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八章 일점집중(一點集中) (5)
혈랑(血狼)은 피에 굶주린 늑대다.
전투가 벌어진 곳이면 언제나 그가 있다. 피 냄새를 귀신처럼 맡고 나타난다.
적의 피로 목욕을 하고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을 잡은 채 히죽 웃으면서 나타난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른다. 눈에 보이는 모든 자를 죽인다.
혈랑이 제일 먼저 노리는 자는 적장이다.
수많은 부하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단숨에 뚫고 들어와서 목을 쳐낸다.
혈랑은 암살이나 기습을 취하지 않는다. 언제나 직진(直進)이다. 일직선으로 쭉 뚫고 들어온다. 철갑기마병이나 궁수들, 창수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또한, 혈랑은 어떤 싸움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일대일은 물론이고 일 대 백, 일 대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싸움도 히죽 웃으면서 달려간다.
수비가 없는 것도 혈랑 방식 중 하나다.
‘모두 다 지금은 승산이 없다. 문을 굳건히 잠그고 지원병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할 때도 혈랑은 거침없이 성문을 열고 적을 향해 걸어간다.
혈랑이 싸우는 모습은 성난 맹수를 보는 듯하다. 그래서인가? 혈랑이 수련한 무공이 무림에서 절전 된 지 오래된 야수검(野獸劍)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초기 무림은 동물의 형상을 보고 무공을 창안했다.
쥐나 뱀을 낚아채는 매의 날카로운 발톱을 보고 창안한 무공이 응조공(鷹爪功), 응조권(鷹爪拳), 응조수(鷹爪手)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모두 매의 발톱을 표방한다.
곰을 보고 창안한 무공도 있다.
곰이 앞발로 후려치는 일격은 매우 강하다. 묵중한 몸을 지닌 곰이 전력으로 후려치면 머리뼈도 단숨에 부서진다. 한데 곰의 일격은 단지 힘만 강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곰의 공격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강하고 빠른 힘! 웅권(熊拳)이다.
뱀의 움직임을 본뜬 사권(蛇拳), 원숭이의 움직임에서 창안한 후권(猴拳)도 있다. 뱀과 학은 맞수라는 생각이 강하다. 뱀이 물려고 날아들고, 학이 쪼아대는 모습은 서로 비등하게 싸우는 것으로 보인다. 사학비권(蛇鶴秘拳)이다.
초기 무공 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무공으로 당랑권(螗螂拳)도 빼놓을 수 없다.
사마귀는 뱀도 잡아먹을 수 있다. 모든 사마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그런 일도 벌어진다. 앞다리 두 개로 움직임을 봉쇄하고 이빨로 가운데를 물어뜯는다.
초기 무공은 인간이 펼칠 수 있는 움직임보다 강하고 빨라서 유효하다고 생각되는 움직임에서 창안되었다. 물론 인간의 움직임에 맞게 변형된다.
야수검이 그중 하나다.
야수검은 미친 맹수가 싸우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맹수 중에는 늑대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곰도 있는데 모든 맹수가 다 포함된다. 맹수들의 강함을 두루 섞어 넣었다.
그러자면 뼈를 깎고 살이 뜯겨 나가는 고련을 견뎌내야 한다. 인간의 몸뚱이를 짐승처럼 단련시키려면 얼마나 고된 수련을 쌓아야 하겠나?
야수검을 수련하면 모든 맹수의 강함을 지닐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련 과정이 너무 험난해서 실제로 야수검을 수련한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련이 불가능한 그저 이론상의 무학일 뿐이다.
야수검은 어떤 형태로 드러날까? 모든 맹수의 강함만 취한다면…… 미친 맹수가 되지 않을까?
혈랑의 모습이 꼭 미친 맹수를 연상시킨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한 맹수를 풀어놓은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수련한 무공이 야수검이 아닐까 추측한 것이다.
한데, 천하무적일 것 같던 혈랑이 어느 날 갑자기 전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혈랑이 누군가의 손에 죽었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강했다. 죽어서 사라졌다기보다는 전장의 회의를 느끼고 검을 거뒀다는 편이 오히려 설득력 있다. 그런 말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스읏!
근위대장은 거침없이 암기 사이로 파고들었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근위대장을 향해서 암기가 날아왔다. 아니, 근위대장이 암기를 가로막았다.
스읏! 까앙!
근위대장은 큰 힘 들이지 않고 가볍게 검을 휘둘러서 암기들을 떨궈냈다.
몽설이 동영 인자를 가볍게 죽인 것처럼 근위대장도 암기 공격을 너무도 손쉽게 떨쳐냈다.
‘엇!’
몽설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근위대장이 검으로 암기를 쳐낸 것은 맞다. 하지만 무작정 암기를 떨궈낸 것이 아니다. 치밀하게 계산된 공격을 가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냈다.
