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三章 남해혈도(南海血濤) (3)
망념자가 무인자를 둘러매고 들어섰다.
도흔갑자가 제 역할을 했다. 두 명은 죽었고, 두 명은 충실히 시신을 가져왔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었다고?”
“네.”
망념자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무인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미친개처럼 와락 달려들었다가 단매에 격타당했다.
무인자를 단 일 초 만에 죽일 수 있는 자!
“후후! 몸에 달라붙는 것을 불허하는 자군. 칼의 살상범위가 넓거나 방어막이 조밀하거나. 볼까?”
두주가 허리를 숙여 죽은 자들을 살폈다.
잔형고에 칼자국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잔형고를 베고 들어가서 살을 갈라냈다.
베인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며 잔형고를 물들였다.
얼핏 봐서는 핏자국밖에 보이지 않는다. 잘린 살점만 보일 뿐, 잔형고는 보이지 않는다.
잔형고 자체가 고수 아니면 판독이 불가하다.
“음!”
두주는 침음했다.
검이 들어가고 나간 자리가 구분되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그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그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잔형고는 미세한 시차까지도 그려준다.
칼을 반듯하게 잡고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면 칼이 처음 닿는 곳과 최종적으로 닿은 곳에 차이가 생긴다. 색깔이 완전히 달라서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런데 무인자는 어떠한 시차도 보여주지 않는다.
칼이 들어간 곳과 나온 곳, 처음 닿은 곳과 가장 깊게 닿은 곳에 선후가 없다.
‘단 일순에 그어졌다!’
대단한 칼일 줄은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 역시 대단한 칼이다. 동영제일검을 베라고 보낼 만한 자격이 있다.
“후후! 이런 자나 되니까 내게 보냈겠지.”
두주가 웃었다.
죽은 무인자를 보니 투지가 들끓는다. 오랜만에 검에 대한 흥미가 일어난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공포.
이런 감정을 느껴본 지가 얼마 만인가.
“삶이 전혀 담기지 않은 칼이다. 이 칼은 우리 유음류의 어떤 검보다도 비정하고 차. 그렇다고 살수도도 아니고…… 묘한 칼이군. 중원에도 이런 칼이 있었나?”
“일홀도라고 합니다.”
적면이 대답했다.
“일홀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토록 차가운 칼이 있었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
적면은 일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두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칼은 어느 칼이든 비정하다. 어느 칼이든 차다. 칼치고 비정하지 않은 칼은 없다.
중원에 절정검이라고 있다. 정(情)을 죽여버리고 오직 차가운 마음으로만 펼쳐내는 검을 말한다. 절정검의 요체는 검사의 마음을 죽이는 데 있다.
그러면 절정검을 써야만 비정한 칼을 쓰는 게 되나? 아니다. 어느 칼이든 목숨을 해치면 비정한 칼이 된다. 마지못해서 칼을 쓰든 무심히 베든 마찬가지다.
칼 자체는 무조건 비정하다.
병기를 쓰는 무인의 마음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것은 있다. 살려줄 생각이 티끌만치도 없는 상태에서 거침없이 죽일 때, 비정하다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 것을 말하는가?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두주가 말한 것은 그런 뻔한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닐 것이다. 분명히 적면이 알지 못하는 다른 비정함을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비정함을 본 것일까?
동영에는 검심(劍心)이라는 말이라는 말이 있다.
- 검심이 고요해야 한다.
- 검심이 따뜻해야 한다.
- 태풍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검심을 가져야 한다.
검에도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이나 하수는 이해하지 못할 말이다. 검사는 살려줄 마음이 있는데 칼 자체가 그럴 마음이 없다. 그래서 검사를 누르고 가차 없이 벤다.
칼이 마음을 갖는다.
대다수 사람이 무슨 헛소리냐며 웃어넘길 말이지만 유음류에서는 검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두주는 그런 부분에서 아걸의 칼이 비정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걸의 칼이 어느 정도나 비정하기에 두주가 이토록 놀라는 것일까?
적면이 아는 가장 비정한 칼은 두주의 검이다.
두주의 검은 너무 차서 소름이 끼친다. 서슬 퍼런 장검이 당장 목을 베어낼 것 같다. 그래서 도저히 공격해 들어갈 수가 없다.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진다.
