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504화 (504/600)

第百一章 남해혈로(南海血路) (4)

사막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물도 없는 사막인데, 모래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환상이 보인다.

허도기는 사방 오 장을 덮는 대양산(大陽傘)을 펼쳤다.

대양산 밑에 드러누울 수 있는 침상을 놓고, 침상 앞에 의자와 탁자를 놓았다.

탁자 위에는 인근에서는 보기 힘든 과일이 펼쳐져 있다.

서역에서 가져온 포도주가 유리잔에 반쯤 담겨 있고, 탁자 밑에는 북방 민족의 술인 마유주(馬乳酒)도 한 통이나 놓여 있다.

허도기는 침상에 드러누워서 드넓게 펼쳐진 사막을 쳐다봤다.

휘이이이잉!

사막에서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왔다.

작열하는 태양만 피할 수 있다면 사막도 나쁘지 않다.

사막의 공기는 무척 건조하다. 덕분에 태양이 이글거려도 그늘만 찾을 수 있으면 어느 정도 견딜 수가 있다. 양산을 펼치거나, 천막을 세우거나.

“황제가 쓰러진 것 같습니다.”

사령이 조용히 보고했다.

“쓰러질 때가 됐지.”

허도기는 놀라지도 않았다. 당연한 보고를 듣는 사람처럼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음절맥이 도졌다면…… 이제 생명이 촌각에 달렸다는 뜻인데, 취화원주. 몽설은 어디 있나?”

“아걸과 함께 남해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하하!”

허도기가 만족한 듯 크게 웃었다.

“두주를 아걸에게 맡긴다. 조장군이라면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 두주에게는 육만이라는 대군이 있으니 아걸 혼자는 안 될 것이고, 그래서 몽설을…… 근위대장을 붙일 줄 알았는데, 몽설이라. 황제에게 운이 떠난 모양이군.”

허도기가 웃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혈검만이 오음절맥이 발작하는 시간을 늦출 수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이긴 하다.

또 유일한 혈검의 전인을 아걸에게 보냈다. 두 연인에게 같이 있을 시간을 주자는 생각으로 보인다. 몽설에게 베푸는 포상이겠지만, 때가 안 좋다.

인정도 베풀 때 베푸는 건데.

“후후!”

허도기는 활짝 웃었다.

황제가 몽설을 불러들인 이유는 딱 하나, 그녀가 혈검경의 전인이기 때문이다.

황제는 단순히 몽설이 믿을 수 있는 존재라서 옆에 둔 것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그녀가 필요했다. 호황위 군주라는 절대적인 지위를 줄 만큼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평민을 옆에 두겠나.

근위대장은 몽설에 필적하는 무공을 지녔다. 그러니 무공 때문에 몽설을 택한 것은 아니다.

간자를 색출해내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근위대장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에게 호황위 군주와 같은 전권을 주었다면 지금보다 더 확실히 색출해냈을 것이다. 근위대장은 보기보다 차갑고 매서우니까.

간자 색출 때문에 몽설을 부른 것도 아니다.

황제가 몽설을 옆에 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믿을 수 있는 지인이 필요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왜 필요할까? 마음의 평온을 얻기 위해서다. 어떤 목적 때문에 또는 어떤 일을 시키기 위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던 게 아니다.

황제는 속에 있는 깊은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저 마음의 위안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혈검경에 있는 혼검(魂劍)이다.

혈검경에는 니환일검이라는 영검(靈劍)이 있다. 혼검이나 영검이나 같은 말이지만…… 영이 만들어낸 영검, 이 영검만이 오음절맥이 만들어낸 오물을 긁어낼 수 있다.

이 부분은 허도기도 시도해 본 적이 있다.

황제를 먹이로 보지 않았을 때, 황제와 사이가 좋아서 공부라는 칭호까지 받았을 때…… 황제의 오음절맥을 치료해 보고자 진기삭경(眞氣削經)을 시도해봤다.

하지만 자신의 진기는 황제의 몸 안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오음절맥은 그 자체로 아주 강력한 반탄력을 일으킨다. 외부에 강력한 성을 쌓고 안에서 썩어들어 가는 것이다.

이 강벽은 돌파를 허용하지 않는다.

진기로 강벽을 뚫으면 성 전체가 일시에 무너진다. 황제의 경맥이 가닥가닥 끊어진다.

두말할 필요 없이 즉사다.

오음절맥이 형성한 강벽을 뚫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의술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침도 쓰지 못하고, 뜸도 뜨지 못한다. 점혈도 할 수 없다. 진기 치료도 하지 못한다. 탕약을 써서 안으로부터 오음절맥을 고치는 수밖에 없는데, 마땅한 약조차 없다.

