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章 점오칭호(玷汙稱號) (5)
“새벽에 나왔는데 벌써 날이 저무네.”
황제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쉬시고 내일 만나시는 게…….”
“내일은 환궁해야지. 궁을 너무 오래 비워놔도 좋지 않아. 근위대장, 그 친구……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거야. 빨리 가서 안심시켜놔야 할 일을 하지.”
“네.”
환관이 황제를 살피며 걸었다.
본전에서 산신각까지는 겨우 백여 보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아마 백 보가 채 안 될 것이다.
황제의 몸이 매우 좋지 않지만, 이 정도 거리는 걸어갈 수 있다.
“먼저 가서…….”
“아니, 괜찮아. 두 사람…… 오랜만에 만났는데, 정겨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줘야지.”
“네.”
환관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산신각 주변에는 아침에는 보지 못했던 무인들이 오체투지를 한 채 엎드려 있다.
은거 무인 여섯 명이다.
그들은 산 아래 민가에 있다가 황제가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황제의 몸 상태도 좋지 않고……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주지 스님이 은거 무인들에게 연락한 것이다. 그러니 한달음에 달려오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하루 내내 개향사를 순찰했다.
“허리에 찬 게…… 돌멩이인가?”
황제가 엎드려 있는 무인에게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일홀문주 곁에 비석탄을 잘 쓰는 사람이 있다더니 자네군. 비석 장태전. 맞지?”
“네. 황공합니다.”
장태전이 더 깊이 머리를 숙였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문 열어도 되나?”
황제도 이번에는 덜컥 문을 열지 않았다.
“아! 네! 폐하!”
몽설이 급히 문을 열고 내려섰다.
그러자 황제가 놀란 표정으로 몽설을 쳐다봤다. 뚫어지게…… 얼굴에 뭐라도 묻은 것처럼.
“왜…… 쳐다보세요?”
몽설이 의아한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봤다.
“낭군과 함께 있어서인지 얼굴에 화색이 도네. 질부가 미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예쁜 모습은 보지 못했어. 역시 낭군 품이 최고지?”
“네에?”
몽설이 화들짝 놀라서 얼굴을 붉혔다.
“하하하! 농담. 농담.”
황제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황제의 웃음소리는 밝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오음절맥에 나가떨어졌다가 일어나서인지 음성이 기름지지 못하고 쩍쩍 갈라져 나왔다.
‘쥐어 짜낸 웃음.’
아걸도 몽설도 황제의 웃음 속에 들어 있는 무기력함을 읽었다.
황제의 웃음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지 않다. 바싹 메말라 있다. 생명이 소진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몽설이 환관 도공에게 물었다.
황제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아침만 해도 이렇게까지 쇠잔하지는 않았다. 한낮이 지나는 동안에 황제의 수명이 오륙십 년은 확 줄어든 듯하다.
환관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황제를 보고는 금방 입을 다물어 버렸다.
“후후! 아무 일 없어. 절에 와서 푹 쉬었지. 너무 쉬니까 오히려 안 좋네. 하하! 일홀문주.”
황제가 아걸을 쳐다봤다.
“네, 폐하.”
몽설 곁에 서 있던 아걸이 대답했다.
“우리…… 초면이죠?”
“네.”
“우리가 이종이라는 것은 알죠? 이미 군주에게 들었을 테니까.”
“폐하, 말씀을 낮추십시오. 감당하기 힘듭니다.”
아걸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런 법은 없죠. 하하하! 왕이 왕을 대할 때는 존대를 하는 법. 나는 이 나라의 왕이며 일홀문주는 중원 무림의 왕이잖아요. 지금 나는 왕이 왕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폐하, 어미를 어렸을 때 잃어서 얼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폐하와 제가 이종이라고 하시면 이중으로 대해주십시오. 무림의 왕이라는 말씀은 받들 수 없습니다.”
아걸이 차분히 말했다.
“무림의 왕이 아니라는 말씀?”
“폐하.”
“도공, 당금 무림의 왕은 누구지?”
“일홀문주입니다.”
환관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질부, 당금 무림의 왕은 누구인가?”
황제는 몽설에게 물었다.