분명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칼, 가장 비정한 칼은 두주가 지녔다.
두주가 말했다.
“오면 모셔라. 정중하게. 가로막는 자는 모두 죽는다. 이 사실을 명심해. 모두 죽는다. 장군들에게도 물러서라고 말하고. 명심해라. 어떤 짓도 하지 말고 내게 모셔와라.”
“합!”
적면이 굳세게 대답했다.
두주는 적면이 물러간 후에도 무인자의 시신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도흔을 충분히 볼 만큼 봤는데도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흔은 보면 뵐수록 절묘하다.
극한의 빠름, 섬전 같은 공격을 펼치면 병기에서 열이 발생한다. 쇠와 공기가 마찰하면서 열기가 일어난다. 검속이 빠르면 빠를수록 열기도 진해진다.
칼을 쓰는 무인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빠르게 병기를 휘두르면 반드시 열기가 일어난다.
그런데 사흔에는 열기가 담겨 있지 않다.
무인자의 사흔을 몇 번이고 살펴봤지만, 베이기만 했을 뿐 타지 않았다.
칼에서 일어난 열기가 사흔에 묻어 있지 않다.
그가 아걸의 칼이 차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마음은 비정했고, 칼은 찼다.
무인자가 고수였다면 분명히 섬뜩한 공포심을 느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무인자는 아걸의 칼을 볼 만큼 대단한 고수가 아니었다. 칼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공포도 느끼지 못한 채 단숨에 절명했다.
무인자에게는 가장 편한 죽음이다.
적면은 아직 이런 점을 보지 못한다. 유음류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수하이고, 유음류를 이끌 재목인 것은 분명하지만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자신이 죽고 적면이 유음류를 이끌게 되면 유음류는 분명히 분열될 것이다.
“중원제일도. 중원제일도. 후후! 중원제일도…….”
두주는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아걸은 틀림없이 중원제일도다.
어떻게 이런 칼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섬전 같은 빠름을 유지하면서도 차가움을 유지할까?
두주는 이토록 차가운 칼을 쓰지 못한다. 오히려 정반대다. 두주가 쓰는 검은 너무 빨라서 불로 지지는 듯한 탄흔이 남는다. 검신보다는 검첨에 닿은 부분이 더 심하게 탄다.
두주가 알기로는 허도기의 검도 그렇다.
탄흔과 무흔 중에 어떤 것이 더 좋은가, 더 강한가 하는 질문은 어리석은 물음이다.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물음이다. 탄흔이 더 빠를 수도 있고, 무흔이 빠를 수도 있다.
이것은 순전히 칼의 성질에 따라서 달라진다. 속도에는 하등 차이가 없다.
아걸의 칼은 두주도 처음 보는 칼이다.
허도기와는 같은 칼로 상대했다. 같은 칼을 써서 반 초 차이로 패했다.
아걸은 전혀 다른 칼을 갖고 온다.
“후후후!”
두주는 가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흥분으로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상한 칼을 가진 놈이 온다.
“어디…… 구경이나 해보자. 어떤 칼인지.”
두주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로 심상 수련에 들어갔다.
쒜에에엑!
아걸이 칼을 쳐온다.
무인자의 몸에 새겨진 칼이 자신을 베어온다. 자신은 검을 들어서 반격한다.
따앙! 땅!
검과 칼이 부딪쳤다.
반철도는 멀쩡한데, 검이 부러졌다. 무흔을 일으키는 빠른 칼과 탄흔 새기는 검이 만났다. 그러자 병기를 만든 철도 서로 간의 우열을 가리고자 한다.
그 결과, 검이 졌다.
‘이번 싸움에서는 천월도(穿月刀)를 써야겠군.’
두주는 첫 번째 심상 수련으로 병기를 선택했다.
천월도라고 해서 중원의 월도처럼 무거운 장병(長兵)은 아니다. 달빛처럼 차갑고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풍긴다고 해서 천월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천월도는 현음한철(玄陰寒鐵)로 만들었다.
같은 장검이라도 두부 베듯이 베어버린다. 사람 뼈도 걸림 없이 잘라버린다.
