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一章 남해혈로(南海血路) (5)
료수(僚水)는 남만과 운남의 경계다.
운남 사람은 자유롭게 료수를 오갈 수 있지만, 남만 사람은 강을 건너는 것이 엄격하게 통제된다. 군대가 지키고 있는 지역으로만 도강할 수 있다.
스읏! 슷!
일단의 무리가 료수 상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모두 알몸이다. 하체를 가릴 수 있게 짧은 가죽 치마만 입었다. 신발도 신지 않았다.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인 맨발로 움직인다.
등에는 역시 가죽으로 된 행랑을 짊어졌다.
그들은 전신에 흙칠을 했다.
마른 흙으로 몇 번이고 덧칠해서 사람인지 흙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땅에 엎드리면 흙이 되고, 풀숲에 엎드리면 풀로 변한다. 땅에 흡수된다.
이들의 모습은 당장 주목을 받을 만하다. 누구든 이런 모습을 보면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어쩐지 꺼려지고 흉포해 보여서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 만든다.
한데 이들이 땅과 풀과 강이 있는 강변에 서자, 전혀 어색하지 않다. 허리를 낮추고 살짝 앉기만 해도 사람이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강변에 이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몸을 일으키기 전까지, 강변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허리에 부드럽게 휘어진 만도(彎刀)를 찼다.
폭이 넓고 길이는 짧은 남만도다. 밀림을 오가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칼이다.
그렇다. 강변에 선 사람들은 남만족이다.
그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강을 쳐다봤다.
“강요하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돌아가도 좋다.”
쵸 디엔이 말했다.
물러서는 사람은 없었다. 갈등을 일으키는 눈빛도 없었다. 그들은 감정이 없는 목석처럼 무심히 강만 쳐다봤다.
이 강을 건너면 운남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강을 건너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라.”
역시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죽음처럼 깊은 침묵이 이백여 명을 훑고 지나갔다.
“강을 건너면 뒤돌아보지 않는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말이다. 지나간 자리는 돌아보지 않는다. 두 번 다시 밟을 일이 없을 땅이기에. 오직 앞만 보고 치달린다. 어디까지 달릴지 모르겠지만.
“낙오한 자는 버린다. 본인 스스로 낙오하지 않도록 유의하라.”
본인이 좋아서 낙오하는 사람은 없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겼을 때만 낙오가 된다.
낙오하면 스스로 자신을 처리한다.
단지 죽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신조차도 발각되지 않도록 깨끗하게 정리한다. 죽음조차도 쉽게 결행하지 못한다. 철저히 숨어서 죽는다.
“부상자는 버린다. 본인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하라.”
낙오자나 부상자나…… 강 건너는 지옥이다. 지옥 불을 뚫고 들어가서 염라대왕을 죽인다.
“명예 불복하거나 이견을 말하는 자도 죽인다. 절대복종. 두말하게 하지 마라.”
강변에 선 전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쵸 디엔은 잠시 시간을 주었다.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돌아가도 좋다. 망설일 필요가 전혀 없다. 지금 뒤돌아선다고 해서 손가락질하거나 따돌림당하지 않는다.
전쟁터에 뛰어드는 것은 오직 자유의사다. 하지만 일단 투입되면 절대복종만 기다린다. 그때부터는 자유가 없다. 오직 명령을 쫓는 전사만 남는다.
대략 일다경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물러서는 자는 없다. 료수에서 물러설 사람이라면 고향을 떠나지도 않았다.
남만 제일 부족, 남만 제일의 맹수, 야만인 토족.
쵸 디엔은 이번 남만족 거병에 동참하지 않았다. 포로가 되었던 토족 칠백 명 중 유일하게 목숨을 건져서 남만으로 돌아간…… 그 치욕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형식적인 싸움에 휘말릴 생각은 없다.
남만족은 허도기와 손을 잡았다.
토족 칠백 명은 허도기와 손잡은 후 몰살당했다. 물론 그들에게 칼을 쓴 사람은 아걸이다. 허도기의 적이다. 그래서 더욱 허도기가 꺼려진다. 허도기라는 사람은 늘 불운을 물고 다닌다. 그와 인연을 맺으면 불행해진다.
쵸 디엔은 거병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중원이 떠들썩한 이번 기회를 놓칠 생각도 없었다.
이 기회에 앞서간 칠백 전사들의 복수를 한다.
전임 족장 강희군과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한 토족 전사들의 한을 달래려고 한다.
쵸 디엔은 매우 은밀하게 움직였다.
