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章 점오칭호(玷汙稱號) (4)
아걸은 몽설을 깊이 안았다.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입술을 달싹거렸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저 껴안고 있을 뿐이다.
몽설도 몽설을 껴안은 채 침묵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몸과 손에서 이루어졌다.
몽설을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기도 하고, 풀기도 한다. 등을 쓰다듬고, 머리를 만진다.
“흑!”
갑자기 몽설이 울었다.
“미안.”
아걸은 할 말이 없었다. 무엇을 대단히 크게 잘못했다는 생각만 든다.
“아니, 괜찮아.”
몽설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울지 마. 바보같이 울긴.”
아걸이 몽설을 다독였다. 그리고 더 힘주어 껴안았다.
“힘들었지? 몸은 어때? 많이 다쳤다면서? 화상은? 독비 맞은 건 괜찮아? 왜 바보같이 당하고 다녀. 지금 아픈 데는 없어? 아직도 아프니까 여기서 쉬는 거지?”
몽설의 눈물이 입을 열게 했다. 마치 막혔던 둑이 터지듯 쉴새 없이 말이 쏟아졌다.
“그만. 인제 그만. 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아걸이 몽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걸도 물었다.
“힘들었지?”
“아니. 나도 전혀…… 힘들지 않았어.”
“난 힘들었는데.”
“조금 전에는 아니라고 했잖아.”
“널 보고 싶어서 힘들었어.”
“바람둥이처럼 말하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보고 싶었으니까. 하루에도 열 번씩 네 생각을 했으니까. 나 보고 싶지 않았어?”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어서…… 힘들었어.”
“힘들지 않았다며?”
“내 말 따라 하지 마. 그건 내 말이야.”
몽설이 툭 쏘아붙이면서 아걸을 껴안았다.
아걸도 몽설을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몽설의 입에 입을 맞췄다.
깊은 입맞춤…….
두 사람은 점점 서로를 깊이 몰입해 들어갔다.
원래 황제는 은거 무인들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들이 산 아래 민가에서 숙식하고 있다고 하니 직접 산에서 내려가서 그들을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산신각을 나서자마자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폐하!”
환관 도공과 주지 스님이 급히 황제를 부축했다.
“괜찮아. 현기증이 치밀어서…….”
황제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니다. 괜찮지 않다. 황제의 코에서 더운 김이 풍긴다. 낯빛은 회를 칠해놓은 듯 하얗다. 손발도 덜덜 떨린다. 무엇보다도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폐하!”
환관 도공이 급히 황제를 부추겼다.
“오한이…… 치미네. 지…… 겹군.”
황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쉬셔야겠습니다. 폐하.”
환관이 급히 황제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 요사채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갔다.
황제는 가끔 정신을 잃는다. 요즘은 한동안 뜸했지만, 예전에는 정말 심해다.
오음절맥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피가 잘 돌지 않고, 숨을 쉬지 못하게 기도도 막아버린다. 그래서 안색은 늘 백지장보다도 하얗다.
근위대장이 황제의 밀행을 도성 안으로 국한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외부로부터 암살당하는 것을 우려해서가 아니다. 황제의 건강이 도성 밖을 벗어날 정도로 좋지 않았다.
몽설은 오음절맥의 폐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취화원에는 오음절맥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아니, 오음절맥에 대해서 상세히 아는 문파나 무인이 거의 없다. 오음절맥이 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오음절맥에 걸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거의 모른다.
오음절맥은 여간해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소병이다.
그러니 인위적으로 혈맥을 타격해서 오음절맥으로 만들어 버렸다면 그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다.
만약, 몽설이 오음절맥에 대해서 상세히 알았다면 결코 황제의 밀행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도성에서부터 개향사까지 이틀간의 긴 여정은 오음절맥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경맥은 상당히 얇아져 버렸다.
“으…….”
황제가 신음을 흘렸다.
