.
검진은 포위를 우선으로 한다. 포위한 후 상호 유기적으로 검초를 떨쳐내는 것이 기본 골자다. 검진의 형태는 각기 달라도 골자는 변하지 않는다.
착착! 착!
자망과 자괴가 검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누군지 짐작되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자망이 빠르게 주위를 훑으며 말했다.
없다. 두 눈 부릅뜨고 살펴봐도 모두 평범한 민초들이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사람뿐이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여요.”
월영이 황녕의 어깨를 꽉 잡은 채 말했다.
“알았네.”
대답은 필요 없다.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스으읏!
월영이 움직였다.
황녕도 월영을 쫓아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순간!
쒜엑! 쒜에엑! 쒜에엑!
사방에서 파공음이 일어났다.
어느 한 방향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방팔방에서 벼락 치듯이 파공음이 터졌다.
스으읏! 스읏! 스스스슷!
월영과 자망, 자괴는 빠르게 회전했다. 서로 자리를 바꾸기 위해서 급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꼬리잡기 놀이를 한다고 할까? 다른 점이 있다면 검을 휘두르는 것.
깡! 까까깡! 까아앙!
눈 깜짝할 순간에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수십 차례나 울렸다. 부딪치고, 부딪치고, 또 부딪친다. 황녕을 노리고 날아온 암기들이 퉁겨나간다.
“으악!”
“크으윽!”
장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세 여인이 튕겨낸 암기가 그들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부지불식간 피를 펑펑 쏟으며 쓰러졌다.
“이런!”
월영이 탄식했다.
사람들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조심은 했다. 하지만 무차별적인 습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역시 내 실수인가? 백인도축이 일어나고 있다는데…… 하루 이틀쯤 순시를 돌지 않았어도 되었거늘.’
황녕이 탄식했다.
취화원 여살수 세 명은 말을 섞을 새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너무 사정이 급박해서 생각을 나눌 겨를도 없다. 무조건 눈앞으로 다가온 암기를 쳐내기에 급급하다.
자신들의 일신을 보호하려는 검초가 아니다. 오직 황녕을 보호하는 검초다, 황녕이 무사할 수 있다면 자신들은 물론이고 장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어도 좋다는 식이다.
깡! 까까깡! 까아앙!
비검(飛劒), 비전(飛箭), 비표(飛鏢), 자모환(子母丸)…… 황녕이 알고 있는 암기는 모두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황녕의 몸 앞에서 퉁겨나갔다.
어느 한순간, 월영이 황녕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쒜엑! 쒜에엑!
월영은 자망과 자괴를 팽개쳐놓고 신형을 앞으로 쏘아냈다.
꽈앙! 꽝! 꽈아아아앙!
방금 몸을 빼낸 자리에서 거센 폭음이 터졌다. 벽력탄(霹靂彈)이 땅을 뒤집고 돌을 부쉈다. 월영이 꽤 멀리까지 피했는데도 부서진 돌 부스러기가 날아왔다.
“으음!”
황녕은 신음을 흘렸다.
단지 돌가루에 맞았을 뿐인데, 낙석에 맞은 것처럼 아프다. 따갑기 이를 데 없다. 잠시만 머뭇거렸어도 이미 한 줌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졌을 것이다.
스으읏! 스읏! 까까깡! 까아앙!
어느새 몸을 빼내 월영 곁으로 다가온 자망과 자괴가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타앗!
월영이 다시 땅을 박찼다. 자망과 자괴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거의 동시에 튀어 올랐다.
“보여요?”
“안 보여.”
월영이 차분하게 말했다.
“마음 가라앉히고 천천히, 천천히 싸워, 조급하면 안 돼.”
모순된 말이다. 상황은 월영의 말처럼 천천히 싸울 수 있게끔 여유를 주지 않는다. 정작 말하고 있는 월영 자신도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다.
월영의 말뜻은 마음을 냉철하게 가라앉히라는 의미다.
까까깡! 까아앙!