몽설은 대답하지 못했다. 황제의 물음도 알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답변도 있다. 하지만 대답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라면 서슴없이 말하겠지만, 아걸 이름을 어찌 말하나.
“비석 장태전. 거기 있느냐?”
황제가 조용히 말했다.
“네. 현 무림의 왕은 일홀문주입니다.”
비석 장태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이래도 무림의 왕이 아니라고 할 겁니까?”
황제가 아걸을 보며 말했다.
“폐하. 전 폐하의 백성입니다. 제가 무림의 왕이라는 점도 인정할 수 없지만, 설혹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말씀을 놓아주십시오. 받잡기 어렵습니다.”
아걸은 진땀을 흘렸다.
아걸뿐만이 아니다. 곁에 있는 몽설도, 환관도, 주지 스님이나 은거 무인들까지도 황제의 존대에 당황했다. 간혹 고승에게 예의를 갖춰서 존대하는 예도 있지만, ‘무림의 왕’에게 존대를 하는 예는 없었다.
황제가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원래 군주는 촌수로 따지면 질부가 아닙니다. 외사촌의 부인을 좌 며느리라고 부르면 망종이 든 집안인 게지요. 이 세상 어느 법도에도 그런 법은 없어요.”
황제에게 아걸은 이모의 아들이다. 그러니 이종지간이 맞다. 또 이종의 부인은 제수나 형수가 된다. 질부는 현정부인의 형제가 아걸을 부르는 명칭이다.
확실히 이런 호칭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군주는 제수가 될 겁니다. 그런데 일부러 질부라고 불렀어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일홀문주라면 알아줄 법도 하고.”
황제가 극존칭을 사용하며 말했다.
아걸이 몽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알고 있었어? 질부라는 말에 담긴 의미?”
몽설은 즉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뇨. 전혀.”
사실, 몽설도 그 점이 이상하기는 했다. 이모의 며느리를 질부라고 불러?
그 당시, 황제는 분명히 말했다. 자신과 아걸은 이종이다. 그러나 당신은 내 질부가 된다.
황제가 그 말을 할 때 옆에 환관 도공이 있었다. 대장군도 있었다.
황제만 있었다면 황제가 촌수를 착각해서 말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환관과 대장군까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똑똑히 들었다. 그러면서도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다.
그래서 몽설도 질부라는 호칭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황제는 제수도 질부로 만들 수 있구나. 황제의 권력은 낮도 밤이라고 하면 밤이 되고, 태양도 달이라고 하면 달이 되는구나. 황제의 말이 곧 법이구나.
그렇게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아걸은 질부라는 호칭 속에 담긴 뜻을 알고 있는 듯하지 않나.
황제가 아걸을 보며 물었다.
“내가 왜 군주를 질부라고 불렀는지 짐작되는 게 있나요?”
“공부 때문에 그러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걸이 조용히 말했다.
“더 말해보세요. 왜 공부 때문인지.”
“저를 이종이라고 말씀하시면 제 이름은 허흔이 됩니다. 아버님 성을 따라서 허흔이라고 부르셨을 겁니다. 저를 무부로 생각하셨다면 아걸이라고 부르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일홀문의 성씨 서리 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종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힙니다.”
“그리고요?”
“아침에 찾아오셨을 때, 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질부보다 더 가까운 호칭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하신 말씀. 친척이되 친척이어서는 안 되는 관계. 황궁에 더는 친척을 들일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걸이 차분히 말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부와 이모가 횡액을 당한 후, 이모부의 동생을 청했습니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리기에. 이모부의 동생, 허도기. 허도기로 받아들인 거죠. 그때 그를 성검문주로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이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황제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공부가 군대에 손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많은 관원이 여기에 매달릴지 저기에 매달릴지 갈팡질팡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 동영 인자가 도성 한가운데 나타나서 황제를 암살하려 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테지요.”
“…….”
“이 모든 사단이 성검문주를 허도기로 받아들인 데 이유가 있다고…… 자책합니다.”
“공부를 허도기가 아니라 성검문주로 받아들이셨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지 않나요?”
몽설이 물었다.
황제는 웃기만 했다.
“처분이…….”
옆에 서 있던 환관이 나직한 음성으로 재빨리 말했다.
“아!”
몽설이 신음을 흘렸다.