근위대장이 쳐낸 암기는 퉁겨지면서 다른 암기를 격타한다. 쳐낸 암기는 하나인데, 세 개 이상의 암기가 일시에 떨궈진다. 암기 열 개가 날아온다면 근위대장은 검을 세 번만 쳐내면 된다. 그러면 암기 열 개가 우수수 떨어진다.
근위대장의 움직임은 매우 간소했다. 그런데도 허공을 가득 메웠던 암기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기가 질릴 정도로 깨끗한 한 수다.
저벅! 저벅!
근위대장이 싸움과는 상관없는 사람처럼 느리게 걸었다. 마치 길을 지나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죽어있는 두 여인에게도, 쓰러지기 직전인 청란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근위대장은 길을 걷다가 멈춰 섰다.
스읏!
그는 고개를 돌려서 담벼락에 바싹 붙어서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싸움에 휘말릴까 봐 겁이 난다는 듯 등을 벽에 찰싹 붙이고 덜덜 떨었다.
“너군.”
“네? 뭐가요?”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 놀란 듯이 되물었다.
“중원 말이 어색해. 이 정도만 해도 상당히 잘하는 편이지만, 억양이 달라. 네가 유음류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근위대장은 검을 쳐냈다.
쒜에엑!
검이 사내의 배를 뚫었다. 명치를 파고들어서 등 뒤로 삐죽 튀어나왔다.
“크아악!”
사내는 처절하게 신음을 흘리면서 무너졌다.
스읏!
근위대장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검을 뽑아냈다.
정말 맞나? 이 사람이 동영 인자가 맞나? 의심스러운 순간이다. 멀쩡한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다. 근위대장은 사내의 말투가 어색하다고 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주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편한 말투였다.
괜히 꼬투리를 잡아서 죽인 것처럼 보인다.
‘정말 인자가 맞아?’
몽설도 의문을 가졌다.
몽설은 철기를 읽어내지 못했다.
근위대장이 신형을 날렸을 때는 이미 암기가 허공으로 쏘아진 후였다. 암기와 인자의 연결이 끊어진 후다. 그러니 암기가 어디서 일어났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근위대장이 놀라운 무공으로 암기를 쳐낸 후, 동영 인자는 일시 공세를 멈췄다.
방해꾼이 나타났다. 누구인가? 암기가 모두 떨어졌다. 방해꾼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가? 변수가 발생했나? 공격을 계속해야 할까, 물러서야 하나.
동영 인자도 잠시 상황판단을 해야 한다.
당연히 철기를 읽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근위대장이 사내 한 명을 유음류라고 하면서 죽인 것이다.
근위대장은 사내를 어떻게 찾아냈나?
저벅! 저벅!
근이 대장이 주위를 돌아보며 걸었다.
“너.”
“네? 저, 저요?”
근위대장의 지목을 받은 사내가 깜짝 놀라서 파르르 떨었다.
“아니야. 넌 아니야.”
“네? 네네.”
사내는 대답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떨기만 했다.
근위대장과 말을 섞으면 죽는다. 방금 그런 일이 있었다. 자세한 답변도 듣지 않고 무조건 검을 찔렀다. ‘아니다’라는 말은 사내에게는 생명의 신호다.
“넌 아니고…….”
“다, 당연합니다. 저, 저, 전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사내가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럼 넌가?”
근위대장이 검을 들어서 옆에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네? 저요? 아, 아닙니다. 저도…… 커어억!”
사내도 황급히 부인했지만, 그의 말은 중간에서 끊어졌다.
근위대장의 검이 이미 사내의 목을 그어 버렸다. 말을 하던 사내가 두 손으로 목을 움켜잡고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풀썩 쓰러지며 나뒹굴었다.
저항을 불허하는 쾌검이다.
기분 내키면 죽이고, 내키지 않으면 죽이지 않는다. 특정한 이유도 없이 ‘네가 암기를 던졌어’라는 말을 하고는 죽인다. 변명도 듣지 않는다.
저벅! 저벅!
근위대장이 다시 걸었다. 순간,
쒜엑! 쒜에엑! 쒜에엑!
근위대장을 향해서 암기 수십 개가 쏟아졌다.
파앗! 팟팟팟!
전장을 예의 주시하던 몽설은 지극히 짧은 순간에 불꽃 네 개를 찾아냈다.
근위대장이 두 명을 죽였고 네 명이 암기를 날렸다. 한 사람당 열 개 이상의 암기를 쏘아냈다.
현재 드러난 자는 모두 여섯 명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건 내가…….’
몽설이 새로 나타난 불꽃을 향해서 신형을 날리려고 할 때, 근위대장이 한발 앞서서 비쾌하게1) 움직였다.
