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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502화 (502/600)

第百一章 남해혈로(南海血路) (2)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마음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절절한 마음보다도 몸이 더 진한 말을 전할 때도 있다.

몸이 가까우면 마음도 가까워지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옆집에 사는 이웃이 멀리 떨어져서 사는 형제보다도 사이가 더 돈독해진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이가 나빠질 경우, 가까운 이웃이 먼 이웃보다 더 심한 원수가 된다.

부부나 연인 사이는 말할 것도 없다.

부부는 아무리 미워도 한 침상을 써야 한다는 말도 흘려서 들을 말은 아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도 있다. 모두 몸이 가까우므로 할 수 있는 말이다.

아걸과 몽설의 첫 만남은 어색했다.

절에서 만났을 때, 좁은 방에 단둘만 남겨졌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항상 그리워했는데, 막상 만나니 말을 하기가 어색했다.

하지만 아걸이 몽설을 안았을 때, 몽설이 아걸의 품에 안겼을 때…… 두 사람을 어색하게 만들었던 낯선 감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서로 몸이 닿는 순간, 두 사람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마음이 풀어졌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사람들답지 않게 서로의 감정을 진하게 느꼈다.

떨어져 있었던 공백 기간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남해까지는 상당히 먼 길인데, 마차를 빌릴까?”

“나중에. 지금은 걷고 싶어.”

몽설이 아걸의 손을 꼭 잡았다.

“일홀도, 보고 싶은데. 보여주면 안 돼?”

“나도 나중에. 설마 몽매에게 안 보여줄까.”

“지금 보여주면 안 돼?”

“왜? 두주가 그렇게 무서워?”

“무섭지. 무서운 사람이잖아. 허도기에게 딱 한 번 패한 사람이라니까 상당히 강할 거야.”

“이상하네?”

“뭐가?”

“내가 허도기하고 네 번 싸운 사람이거든. 허도기와 싸운다고 할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허도기에게 진 사람과 싸운다는데 긴장할 이유가 있나?”

“정말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런데 난 왜 허도기보다 두주가 더 무섭게 느껴지지?”

몽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하하!”

아걸이 웃었다.

아걸은 몽설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안다.

이것은 실전 문제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몸의 문제다. 머리의 인식이 아니라 몸의 인식이다.

몽설은 동영 인자와 싸웠다. 유음류를 직접 접했다.

동영 인자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안다. 혈검경의 니환일검이 아니면 상대하기 벅차다는 것도 안다. 아걸에게 니환일검 같은 심검(心劍)이 있을까? 차라리 내가 싸우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아걸이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걸은 강하다. 하지만 두주도 강하다. 강한 사람들끼리 싸운다니 걱정이 된다. 이게 뭐 이상한가?

동영 인자와 싸운 경험이 생각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했다.

반면에 몽설은 허도기와는 싸우지 않았다. 허도기가 천하제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의 무공을 알지 못한다.

물론 혈무대에서 펼치는 발검술은 봤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을 스쳐 가는 검을 보고 도대체 무엇을 알 수가 있을까? ‘저렇게 빠를 수가 이 한마디는 할 수 있어도 검을 마주한 사람이 느끼는 소름 끼치는 압박감은 전혀 알 수가 없다.

허도기의 무공은 직접 검을 대하는 당사자가 아니면 정확히 알지 못한다.

몽설은 동영 인자들에게서 그런 압박감을 받았다.

혈검이 가일층 상승하지 않았다면 이번 싸움에서 상당히 애를 먹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몽설은 허도기의 무공은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봤다. 두주의 무공은 전혀 보지 못했다. 동영 인자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이 전부다.

그만큼 심하게 압박을 받은 것이다. 그만큼 동영 인자들의 오대신술은 무서웠다.

몸이 경험한 무공은 허도기보다도 두주가 더 무섭다고 인식한다.

이것도 역시 몸과 몸의 거리 문제다.

몽설에게는 허도기는 멀리 있는 사람이고 두주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 무공 얘기는 그만하고 남해까지 가는 동안에 즐기자.”

아걸이 말했다.

“그래도 돼?”

“되지.”

“가는 동안에 계속 수련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나도 은거 무인들처럼 오빠 상대가 되어줄 수 있는데.”