암기들이 튕겨 나갔다.
월영과 여살수 두 명은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정확하게 암기들을 쳐내고 있다. 지금보다 더한 상황이라고 해도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취화원은 어느덧 중원 제일 살수 문파로 성장했다.
중원에는 살수 문파라는 이름을 내걸고 청부업을 하는 문파가 더러 있다. 하지만 어떤 문파도 취화원처럼 조직적인 문파는 없다. 살수도 많고, 펼치는 무공도 강하다.
취화원은 어떤 정통 문파와도 검을 섞을 수 있다.
강호에는 적랑대는 또 다른 살수 문파가 있지만, 황녕은 적랑대를 알지 못했다.
황녕은 취화원이 두려워졌다.
‘이 자들이 적이라면 대단히 위험하다. 지금은 옆에서 싸우고 있으니 든든하지만, 이들이 검을 거꾸로 잡으면…… 그 누구보다도 위협적인 적이 될 거야.’
실제로 그런 적이 있다. 공부 허도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아군이었을 때는 걱정거리가 싹 사라지는 것 같더니, 적으로 변하니 대책이 막막하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수는 없다. 이 자들 정리해야 해. 이번 위험만 막으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어쩔 수 없다. 황상 곁에 이들을 두면 안 돼.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사람 마음이야.’
황녕은 미간을 찡그렸다.
취화원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인간이 할 짓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간악한 권모술수라고나 할까? 이토록 처절하게 싸우는 여인들을 제거할 생각이라니.
하지만 이것이 냉철한 판단이다. 황제의 옥좌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들을 내쳐야 한다.
황제 곁에는 통제할 수 있는 자들만 있어야 한다.
취화원 살수들은 통제할 수 없다. 호황위 군주라는 든든한 배경까지 얻었으니 감히 손댈 사람이 없다.
‘이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대장군과 근위대장뿐이야. 그들을 움직여야 해.’
대장군과 근위대장은 몽설 편이다. 몽설을 황제에게 안내한 사람이 대장군이다. 그런 대장군이 몽설을 내친다는 데 동의할까? 할 것이다. 황제를 위하는 길이라면.
충신의 생각은 같다. 언제나 곁눈질하지 않고 한쪽만 쳐다본다.
깡! 까까깡! 까아앙!
월영은 계속 검을 휘둘렀다.
황녕이 무슨 생각을 하든 알 필요가 없다. 알 수도 없고.
그녀는 자신이 할 일만 한다. 싸움이 목적이 아니다. 황녕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다.
“크윽!”
자괴가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허벅지와 옆구리에는 비수 두 자루가 자루까지 깊숙이 꽂혀 있었다.
“이거 독이 발라져 있어요. 맹렬하네요. 벌써 왼쪽 반신이 마비되어 와요.”
자괴가 급히 점혈하면서 말했다.
“쉬어라.”
“네.”
자괴는 대답과 동시에 풀썩 쓰러졌다.
또 암기에 맞았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나뒹굴 듯 나가떨어지는 모습이라니.
자괴는 독비에 맞아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왼쪽 반신이 마비된다는 말도 거짓이 아니다. 아걸조차도 독비에 맞은 후 휘청거렸다. 하물며 아걸보다 내공이 훨씬 낮은 자괴가 버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움직일 수 없다면 무너져야 한다.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면 집중 타격 목표가 된다. 연이어 공격을 당했을 때처럼 급하게 무너지면 타격 목표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몽설은 기사회생(起死回生)할 수 있는 진기 요상법을 강구해냈다.
취화원은 살수 문파인 이상 항시 반격에 노출된다. 언제 어디서 어떤 공격을 받아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무너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럴 경우, 정말 어쩔 수 없을 때…… 혹여 덤으로 얻는 목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덤으로 얻는 목숨이다. 십중팔구는 죽을 것이다. 혹여 천운이 깃들어서 목숨줄 하나를 얻으면 천만다행이다. 죽을 수 밖에 없을 때…… 딱 한 번 운에 기대본다.