운남을 공격하고 있는 남만족은 귀신과 같다. 종적을 드러내지 않고 기습을 감행한다. 또한, 목적을 이룬 후에는 티끌만 한 단서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런 남만족들조차도 토족이 움직인 것을 알지 못했다.
료수를 건너서 중원에 들어가지만, 여전히 세상은 토족의 움직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도강!”
쵸 디엔이 말했다.
그의 중원식 이름은 정달이다. 하지만 의미 없는 이름을 버리고 남만식 이름을 찾았다.
쵸 디엔, 미친개.
도강이라는 명이 떨어지자, 토족 전사들이 재빨리 풀을 엮어서 만든 초선(草船)을 물에 띄웠다.
강을 건너라는 명령은 이미 떨어졌다.
배를 띄웠으면 바로 건넌다. 머뭇거리거나 다시 보고할 필요가 없다.
스르르륵! 스륵!
한 배에 다섯 명씩 타고 빠르게 강을 건너간다.
사위는 칠흑처럼 어둡다.
다른 때 같으면 달빛과 별빛이 비쳐서 강물이 반짝반짝 윤기가 흐른다. 하지만 오늘은 빛이 전혀 없다. 하늘에 먹장구름이 가득 깔려 있다.
이럴 때 료수는 지옥처럼 어둡다.
토족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무턱대고 마구잡이로 공격하지 않는다. 식인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처절하게 싸우지만,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필승 요건을 차지한다.
날씨를 예측하고 지형을 살핀다. 적의 상태를 자세히 분석한다.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찾는다. 그리고 그 상황에 토족 전사들을 투입한다.
토족 전사들이 할 일은 이미 이겨놓은 승리를 철저하게 즐기는 것뿐이다.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적이 된 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저며버린다.
스르르륵!
초선 사십여 척이 빠르게 강을 건넜다.
이번에 쵸 디엔이 동원한 자는 모두 이백 명이다.
아걸과 무인 몇 명에게 칠백 전사가 몰살당했는데, 겨우 이백 명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쵸 디엔은 바보가 아니다.
전임 족장이 그에게 적양팔식, 뜨거운 불을 뿜어내는 칼이라는 ‘다오 푼 라야’를 전수했다. 칠백 전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라는 뜻이다.
쵸 디엔만이 다오 푼 라야를 절정으로 수련해 낼 수 있다.
실제로 쵸 디엔은 적양팔식을 절정으로 수련해냈다. 적양칠식까지는 중원에 있을 때 이미 수련한 상태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초식인 ‘뇻 디엔’뿐이었다.
족장이 목숨을 던져가면서 마지막 초식을 전수했다.
아걸을 상대로 자신이 깨달은 다오 푼 라야의 정수를 아낌없이 쏟아냈다. 그리고 쵸 디엔은 족장의 가르침을 피눈물을 쏟아내며 지켜보았다.
토족 전사들은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토족 전사치고 쉰 살을 넘긴 사람이 거의 없다. 부족 중 절반은 서른 살 이전에 죽는다. 병으로 죽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싸우다가 죽는다.
주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기 때문에 죽음에 무덤덤해졌다.
그래서 더더욱 잔인하다. 거침없이 죽일 수 있다. 싸움이 흥겨운 놀이처럼 여겨진다.
쵸 디엔이 추려온 전사들은 앞서 죽은 칠백 전사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능가하지도 못한다. 굳이 말하자면 모두 같은 전사다.
그러면 이들도 전멸당하지 않을까? 상관없다. 이들은 아걸과 싸울 게 아니다.
중원은 토족을 건드렸다.
아걸이 토족 전사를 죽인 것이나 조 장군이 군대를 몰아쳐서 남만을 토벌한 것이나 하등 다를 바 없다.
토족은 침략당했다.
토족 전사들 그리고 토족민을 죽인 대가는 황상이 치러야 한다. 맞다. 이들이 달려가는 곳은 황궁이다.
쵸 디엔의 이런 행동은 남만족과 상의한 것이 아니다. 허도기와 연락을 취한 것도 아니다. 쵸 디엔의 독자적인 판단이다. 토족은 받은 대로 갚아준다.
스르륵!
초선이 료수 강변에 닿았다.
전사들은 재빨리 단단하게 묶은 풀매듭을 풀어서 배를 해체했다. 그리고 조금씩 풀어헤친 풀들을 강물에 흘려보냈다.
강은 풀잎으로 가득 뒤덮였다.
지금은 밤이다. 이 풀잎은 한두 시진만 지나면 뿔뿔이 흩어진다. 물에 잠기고, 떠내려가고…… 료수는 넓고 물살도 빠르다. 이백 명이 타고 온 초선쯤은 감쪽같이 집어삼킨다.