“그만. 무공 얘기는 그만. 알았지?”

“그래. 알았어.”

몽설이 환하게 웃었다.

사실 몽설은 무공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걸과 단둘이 있는 게 얼마 만인가? 몽설은 산에서 내려온 후부터 아걸의 팔을 놓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 손을 잡고 있거나 팔짱을 꼈다. 하다못해 옷자락 한 조각이라도 잡고 있었다.

입으로 하는 말과는 다르게 그녀의 몸은 아걸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 그럼 가는 동안은 마음껏 즐겨.”

“세상을 보면서?”

“그래. 생각해 보니까 오빠하고 이런 적이 없었네? 오빠하고는 늘 산에만 있었어. 사람들을 피해서.”

“우선 밥부터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아걸이 몽설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값싼 소면을 먹었다.

길거리에서 만들어 파는, 삶은 국수에 간장만 탄 흔하디흔한 소면이다.

“더 먹어.”

몽설이 자신의 소면을 덜어 주었다.

“한 그릇 더 시키면 돼.”

“뭐 하러 그래. 이거 양이 많네.”

“먼 길 가는데 많이 먹어둬. 면이라서 곧 배가 꺼져.”

“나 정말로 이거 많아서 그래. 그동안 많이 안 움직여서 그런가? 먹는 양도 줄었어.”

“살찔까 봐 안 먹는 건 아니고?”

“이미 사내 잡아놨는데, 살 좀 찌면 어때? 혈검이 만만하면 바람피워도 되고.”

“훅! 이거 무서워서 여자 얼굴이나 제대로 보겠나.”

“호호호!”

몽설이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몽설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어렸다.

값싼 소면 한 그릇을 먹는데도 행복이 넘쳐 흐른다.

확실히 행복은 부귀영화에 있지 않다. 무공에 있지도 않다. 행복은 짧은 순간에 만족감에 있다.

이 순간의 만족감!

중원 무림에서 칼날을 딛고 사는 사람들은 이 짧은 순간의 행복함이 얼마나 절실한지 잘 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맞이할 수 없는 순간일 수도 있어서 더 소중하다.

‘너무 행복하니까 불안해.’

‘그런 일 없어. 행복하기만 하면 돼.’

아걸과 몽설은 소면을 먹지 않았다. 행복을 먹었다.

이 시간을 둘이 함께하는 게 정말 기뻤다.

“나…… 아이 갖고 싶어.”

몽설이 불쑥 말했다.

아걸은 몽설을 안고 있다가 다소 놀란 듯 지긋이 쳐다봤다.

“갑자기? 왜?”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가족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 서로 한 침상에서 같이 자면서도 부부라고 할 수도 없고…… 이렇게 안고 있으면서도 내 남자가 아닌 것 같아.”

“그럼 난 누군데?”

“곧 떠나갈 사람.”

“…….”

아걸은 몽설을 꼭 껴안았다.

“내 곁을 떠나지 않을 남자인 것은 알아. 한데 실감이 안 나. 우리가 가족이라는 게.”

“아이가 있으면 달라질까?”

“아이가 있으면 나도 가정을 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아서. 몸은 떨어져 있지만, 저 사람이 내 신랑이야 하는 생각. 지금도 그렇지만……”

“그러면 아이보다 더 확실한 게 있는데.”

“뭐?”

몽설이 눈빛을 반짝 빛냈다.

“혼인하자.”

“혼인?”

몽설이 아걸을 빤히 쳐다봤다.

“내일. 내일 당장 혼인하자.”

“호호호!”

몽설이 웃으면서 아걸의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럴 필요 없어. 혼인은 형식에 불과한데 뭘. 지금도 당신은 내 사람이잖아.”

몽설은 아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아걸은 몽설을 데리고 아침 일찍 인근에 있는 절을 찾았다.

신불사(神佛寺)라는 절인데, 산속에 있는 명찰은 아니고 작은 말사(末寺)다.

“오빠, 여긴 왜?”

“오늘 혼인하자고 했잖아?”

“어멋! 정말…… 할 거야? 무슨 혼인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해?”

“시간이 필요한가?”

“아니. 오빠, 오빠 마음은 알겠는데, 안 그래도 돼. 괜히 마음이 헛헛하니까 가족이 그리웠나 봐. 혼인 같은 것 안 해도 오빠는 내 사람인데 뭘.”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혼인해줄래?”