불사요기(不死耀氣)!
몽설은 죽음 직전에 일으키는 진기 요상법에 불사요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불사요기는 혈검경에 기반을 둔 요상법이다.
몽설은 상궁(上宮), 니환궁에 들어가면 외부로 향하는 신경이 차단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단전 진기를 니환궁에 몰아넣는다. 의식을 니환궁에 집중하고 외부로 향하는 신경을 끊는다. 그러면 몸을 움직이는 모든 신경이 일시에 끊긴다.
당연히 죽은 사람처럼 쓰러진다.
그 순간 니환궁에 깃든 진기가 상처로 밀집된다. 다른 곳은 텅텅 비워놓고 오직 상처에만 진기가 몰린다. 병기에 묻어온 병균을 죽이고, 독이 있으면 독기도 밀어낸다. 독이 워낙 강력해서 밀어낼 수 없으면 상처 부위를 봉쇄한다.
도망칠 여력이 단 일 푼이라도 절대로 펼치지 말아야 할 최후의 구명절초다.
불사요기를 취하면 상처 회복이 무척 빨라진다. 신의(神醫)가 봐도 감탄을 터트릴 정도로 회복력이 빠르다. 하지만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암기가 한 자루라도 날아오면 저항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
자괴는 그런 상태다.
쿵!
자괴는 암기에 맞아서 절명하는 사람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무너지는 몸이 거칠게 떨어지면서 둔탁한 울림까지 일으켰다. 누가 봐도 죽는 모습이다.
스읏! 스스스슷!
월영은 무너진 자괴를 버려두고 신형을 쏘아냈다. 최대한 빠르게 습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한데,
쒜엑! 쒜에엑! 쒜에엑!
사방팔방에서 다시 암기가 회오리쳤다.
지금까지 날아온 암기를 헤아리면 무려 오백 개가 넘는다. 몸에 지니고 다니기 벅찰 정도로 많은 암기가 터져 나왔다. 암기를 담아놓는 병함(兵函)을 짊어지고 온 듯하다.
“여덟!”
월영이 짧게 말했다.
“여덟요?”
자망이 놀라서 되물었다.
숨어있는 자는 모두 여덟 명이다.
일흔 여덟 명 중 현재 남은 자가 쉰세 명이다. 그중 여덟 명이 모였다. 아걸을 죽이기 위해 탕산에 갈 적에도 열두 명만 갔는데…… 이곳에 여덟 명이나 와있다.
절대 충신 백 명 중 황녕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인물인가? 그래서 황녕에게만은 아걸에 준해서 여덟 명이나 달라붙은 것인가?
황녕이 고관대작인 것은 맞지만 인자 여덟 명이 달라붙을 정도로 위험하거나 거북스러운 인물은 아니다. 그런데도 여덟 명이나 달라붙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이들이 밀집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살도축은 백 명을 죽인다는 암살 지령이다. 원래는 백살도축을 하루나 이틀 사이에 해결하려고 했지만, 취화원이 방해한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한 명씩 완벽하게 정리한 후에 넘어가려고 한다.
매일 다섯 명씩만 죽여도 이십 일이면 백살도축이 완성된다. 넓게 퍼진 동영 인자를 집중시킨다. 반면에 취화원은 누가 당할지 몰라서 힘을 넓게 분산해 놔야 한다.
취화원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러면 관원 상당수가 죽은 후에는 취화원도 힘을 밀집시킬 수 있을까? 아니다. 관원과 함께 취화원 살수도 죽어 나간다. 힘이 넓게 분산된 상태에서 서서히 소멸해 가는 것이다.
오늘 황녕이 죽으면 자망, 자괴도 죽고 월영도 죽는다.
동영 인자는 온전히 살아남는다. 취화원이 반격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무너진다.
공격자가 힘을 밀집시킬 때, 이런 일이 벌어진다.
동영 인자들은 가장 유효적절한 공격 방식을 택했다.
‘빠져나가기 힘들겠어.’
월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