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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511화 (511/600)

第百三章 남해혈도(南海血濤) (1)

[남쪽 바다, 핏빛 물결]

인시정(寅時正: 04시), 이른 새벽이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도 한 시진이나 남았다.

노가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정갈하게 갈아입었다.

천하제일도, 일홀문주와 비무를 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앞으로 두 시진…….’

비무 시간은 사시정이다. 딱 두 시진이 남았다. 새벽 연공을 하고, 목욕을 마치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후에 차를 마시면서 기다릴 생각이다.

‘내가 일홀도와 겨룰 줄이야. 후후!’

노가주는 적잖게 긴장했다.

일홀도,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숨이 막힌다.

일홀문주의 칼은 살도(殺刀)다. 항상 끈적끈적하게 피가 묻어 있는 혈도다.

역대 일홀문주는 늘 사지를 걸었다.

천하제일도라는 무명을 얻은 것과는 상관없이 항상 사지만 밟고 다녔다.

더 강한 자, 더 강한 자!

계속 강한 자만 쫓아다니다 보면 결국은 죽게 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천하제일인이 될 수는 없다.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항상 상성이 존재한다.

아니, 허도기는 이십여 년 동안이나 천하제일인으로 불리고 있다.

천하제일인은 존재하나? 어쩌면 일홀문주가 꿈꾸던 것은 그러한 절대 칼일까?

철컥!

노가주는 뇌전도(雷電刀)를 집어 들었다.

젊은 날, 삼 년에 걸쳐서 만든 칼인데…… 요즘은 거의 손에서 놓고 지냈다.

‘그러고 보니 새벽 연공을 한 지도 오래되었군.’

사실, 노가주는 연공이 필요하지 않았다. 뇌정도법은 이미 능숙해질 때로 능숙해져 있다. 굳이 연공을 하지 않아도 언제 어느 때든 펼쳐낼 수 있다.

초식을 연마하는 시간보다는 연구하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오늘은 특별한 날인 만큼 오랜만에 새벽 연공을 해본다. 뇌정도법 구식 이십육 초를 처음부터 끝까지 느리게 펼쳐볼 참이다. 감각도 새롭게 일깨울 겸.

스륵!

노가주는 새벽 달빛을 받으며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때, 담장 위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달이 참 밝습니다.”

노가주는 깜짝 놀라서 담장 위를 쳐다봤다.

방 안에 있을 때도,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렸을 때도 담장 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낯선 자가 침입했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누군가?”

노가주가 차분히 물었다.

누구이기에 이토록 기척을 완벽히 숨길 수가 있나.

중원에 동영 살수들이 날뛴다더니 혹시 그들인가? 대만도 앞바다에 범선 이백여 척이 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데…… 그들이 드디어 움직인 것인가?

노가주의 미간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쉬잇!

가벼운 바람 소리와 함께 담장 위에 앉아 있던 자가 앞마당으로 내려섰다.

‘고수!’

노가주는 상대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봤다.

사내의 경공이 매우 편안하다. 특별히 뛰어나거나 날카롭지는 않다. 높은 담장 위에 올라선 아이가 훌쩍 뛰어내리듯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동작이다.

주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움직임?

다만 무척 가볍다. 땅을 딛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를 숨기지 않았다면 살수의 움직임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범함을 평범한 모습 속에 감췄다.

저벅! 저벅!

사내가 걸어왔다.

노가주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지만, 결전 준비도 하지 않았다.

사내에게서 악의가 엿보이지 않았다. 살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무인이라면 거의 감추지 못하는 예기(銳氣)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경계심조차도 누그러트리게 만든다.

싸우러 온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누구신가?”

노가주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다시 물었다.

“일홀문주라고 합니다.”

아걸이 태연히 말했다.

“일홀문주? 비무는 사시에 벌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가주님께서는 비무 시간 같은 게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 찾아왔는데, 잘못 왔나요?”

‘무인이라면 약속을 지켜야지!’

노가주는 금방이라도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꾹 눌러 삼켰다.

비무 시간? 중요한가?