두주가 가지고 있는 도검 중에 가장 차가운 칼이다.
또한, 천월도는 직도(直刀)가 아니라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환도(還刀)다. 검의 특성과 칼의 특성을 고루 갖췄고, 무엇보다도 검속을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다.
아걸의 반철도와 싸우기에는 더없이 적합하다.
* * *
허도기는 온종일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일도 잦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인을 안고 시시덕거리기도 했다.
중원에서 보던 진중한 공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대망은 잊어버리고 오로지 향락에 정신이 팔린 파락호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령은 허도기 앞으로 걸어가서 두 손 모아 읍했다.
“응? 오랜만이네? 뭐야?”
허도기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사령을 쳐다봤다.
허도기는 오늘도 술에 취했다. 여인 둘이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나삼을 입은 채 허도기 시중을 들었다.
“아걸이 남해로 가고 있습니다.”
“그건 전에 보고했잖아?”
허도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을지.”
“왜? 뭐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
“아니요. 없습니다.”
“이봐, 사령. 지금 뭔가 안 풀리는 게 있지?”
허도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사령을 쳐다봤다.
“솔직히 이해할 수 없어서…… 아걸과 두주가 만나면 아걸이 집니다. 싸움의 결과가 빤히 보이는데…… 왜 아걸을 두주에게 보냈는지. 대장군의 속셈을 알 수 없어서.”
“어! 그래? 사령은 두주 편인가?”
“두주는 공부께 겨우 반 초 차이로 패한 고수입니다. 반 초 차의 승부란 언제든 뒤집을 수 있는 것, 실질적으로는 공부와 비등한 무인이라고 봐야겠죠. 공부께서 유일하게 승부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대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아니. 난 자신 있는데?”
허도기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네.”
사령이 대답했다.
무인은 누구든 자신의 승리를 자신한다. 허도기 같은 천하제일검은 특히 그렇다. 누구에게든 승부를 양보하지 않는다.
“어쨌든 제 생각에는 두주가 이길 것 같습니다.”
“아걸을 너무 얕잡아 보네. 아걸은 내 손에서 네 번이나 빠져나갔어. 그건 셈하지 않나?”
“그건 순전히 운으로…….”
“오늘따라 사령답지 않은 말을 하네? 운이라니? 그게 사령 입에서 나올 소린가? 내 검에 운을 갖다 붙일 수가 있나? 하하! 그럼 사령 운은 어떤지 볼까?”
허도기가 사령을 지긋이 쳐다봤다.
사령은 움찔거렸다.
허도기의 검은 쾌속이다. 달리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검이 검집에서 뽑혔다가 다시 들어가면 끝이다. 그 순간을 본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 그만큼 빠르다.
단지 검을 뽑는 발검술로만 상대를 벤다.
이런 검에 운이 작용할 리 없다.
“음!”
사령은 침음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두주가 강하다는 쪽에 승부를 걸고 싶다. 아걸이 싸우는 모습을 많이 봤지만, 공부나 두주처럼 절대 철벽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됐어. 아걸과 두주는 부딪힐 거야. 사실 나도 궁금하긴 해. 누가 이길지. 결과가 나오면 바로 알려주고…… 다른 일은?”
“없습니다.”
“없어?”
“네. 아직은…….”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느닷없이 허도기가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천하를 울리는 듯했다. 정말 통쾌한 듯 허리를 젖히면서 웃었다.
“대단해. 대단해. 정말 대단해. 하하하하! 이봐, 사령. 이 세상에는 말이야. 무시하지 못할 검이 또 한 자루 있어. 모두 그 검을 보지 못하고 있네. 하하하하!”
허도기가 연신 웃었다.
사령은 허도기가 말한 검이 어떤 검인지 알지 못했다.
세상에는 또 한 자루의 검이 있다? 허도기와 두주에게 필적하는 검을 말한다.
그만한 검이 있었나? 누구냐? 누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냐?
몽설의 혈검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분명하다. 공부는 혈검을 한 수 아래로 여긴다. 아걸의 혈검이 아니라 혈해검신의 혈검조차도 무시한다.
‘누가 움직이지?’
사령의 머릿속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가 누군지.
“하하하하하! 하하하!
허도기 웃음소리가 크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