정신은 이미 잃었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신음만 흘리고 있다.
“빨리 이부자리 좀!”
주지 스님이 급하게 침상을 정리했다.
환관 도공은 황제를 침상 위에 눕히고 즉시 손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물 좀 준비해 줄 수 있습니까?”
주무르는 손을 늦추지 않고 말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주지 스님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대답하는 음성에 걱정이 한가득하다.
‘군주에게 말해야 하나?’
도공은 잠시 망설였다.
몽설이 호황위 군주이니 황제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 둘 의무가 있지 않을까?
‘아냐. 굳이 알릴 필요는 없어.’
몽설은 오음절맥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몽설이 와서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도공처럼 손발을 주무르는 일밖에 없다.
현재 황제는 오음절맥이 골수에까지 치밀어서 어떠한 영약도 듣지 않는다. 황궁 어의들이 고개를 내두르며 치료할 수 없다며 죄를 청해왔다.
오음절맥은 어떤 침술이나 영약으로도 고치지 못한다.
‘그래. 오랜만에 낭군을 만났으니. 폐하께서도 두 사람에게 시간을 주고 싶으실 거야.’
도공은 한시도 쉬지 않고 황제의 손발을 주물렀다.
황제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생명이 촌각에 이르면 미간 정중앙에 검은 반점이 생긴다. 그리고 반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신으로 번져간다.
마치 피부가 괴사할 때처럼 검은 반점이 듬성듬성 생긴다.
오음절맥이 그 정도까지 진행되면 밥을 먹다가 푹 쓰러져서 죽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원래 오음절맥이 그렇다.
지금 황제는 피부가 깨끗하다. 검은 반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황제는 잠시 혼절했을 뿐이다. 곧 깨어난다.
황제의 상황을 몽설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
주지 스님이 덥힌 물을 가져왔다.
“여기 따뜻한 물…….”
“숟가락으로 조금씩 음용시켜 주십시오. 머리를 들어서 무릎에다 올려놓으시고…… 음용하시다가 기도가 막히시면 곤란합니다. 폐하는 기도 막히는 것을 혼자 해결하지 못하세요.”
주지 스님은 도공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는 곧 무릎 위에 황제의 머리를 얹고 입안에 물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으음!”
황제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폐하! 속은 좀 괜찮으십니까?”
도공이 물었다.
오음절맥에서 헤매고 나면 속이 뒤집힌다. 이기지 못할 술을 마시고 잔뜩 구역질한 사람처럼 위장에서 신물이 계속 올라온다. 창자가 비비 틀린다.
“내가 또…….”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무리…… 후후!”
황제는 피식 웃었다.
“남들은 다 하는 일인데…… 이것부터 더한 일도 하는데…… 나는 걷는 것도 아니고, 수레를 타고 온 처지에 그마저도 힘들어서 나가떨어지네. 후후!”
황제가 웃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힘이 없다.
은거 무인들을 만나서 여타의 무인들처럼 호탕하게 술도 마시고 닭도 구워 먹으려고 했다. 서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눠보고 싶었다.
모두 한낮 꿈이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봤다.
“도공.”
“네.”
“태자가 잘할까?”
“황송하신 말씀입니다. 받들기 어렵습니다.”
환관이 급히 머리를 숙였다.
“잘해야 할 텐데…….”
“잘하실 겁니다. 워낙 영민하신 분이신지라.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몸이 약해지시니 마음도 약해지신 겁니다. 쉬고 나시면 괜찮으실 겁니다.”
“그 전에 내가 저지른 일은 내가 마무리해야겠지?”
“폐하!”
“나 아니면 마무리할 사람이 없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괜히 마음만 바쁘군. 후후! 공부가 보면 웃겠어.”
황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걸은 몽설의 손을 잡고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의 얘기를 빠짐없이 다 했다. 사실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느낀 감정까지도 말했다.
몽설이 겪은 일을 모두 들었다.