처분이 달라진다. 허도기는 친척이 아니면 갖지 못했을 권한을 가졌다. 그 권한을 마음껏 이용해서 세력을 넓혔다. 군대에 무공을 전수한다는 이유로 많은 장병을 휘하에 두었다.
이때도 황상은 허도기를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지 않았다. 허도기는 아직도 친척이다. 이모부의 동생이다. 그러니 황제가 직접 처리하지 않는 것이다.
황제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혈육도 죽인다. 부모나 자식, 형제들을 무참히 죽인다. 황가(皇家)처럼 골육상잔이 많이 일어나는 곳도 없을 것이다.
황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으려고 한다.
어미가 자식을 원망하면서 오음절맥을 시전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미의 저주를 받았다. 직접 피와 살을 물려준 분에게서 버림받고 던져졌다.
그 아픔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
허도기가 아직 건재한 것은 단순히 그가 강해서만은 아니다.
황제는 허도기와 대장군의 싸움을 지켜보는 중이다. 될 수 있는 한, 대장군이 허도기를 잡아주기만 기다린다. 자신이 직접 피조차 섞이지 않은 친척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몽설을 질부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잘못된 호칭!
친척이지만 친척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
몽설이 허도기처럼 잘못된 권한을 남용할까 봐 항상 경계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위력을 근본적으로 차단해서 더는 그 누구도 나라에 위해를 가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질부라는 말은 단순한 호칭에 불과하지만, 황제의 가슴에 심어진 불망언(不忘言)이다.
아걸이 차분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이제 연배로 따지시죠.”
“연배?”
“왕과 왕이 만났으나 연배로 따지면 제가 아래입니다. 말씀 놓으시지요.”
“그럼…… 그럴까? 일홀문주?”
황제는 그제야 말을 놨다.
지금 황제는 아걸을 무인으로 대하고 있지 않다. 이종으로 대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일홀문주 자격으로만 대하고 있다. 몽설을 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왜 이렇게 구분을 엄격하게…….’
몽설은 황제의 구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질부든 제수든 모두 마음의 문제다. 아걸이면 어떻고, 서리흔이면, 허흔이면 어떤가? 아걸은 변하지 않는다.
“문주, 좀 걸을까?”
“네.”
아걸이 대답했다.
“일홀문주는 나와 걷겠다는데, 군주 생각은 어때? 내가 문주와 좀 걸어도 될까?”
황제가 몽설에게 물었다.
“네?”
몽설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되물었다.
“오늘 군주가 영 이상해. 평소에는 영민하기 이를 데 없는데 오늘은 왜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할까? 낭군이 옆에 있으면 이런가? 흠! 이건 새로운 모습인데?”
황제가 몽설을 보며 놀리듯이 말했다.
몽설은 아걸을 쳐다봤다. 한데 아걸은 의문은 풀어주지 않고 빙긋 웃기만 했다.
황제가 몽설을 보며 말했다.
“내가 일홀문주를 데리고 산책하면, 이 사람을 다시 지옥 구덩이로 밀어 넣을 말을 할 거네. 그래도 되냐고 묻는 거지. 질부가 안 된다고 하면 산책을 안 할 생각인데.”
몽설은 황제의 말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황제의 말에서 진한 피비린내가 맡아졌다.
방금 황제는 모든 사단의 원인을 말했다. 몽설을 왜 질부라고 부르는지도 말했다. 그 원인과 현재 일어나는 일들…… 황제는 모든 사건을 정리하려고 한다.
몽설은 비로소 황제가 쇠약해진 몸으로 긴 여정도 마다하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고되고 힘든 길을 즐겁게 웃으면서 달려왔던 이유도 명확하게 알았다.
엿새의 밀행은 황제의 일생을 정리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괜찮으시면 저도 같이 산책하겠습니다.”
“같이?”
“호황위 군주로서 폐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또 일홀문주의 안사람으로 제 낭군이 어떤 길을 가는지 알아야 합니다. 같이 산책하는 것, 허락해 주세요.”
“그래? 하하! 그럼 같이 산책하지.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몸이 죽을 맛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상쾌해. 저녁 바람이 아주 좋아. 하하하!”
황제가 호쾌하게 웃으면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