쒜에에엑! 까아앙! 깡!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암기들이 튕겨 나갔다. 검이 암기를 쳐내면, 퉁겨진 암기가 또 다른 암기를 쳐낸다. 그리고 다시 다른 암기에 힘이 전달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매우 정밀한 검초다. 그러면서도 본능에 의존한다. 눈으로 보고나 감각으로 찾아낸 것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른다.
‘호, 혹시 야수검?’
몽설은 이미 무림인에게 잊힌 검법을 떠올렸다.
근위대장의 검초는 매우 놀랍고 정확하다. 하지만 근위대장을 보고 있자면 검초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성난 맹수가 날뛰는 모습만 보인다.
근위대장이 맹수로 보인다.
살인을 즐기는 살인광인가? 살인광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차분하다. 정확하다. 검에 여유가 있다. 다만 사람을 죽이는 순간에는…… 호랑이가 앞발로 육신을 찢어내는 느낌이다. 그 한순간 때문에 근위대장이 야수로 보인다.
야수검의 실체는 정교함이다.
“아!”
몽설은 근위대장이 어떻게 해서 동영 인자를 찾아내고 있는지 이유를 알았다.
본능, 본능으로 찾아낸다.
근위대장은 전투 경험이 워낙 풍부해서 얼굴만 보고도 피를 원하는 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해낸다. 일반 민초와 칼로 밥을 먹고 사는 자를 찾아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든다.
보통 사람은 이런 느낌이 들더라도 자신의 감각을 믿지 못해서 검을 쓰지 못한다.
‘저놈이 동영 인자일 것 같은데. 만약 아니면?’
근위대장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 같다. 거침없이 검을 쓴다. 자신의 느낌에 십 할 자신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판단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근위대장이 정확하게 몽설이 파악한 불꽃을 꺼트렸다.
“아아악!”
동영 인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뭉설에게 했듯이 ‘당신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라는 우려감을 안기면서 죽어간다.
이들의 비명은 억지로 쥐어 짜낸 비명이다.
몽설도 그 정도는 판단한다.
‘정확하게 골라내고 있어. 내가 잡은 불꽃을.’
“크윽!”
근위대장이 마지막 한 명을 죽였다.
그런 후, 근위대장은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제주 왕중천에게 다가섰다.
“괜찮습니까?”
왕중천에게 물은 말이다.
정작 몸을 상한 사람은 청란이다. 청란의 몸에 암기가 상당히 많이 꽂혀 있다. 반면에 왕중천은 깔끔하다. 그런데도 근위대장의 물음은 왕중천에게 향했다.
“장군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아니. 난 잠시 거들었을 뿐이고. 제주 목숨을 구한 사람은 취화원이죠. 여기 죽은 사람들. 후후! 청란을 보세요.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도 제주 앞을 막아서고 있잖습니까. 정작 고마움은 이 사람들한테 표하셔야죠.”
“이를 말씀. 고맙네.”
왕중천이 청란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백살도축을 맡지. 취화원도 잠시 빌려주고.”
“네.”
“황상 곁에 있는 금군을 모두 쓸 거야. 딱 열 명만 남겨두고.”
“내일은 상황이 또 바뀌겠죠?”
“그렇겠지. 이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대감, 갑시다. 집까지 모셔다드릴 테니까.”
근위대장이 왕중천을 보며 말했다.
동영 인자가 지금의 공격 형태를 바꾸지 않았다면 내일 하루에 모두 결착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다섯 군데든 여섯 군데든 모두 막아서면 되니까. 하지만 분명히 형태를 변형시킨다. 오늘 교훈을 얻었으니 공격 방법을 바꿀 것이다.
“혹시 전쟁터에서 불린 이름이 있어요?”
몽설이 청란의 상처를 살피며 물었다.
“혈랑.”
“그렇군요. 야수검.”
청란이 고개를 푹 떨궜다. 일시 혼절한 것처럼 보인다. 아니다. 그녀는 불사요기를 펼치고 있다.
몽설이 청란의 몸에 박힌 비수, 비표, 비도를 뽑아냈다.
모두 일곱 자루.
대단히 심한 중상이다. 인자들의 공격이 얼마나 매서웠는지 알 수 있다.
근위대장이 왕중천을 데리고 멀어져갔다.
몽설은 편한 표정으로 청란의 상처를 살폈다.
혈랑이라면 이번 사태를 종식할 수 있다. 사실, 황제도 충분히 보호한다. 그런데도 일부러 몽설을 찾아왔다. 만에 하나 있을 것 같은 실수도 방비하기 위해서다.
야수검은 동영 인술을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황제까지 보호하는 것은 무리다. 싸우는 것이라면 사양하지 않지만 보호하는 것은 힘들다.
근위대장이 몽설을 찾아온 것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실수를 막기 위해서다.
타탁! 탁!
몽설은 청란의 요혈을 가볍게 타격했다.
불사요기가 타격 부위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단숨에 상처를 아물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