하지만 딱 하나, 강벽을 투과(透過)할 수 있는 검이 있다.

혼검, 영검은 강벽을 돌파하지 않는다. 전혀 손상을 일으키지 않고 안으로 파고든다. 물이 습자지에 배어들고, 마침내는 건너편에 물방울을 만들 때처럼…… 고요히 스며들어서 썩은 부분만 건드릴 수 있다. 진기가 아닌 영검이기에 가능하다.

황제는 허도기가 진기삭경을 시도할 때, 이런 방법도 있구나 하고 깨달았을 것이다.

진기로 오음절맥의 발작을 늦출 수 있다! 다만 아주 특별한 진기가 필요하다.

사실이다. 하지만 절망적이다.

허도기도 하지 못한 일을 누가 할 수 있을까? 허도기보다 특별하고 강한 진기가 어디 있을까? 허도기가 손을 쓰지 못한다면 진기삭경은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포기했다.

하지만 황제는 혈검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러니 혈검경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황제는 무학의 고수다. 무공을 수련한 적은 없지만, 무학은 아주 깊다. 무공 이론에 대한 지식은 허도기와 무리(武理)를 논할 만큼 아주 깊다.

황제는 혈검경을 깊이 들여다봤을 것이다.

사실, 황제가 몽설을 호황위 군주로 임명했을 때 허도기는 잠시 갈등했다.

이제는 정말 피를 봐야 하나 하고.

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황제는 몽설을 옆에 두고도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오음절맥을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가 수시로 들어왔다.

왜? 이유는 두 가지를 추측할 수 있다.

가능성이 매우 낮은 추론이지만, 황제가 진기삭경 방법을 모를 수도 있다. 비교적 타당한 생각은 몽설이 혈검에 대한 진척이 워낙 낮아서 진기삭경을 전개할 정도가 아니라는 거다.

분명히 후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음절맥의 발작을 늦출 방법은 없다.

니환일검으로 진기삭경을 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경지가 필요하다. 아주 강한 내력이 있어야 한다. 몽설의 무공은 나날이 발전할 터이지만 아마도 오십 년 후쯤에서야 가능할 것이다.

과거 혈해검신이라면 가능했을까? 몽설로는 어림없다.

하물며 황제는 몽설을 아걸과 함께 남해로 보냈다.

이쯤에서 황제의 마음이 읽히는 것 같다.

그래! 이제 미련을 버리자. 여기까지 했으면 됐어. 이제는 운명을 받아 버리자.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황제 상태가 어떤지 수시로 보고하라고 해.”

“네.”

“그러게 그런 몸으로 왜 무리하게 움직여. 쯧! 몇 걸음 걷지도 못하면서 그 먼 길을. 후후!”

허도기가 웃으면서 포도주를 마셨다.

‘이제 거의 다 됐어.’

허도기는 웃었다.

그가 생각한 찬탈은 힘으로 몰아치는 찬탈이 아니다. 안에서 무너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는 찬탈이다.

황제가 무너지고, 나라는 전쟁 국면에 돌입한다.

지금이 정확히 그런 상황이다.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온 국민이 모두 안다. 그리고 황제는 무너지는 중이다.

황제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자신이 황궁으로 간다.

황권을 수습하고 나라를 수습한다.

이것이 최고의 찬탈이다. 중원을 찢어발기는 찬탈도 여지를 남겨둔다. 최후에는 상처가 가득한 중원이라도 얻어야 하므로 수단을 남겨둔다.

민심은 천심이다.

허도기는 공부로 출사하는 동안 이런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리고 단숨에 민심을 끌어안을 방책을 마련했다. 지금 그 일을 하는 것이고.

황제가 탈이 났을 때, 공부는 변방에 있었다. 세외팔국이 국경을 침범할 때, 공부는 모든 관직을 놓고 변방을 떠돌고 있었다.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과 무관하다.

국경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이 사건은 대장군이 책임져야 한다.

황제에게 탈이 생기면 조정은 태자를 황위에 올릴 것이다. 하지만 태자조차 없다면…… 황궁에 황위를 이을 사람이 모두 사라진다면…… 극심한 혼란에 직면한다.

자신이 본격적으로 나설 시점이다.

황궁을 장악하고, 일부 사람들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삭탈관직과 죽음으로.

‘그런데 이놈들…… 꽤 재촉이네.’

허도기는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힐끔 쳐다봤다.

서역군(西域軍)에게서 온 재촉장이다. 언제 진령(進令)을 줄 것이냐고 물어왔다. 빨리 중원으로 들어가고 싶단다. 빨리 약속대로 움직이고 보상을 받고자 한다.