서로 입을 통해서 듣기 전에도 알고 있던 사실들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눈길을 놓은 적이 없다. 어떤 일이 있는지 즉시즉시 전해 받았다.
하지만 다시 말해준다. 듣는 사람도 처음 듣는 것처럼 눈빛을 반짝이며 들었다.
- 몽설이 동영 인자를 물리쳤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 그때 니환궁에서 쇠 맛을 읽어냈어. 시큼한 맛. 쇠에서 나는 맛과 냄새가 진하게 탐지되었거든. 암기는 암기대로 예기를 풍기고. 그러니 모를 수 없지. 저 사람이 동영 인자구나 하는 느낌이 단번에 들었어. 그러니 뭘 망설여. 망설일 이유가 없잖아. 즉시 달려들어서 베어냈어. 그런데 베고 난 후에도 후회가 들지 않는 거야. 그래서 내가 틀리지 않았구나 하고 확신했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을 알고 있을 때보다 훨씬 느낌이 강해진다.
두 사람은 어떠한 사실을 듣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겪은 일을 피부로 느꼈다. 서로의 일을 서로가 공유하는 것이다. 사실 뿐만이 아니라 감정까지도.
두 사람은 점심도 걸렀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이야기하다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보듬어 안았다. 입을 맞추고 서로를 느끼고…… 또다시 안부를 물었다. 다친 부위를 살폈다.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손에 입을 맞추고, 이 사람과 떨어져서 어떻게 지냈나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몰입했다.
“일홀도는 얻었어?”
“글쎄?”
“무슨 대답이 그래? 내가 보기에는 얻은 것 같은데? 풍도가 달라졌어. 기도가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황제께서 그러더라고. 처음 보는 절대 고수를 소개해주겠다고.”
“날?”
“응. 그리고 오빠를 보는 순간, 황제가 옳게 봤구나 하는 걸 느꼈어. 오빠는 전혀 다른 사람이야. 내가 알던 사람은 어디 갔을까? 그 오빠 찾아내.”
“하하하!”
“이번에 얻은 일홀도는 진짜?”
“글쎄…… 일홀도는 살아 있는 거니까. 얻었다고 할 수도 있고, 얻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고.”
“뭔가를 얻기는 얻었네?”
“아직 정리가 잘 안 돼.”
“그래서 여기 있는 거야?”
아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가지만. 허도기와 싸우면 이길 수는 있지?”
“모르겠는데?”
“이길 수 있다고 해줘. 오빠는 어떻게 자기 여자 안심시키는 법도 몰라?”
“이길 수 있어.”
“엎드려서 절 받네. 다음부터는 내가 옆구리 찌르기 전에 알아서 말해. 다음에도 이번처럼 말하면 혼내줄 거야.”
“그래.”
정말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무림 정세, 황궁 상황, 변경에서 일어나는 일부터 서로의 감정과 느낌, 안부를 두서없이 말했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감정을 다독여야 할지, 어떤 말을 하면…… 어떤 행동을 하면 속에 있는 마음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혼인해.”
“그래.”
“혼인한 후에도 지금처럼 떠돌아다닐 거야?”
“지금은 칼 생각이 안 나.”
“돌아다닐 거구나?”
“같이 다니자.”
“말로만이라도 내 곁에 있겠다고 말하면 안 돼? 좋은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잖아.”
“난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래도 네 곁에 있지 못할 때는, 네가 내 곁에 있어 줘. 그럼 우린 항상 같이 있잖아. 나 좀 도와줄래? 오래 걸리지는 않아.”
“피이! 평생 칼을 쫓을 거면서.”
몽설이 아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걸은 몽설을 꼭 껴안았다. 혈검경을 수련한 절대 무인, 살수 문파 취화원의 원주, 황제를 지키는 호황위의 군주가 비 맞은 참새처럼 가련해 보였다. 아니…… 미안했다.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늘 칼만 쫓아다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