도강 흔적이 말끔히 지워진다.
“띠엥 담 레이, 꼰 카오. 앞장서!”
쵸 디엔이 지시했다.
띠엥 담 레이는 늪의 소리를 듣는 자라는 뜻이다. 길눈이 신기할 정도로 밝다.
꼰 카오는 여우를 말한다. 위기 감각을 기가 막히게 느낀다.
지시받은 두 명이 재빨리 앞으로 치달렸다. 다른 전사들도 곧바로 치달렸다.
이백여 명이 일제히 움직인다. 그런데도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백 명 모두 하나같이 뛰어난 신법을 구사한다. 조심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기척을 흘리지 않는다.
길을 인도하던 띠엥 담 레이와 꼰 카오가 산으로 접어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이미 알고 있다.
산에서 산으로 그리고 또 산으로…… 산이 끝나고 평지가 나오면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절대로 사람과 마주치지 않는다.
그렇게 이만리를 치달릴 생각이다.
누구라도 이만리를 치달린다고 하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사람을 피해서 산길로만? 어림없다고 고개를 내두를 게 뻔하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
쵸 디엔은 미친 짓을 하는 게 즐겁다.
스읏! 슷!
앞서가던 두 사람이 주저앉았다.
뒤따르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췄다.
스슷! 슷!
앞서가던 자가 손짓을 했다.
앞에 사람이 있다. 무인이다. 은밀하게 숨어 있다. 숨어 있는 형태로 보면 남만족이다.
허도기에게 동원된 남만족이 은신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윽!
쵸 디엔은 손으로 목을 그었다.
그러자 토족 전사 중 다섯 명이 재빨리 앞으로 쏘아 나갔다.
“끅!”
“켁!”
앞쪽에서 짧은 단말마가 터졌다.
비명이 울리자 띠엥 담 레이와 꼰 카오가 즉시 튀어 나갔다.
그들은 달리면서 죽어 널브러진 남만족 두 명을 봤다. 그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전사들도 봤다.
다섯 명이 땅을 파고 시신을 묻는다.
토족의 시신 매장법은 매우 은밀하다. 땅거죽을 떼어내고, 시신을 매장한 후에 다시 땅거죽을 덮어씌운다. 그리고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한다.
이렇게 하면 절대로 시신이 발견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매장법은 사냥한 동물을 잡아서 보관할 용도로 쓰였다.
토족은 전투 전에 사냥을 한다. 그리고 잡은 동물을 은밀히 땅에 묻어 놓는다. 일종의 비상식량이다. 이런 작업을 해놓으면 전투를 하면서 식량을 갖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또 다치거나 낙오한 사람들이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땅에 묻어 놓은 고기가 부패했어도 먹는다.
보통은 부패한 고기를 먹으면 탈이 나지만, 남만족은 내성이 생겨서 어지간한 것은 소화한다. 이런 모습이 토족을 정말 야만인처럼 여기게 만든다. 같은 남만족이라도 다른 부족들은 이렇게까지 하지 못한다.
죽은 자들은 실종 처리될 것이다.
쉬이익! 쉬이이잇!
토족 전사들이 다섯 명을 제쳐두고 쾌속하게 움직였다.
다섯 명은 시신을 처리한 후 곧바로 따라올 것이다. 그들은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서 더 빨리 달려야 한다. 그들을 기다려 줄 필요가 없다. 따라붙지 못하면 낙오다.
사실, 시신을 묻는 일은 잠깐이면 끝난다. 길어야 일다경이면 충분하다.
잠시 숨을 돌리면 기다릴 수도 있다.
토족은 그러지 않는다. 내버려 두고 간다. 특별히 바쁘게 움직일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쵸 디엔은 토족 전사들을 아주 잔인하고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명령만 쫓도록.
“쉰다!”
쵸 디엔이 말했다.
토족 전사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각기 사주 경계에 돌입했다. 쉰다는 명은 제자리에서 경계하라는 말이다. 완전히 풀어헤치고 쉬라는 말이 아니다.
앉은 자리에서 사방을 경계한다.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있는 자들은 즉시 땅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쵸 디엔이 경계를 서라고 했지만,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있을 필요는 없다.
잠은 잘 수 있을 때 자둔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둔다.
토족은 이동 중에 자거나 먹는 시간을 특별히 내주지 않는다.
‘들어왔어. 족장님과 전사들의 죽음…… 피는 피로!’
쵸 디엔은 눈빛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