“후후!”

허도기는 웃었다.

세외팔국은 중원을 찢어발기려고 한다. 중원을 갈가리 찢는다. 그리고 흩어진 살과 뼈를 고루 나눠 갖는다. 이것이 허도기가 그들에게 해준 약속이다.

물론 허도기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추호도 없다.

중원은 자신이 가질 땅이다. 그러니 손상 없이, 이 상태 그대로 넘겨받아야 한다.

또 중원은 매우 강건하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백만 대군에게 정천검법을 가르쳤다. 전쟁에 데리고 나가서 전투 경험을 쌓게 했다.

이들은 웬만해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세외팔국이 거침없이 밀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장기전이 될 것이다.

이런 점은 세외팔국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나라도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들은 약간의 진군만 한다.

그 사이에 중원은 안에서 무너진다. 황상이 쓰러지고, 실세가 허도기 사람들로 금선탈각(金蟬脫殼)한다.

전쟁은 벌어지면 안 된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황상은 안에서 무너져야 한다. 자신이 역모를 일으켜서 황권을 무너뜨리면 안 된다.

이것이 세외팔국이 원하는 것이다. 또 대장군 밑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협조하는 장병이 원하는 것이다.

세외팔국은 약간 움직인 대가로 중원을 가지려고 한다.

자신을 따르는 장병은 세외팔국을 이용해서 황위를 찬탈하는 것으로 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권력과 돈이다.

장수들이 대장군보다 자신을 따르는 이유는 두 가지다.

실력과 미래.

자신은 이 나라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또 자신들의 앞날이 지금보다 훨씬 더 밝고 탄탄할 것이라는 미래도 보여주었다.

전쟁을 원하는 자는 전쟁을 계속할 수 있다. 돈을 원하는 자는 돈을 가질 수 있고, 높은 관직을 원하는 자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게 해준다.

한계에 막힌 그들을 더 높이 끌어올려 줄 수가 있다.

허도기가 보여준 것은 이것뿐이다.

중원군도 막상 세외팔국이 중원을 찢어발기려고 달려들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중원이 찢어진다는 것은 자신들의 미래가 산산이 부서진다는 것이다.

허도기가 보여준 미래가 찢어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까지 장병들이 허도기에게 협조하고 충성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더 밝은 미래를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은 사람이 눈빛을 반짝이면서 자신을 쳐다본다.

이런 눈길들이 귀찮다. 이들은 이용한 후에는 떨어져 나가야 하는데, 계속 달라붙는다.

그래서 성검문을 정리했다. 이십사 위문도 정리했다.

아걸은 죽을힘을 다해서 싸워왔다. 하지만 성검문 소축십검을 무너뜨린 것에 불과하다. 그들 외에 성검문에서 누가 나가 싸운 적이 있나? 없다.

자신이 직접 양성한 소축십검은 머리가 클 만큼 컸다.

그들은 더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들은 성검문을 떠나서 일가를 이루고 싶어 한다. 또는 욕심이 너무 크다. 성검문을 이어받아서 무림을 지배하고자 한다.

필요 없는 자들은 버린다.

아걸이 이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는데…… 아걸 손에 그들을 정리했으니 훨씬 깔끔하다. 아걸이 설마 이렇게까지 잘해줄 줄은 몰랐는데, 정말 잘해주었다.

거기에 이십사 위문까지.

허도기가 본 것은 공멸이다. 아걸도 죽고 이십사 위문도 공멸한다. 한데 아걸은 공멸을 딛고 부활했다.

아주 화려하게 일홀도를 얻었다.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었다.

아걸에게 일홀도를 주고 야천을 얻었다.

아걸은 야천에서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구룡을 쓰러뜨리고 야천을 장악한 듯이 보였다. 하지만 야천은 살아있는 생물체다. 아걸처럼 잠깐 들렀다 가는 자들이 지배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야천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서 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는 자들이 지배하는 것이다.

마유 마인들은 아걸에게 말도 안 되게 밀렸다.

마유 마인들의 무공은 상당히 강해서 야천을 짓누를 수 있다. 그러나 아걸 때문에 힘을 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숫자가 많다. 아걸이 한 곳을 치면 그들은 두 곳을 점령한다.

아걸은 끝나지 않는 싸움을 계속 벌여야 한다.

하기는 마유 마인도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걸이 계속 공격하면 끝낼 수도 있다.

그쯤에서 아걸이 손을 놓았다.

당연히 마유 마인이 야천을 지배하고 있다. 야천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야천은 지금 허도기를 위해서 부지런히 소문을 만들어내고 있다.

실제로 민심을 움직이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후후후!”

허도기는 웃었다.

아걸은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그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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