사실, 노가주에게는 비무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 지금 겨루나 나중에 겨루나 매한가지다. 정작 비무 시간이 중요한 쪽은 소무정가 가문이다.

가문에서는 이번 비무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일홀문주와의 비무를 발판으로 삼아서 비약적인 도약을 할 생각이다.

지금 겨룬다면 무인끼리 무공을 비교한다는 의미 외에 다른 것을 취할 수 없다.

“뇌정도법을 볼 수 있겠습니까?”

아걸이 정중하게 요청했다.

“보여주지 않아도 볼 생각이지 않나?”

노가주가 칼을 잡으며 말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걸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보여주기 싫으시다면 돌아갈 생각입니다. 어차피 비무 시간은 사시니까.”

“약속 시각을 어기고 일찍 온 이유라도 있나?”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잠이 오지 않아서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마부 역할을 해주는 친구와 산 밑에서 야숙을 하던 중인데…… 어쩌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네요.”

아걸이 씩 웃었다.

“돌아갔다가 정해진 시간에 와달라고 하면 와줄 텐가?”

노가주가 일방적으로 해도 될 말을 의견을 묻듯이 물었다.

노가주는 아걸과 마주 섰다. 일홀문주와 정면으로 마주 서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노가주는 아걸이 풍기는 예기를 감지했다.

겉으로 흘러나오지 않는, 속에 깊이 감춰진 진정한 칼의 기운을 몸소 느꼈다.

칼! 칼! 칼!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칼이 세워진다.

분기도강(分氣刀剛), 칼로 만들어 낸 강벽이 거대한 철벽이 되어서 세워졌다.

원래 분기도강은 칼로 공격하는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칼은 한 자루인데, 네 자루 혹은 다섯 자루가 일시에 들이치는 것처럼 보인다. 한 자루를 제외한 나머지 칼은 환각이 만들어 낸 가짜 칼인가? 아니다. 허상일 경우에는 환도(幻刀)라고 한다. 분기도강으로 만들어낸 칼은 몇 자루가 되었든 모두 진도다.

칼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네 자루, 다섯 자루로 보인다. 칼의 속도가 빠른 만큼 모두가 진도나 다름없다.

그런데 아걸은 분기도강을 칼을 뽑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낸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칼을 뽑은 것이다. 노가주, 자신을 향해 겨눈 것이다.

척! 척척척! 척!

칼 다섯 자루가 노가주를 향해 곧추세워졌다.

아걸은 한 사람이 아니다. 아걸이 진실로 칼을 뽑아서 분기도강을 펼쳐낸다면 아걸 같은 무인 다섯 명과 싸워야 한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노가주는 아걸의 실체를 봤다. 그래서 다시 올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아걸 역시 자신의 실체를 봤을 테니까. 굳이 비무를 하지 않아도 될 상대라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

노가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몇 초나 버틸 수 있을까?’

평생 칼밥을 먹으면서 살아왔지만, 칼을 뽑기도 전에 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정말로 아걸에게 몇 초나 받아낼 수 있는지도 궁금해졌다.

아걸이 말했다.

“다시 오라고 하시면 사시에 다시 오겠습니다.”

“다시 온다고?”

“약속을 어긴 건 저라서…….”

“왜?”

“……?”

“왜 비무를 하려고 하나?”

노가주가 물었다.

상대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비무를 하겠다는 의도가 궁금했다. 혹시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주려고? 아니다. 그러면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 시간에 나타날 리가 없다.

“내 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비무를 청했습니다. 노가주님 칼은 복건 제일이라서.”

“하하하하!”

노가주가 웃었다.

아걸은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될 줄 알면서도 찾아왔다.

방금 뭐라고 말했나? 노가주의 칼을 복건 제일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천하제일도라는 말을 들으면서. 뇌정도법을 중원 오대 도법이라고 말해도 무방한데, 겨우 복건 제일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칭찬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노가주에게는 무시하는 말로 들린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일홀문주이니 받아들일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자들과 싸워왔기에 뇌정도법을 겨우 복건 제일 정도로만 여기나.

스릉!

노가주가 칼을 뽑았다.