“오빠!”

“혼인해줘.”

몽설은 그제야 아걸이 농이 아닌 것을 알았다. 진심이다. 그리고 정말로 혼인을 하려고 한다.

몽설은 고개를 힘 있게 끄덕였다.

아걸은 지난 밤 동안에 상당히 바빴던 것 같다.

신불사에는 이미 두 사람을 혼례를 알고, 주례법사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몽설은 배도(陪導: 들러리)의 도움을 받아서 혼례복으로 갈아입었다. 무복을 벗고 난생처음 입어보는 낯선 옷을 입었다. 싸움할 때도 떨지 않았는데, 옷 한 벌 입으면서 덜덜 떨린다.

“여기 앉으세요.”

주례법사가 아걸과 몽설을 인도해서 부처님 앞에 앉혔다.

두 사람 뒤에는 낯선 사람들이 늘어섰다. 아걸이 급히 구한 배도들이다.

“오분향(五分香)을 사르세요.”

주례법사가 향을 지피게 했다.

주례법사가 삼귀의(三歸依)를 선창하고, 두 사람도 따라서 외웠다. 그리고 부처님께 삼배했다.

불교화혼(佛敎花婚)은 혼인하는 남녀가 전생의 깊은 인연으로 맺어졌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게 한다. 또 부처의 행적을 본받아서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시작도록 한다.

혼인을 고하고, 부처님에게 증명을 청하는 설송(說頌)을 범음(梵音)으로 외우고, 아걸과 몽설이 부처님께 꽃을 올리고, 삼배하고, 두 사람에게 혼인 서약을 시키고……

아걸이 몽설에게 화관(花冠)을 씌워주었다. 홍상(紅裳)도 입혀주었다. 그런 후에 다시 부처님께 삼배했다.

화혼식은 배도가 여래십대발원문(如來十大發願文)과 사홍서원(四弘誓願), 찬불게(讚佛偈)를 읊는 것으로 끝났다.

혼례는 ‘혼인합니다’ 하고 말 몇 마디만 하면 끝날 것 같았다. 한데 친인들 없이 두 사람만 치르는 혼례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두 시즌이나 걸렸다.

반나절이 후딱 지나갔다.

그 사이에 절에 찾아온 신도들도 두 사람의 혼례를 축하했다.

지인 없이 낯선 사람들과 치르는 혼례다.

“색시가 참 이쁘네. 어디서 저렇게 이쁜 신부를 얻었대?”

“신랑도 만만치 않잖아? 훤칠한데 뭘.”

“그래도 신부가 아깝지. 신랑은 순 날도둑놈같이 생겼는데 뭘. 신부가 속아서 혼인하는 거 아냐?”

사람들은 몽설이나 아걸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칼과 검을 놓았다. 지금은 무인이 아니다. 평범한 범인이다.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몽설이 아까워 보이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몽설의 미모는 언제 어디서나 반짝인다.

아걸이 신방으로 찾아왔다.

신방이라고 해봤자 절 밑에 있는 움막에 불과하다.

아걸이 몽설에게 다가가서 붉은 면사를 들어 올렸다. 몽설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울 듯한 표정으로 아걸을 쳐다봤다.

“이상하게 나 떨려.”

몽설이 말했다.

“나도.”

“우리 혼인한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이게 이렇게 떨릴 줄 몰랐어. 옆에서 뭐라고 하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고 떨리기만 했어.”

몽설은 정말 몸을 떨었다.

아걸이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이제 괜찮지?”

“응. 괜찮아.”

“이제 우리가 부부라는 게 실감 나지?”

“실감 나.”

“후후!”

갑자기 아걸이 웃었다.

“왜 웃어?”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안고 있으면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이런 말을 해야지 되는데, 어떻게 그 말이 입에서 안 나온다.”

“기대도 하지 않았네요.”

몽설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대신 최대한 속 안 썩일게.”

“내가 되게 밑지는 거 같아.”

“밑져도 어쩔 수 없어. 이미 혼례 치렀거든.”

“너무 홀린 듯이 치른 것 같아.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치를걸.”

“이미 늦었다니까.”

아걸이 몽설을 와락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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