“비무 시간보다 다소 빠르지만 상관없겠지. 뇌정도법을 펼치겠네. 최선을 다해서.”

“그래 주시겠습니까?”

아걸이 허리춤에서 쇠뭉치나 다름없는 뭉툭한 칼을 뽑아 들었다.

놀리는 건가?

반철도를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아걸이 걸어온 발자취를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저 볼품없는 칼이 참 많은 고수를 꺾었다. 저 칼로 천하제일인 허도기와 싸워서 견뎌냈다.

원래 저런 칼을 쓰는 것일 뿐이다. 상대를 무시해서 일부러 날이 무딘 칼을 들고 온 것은 아니다.

“타앗!”

노가주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선공이다.

노가주 정도 되면 무림 원로로 추앙받는다.

그런 사람이 선기를 잡기 위해 먼저 신형을 띄웠다. 그만큼 아걸이 풍기는 기도는 묵직했다. 선기를 취하지 않으면 그나마 몇 초라도 받아내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섬뢰명(電閃雷鳴)!”

쩌렁! 일갈이 터졌다.

노가주가 일갈을 터트리기 전에 뇌전도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르르릉!

뇌전도가 공기를 찢는다. 번개가 내리치듯이 공기를 꽈지직 태우면서 내리꽂힌다.

번쩍!

섬광이 번쩍 빛났다.

아걸은 무심히 손을 휘둘렀다.

언뜻 보면 벼락처럼 떨어지는 칼날을 어떻게 상대할지 몰라서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반철도는 정확하게 뇌전도가 가는 길을 막아섰다.

까앙! 깡!

칼과 칼이 부딪쳤다.

“섬광작소(閃光灼燒)!”

노가주가 벼락같이 뇌전도를 비틀어서 변화시켰다. 진기가 가일층 보태졌다.

반철도에 가로막힌 칼이 빙글 휘돌았다.

뇌전도는 반철도를 말아 감으면서 위로 쳐올렸다. 그리고 자신은 칼 밑으로 파고들면서 오른쪽 옆구리를 강타했다. 뇌전도가 옆구리 살을 태워버릴 듯이 달려들었다. 한데,

꾸욱!

위로 쳐들려야 할 반철도가 오히려 노가주의 칼을 짓눌렀다.

‘밀리지 않았다!’

힘에서, 진기에서, 내공에서 밀리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쳐올리는 힘이 오히려 내리누르는 힘에 말려들었다. 오히려 뇌전도가 밑으로 깔렸다.

이런 경우는 둘 중에 하나다. 처음부터 칼을 밑으로 내리누르겠다고 작심한 상태에서 칼을 받아냈거나 아니면 아걸의 진기가 노가주보다 훨씬 앞서거나. 어느 정도 앞서는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고, 항우장사가 어린애와 팔씨름하는 정도로 힘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 것이라면 설명된다.

노가주는 뇌전도가 밑으로 눌리는 순간, 섬광작소가 소멸하면서 가슴이 환히 벌어지는 것을 느꼈다.

칼을 든 손이 밑으로 떨어지자 상반신이 열렸다.

끝이다. 반철도는 가슴을 공격해 올 것이다.

‘이렇게 쉽게…….’

순간, 아걸은 공격하지 않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힘에서 졌어.’

노가주는 미간을 찡그렸다.

도법에서 눌린 것이 아니다. 아걸의 진기가 이토록 강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칼로 칼을 쳐올리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력이 강하군.”

“풋!”

아걸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곧 정색하며 말했다.

“아! 제가 실수했습니다. 가주님을 비웃으려고 웃은 것은 아닙니다. 바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수가 장문을 보지 못했다.’ 그런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이 일어나죠.”

“내가 잘못 본 거라도……?”

“제 내공이 녹선마황이라는 영물의 도움을 받아서 특별히 강해진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노가주님을 능가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습니다. 가주님이 장문을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장문을…….”

“한 번 더 해도 되겠습니까?”

스읏!

아걸이 반철도를 들어 올렸다.

노가주에게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오히려 다시 한번 해보자고 자신이 청할 판이다.

스읏!

노가주는 즉시 뇌전도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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