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514화 (514/600)

第百三章 남해혈도(南海血濤) (4)

적면은 두주의 눈빛에 스며 있는 경멸을 느낀다.

네놈도 검을 쓴다고 할 수 있느냐! 소위 검을 쓴다는 놈이 상대가 쓰는 칼도 분석하지 못해? 네놈은 딱 잔심부름 정도 하면 알맞아. 더는 나대지 마.

두주는 늘 적면을 경멸했다.

물론 두주는 따뜻한 말만 한다. 차가운 말을 하지 않는다. 주로 격려를 한다. 하지만 눈빛은 차갑다. 일을 시킬 때도 분명히 한계를 정해 놓는다. 적정한 선까지는 믿고 맡기지만 그 이상은 절대로 주지 않는다.

두주는 자신이 아니면 유음류를 이끌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두주라면 그럴 만하다. 동영제일검이라는 칭호는 아무나 받는 게 아니다.

두주와 맞서면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인다. 어제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사람도 적 편에 서면 당장 참살한다. 두주가 검을 뽑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기준은 적아(敵我)다.

적이면 뽑고, 아군이면 뽑지 않는다.

적면도 그런 사실을 잘 안다. 자신의 검이 두주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두주가 보내는 경멸의 눈빛도 묵묵히 감수한다.

‘지겹군.’

적면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두주가 자신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된다.

자신은 유음류의 적자가 아니라 방자이니 유음류를 맡길 수 없는 것일 거다.

적면은 원래 유음류 출신이 아니다. 유음류의 낙인을 찍기 전에 자강류(自彊流)의 낙인을 먼저 찍었다.

유음류가 자강류를 멸절시킬 때는 자강류 중음자(中陰者)로 유음류 음자를 스물한 명이나 베어 넘겼다. 대음(大陰)도 아닌 중음이 유음류 음자를 거침없이 베어 넘기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런 투지 덕분에 자강류가 멸절된 후에도 적면과 그를 따르는 여덟 명의 수하, 팔탈(八奪)은 살아남았다. 유음류의 낙인을 찍고 하음(下陰)으로 다시 시작했다.

하음, 중음, 대음을 거쳐서 부주(副主)까지…… 험난한 여정을 거치는 동안에도 유음류의 적자가 아니라는 꼬리표는 항상 따라다녔다. 어떤 일만 터지면 ‘유음류 낙인이 제대로 찍히지 않아서’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두주도 마찬가지다.

유음류에는 오대신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최절정 비공 폭천비류(爆天飛流)가 있다. 두주의 동영제일검이라는 칭호는 폭천비류에서 나왔다.

두주는 자신이 부주가 되었는데도 폭천비류를 전수하지 않고 있다.

유음류 전 음자에게 차기 두주는 적면이라고 공공연하게 선포하면서도 폭천비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전혀 전수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이제나저제나 전수해 줄 때만 고대했다.

두주는 본인 스스로 긴장을 느낄 정도로 강한 적과 마주쳤다. 자신은 충분히 누를 수 있는 자라고 봤는데, 두주는 허도기와 필적하는 자로 보고 있다. 어지간히 자신이 없는지 선실에 틀어박혀서 심상 수련을 하고 있다.

일종의 가상 대결이다.

정신 속에 결전장을 만들어 놓고 대결을 펼치는데, 적의 수준만 정확히 설정하면 상당히 정확하다고 한다. 물론 이것 역시 폭천비류 속의 공부다.

그만한 상대를 만났으면 만일을 염려해서라도 폭천비류를 언급해야 할 텐데.

두주는 폭천비류를 전수하지 않는다. 이 마당에서도 전수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입을 다물겠다는 소리다.

‘지겹네. 망연히 기다리는 것도 지겨워. 칼이 차갑지 그러면 따뜻할까. 칼이 비정하지 다정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칼은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 것이지, 거기서 무슨 온기를 찾고 정감을 찾아. 꼭 그렇게 유세를 떨어야 속이 시원한가.’

적면도 무인자의 시신을 살폈다.

아걸의 칼은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다. 너무 깨끗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하지만 깨지 못할 칼은 아니다.

적면은 아걸의 칼을 보는 관점이 두주와 다르다.

두주는 동영제일검이다. 그러니 당연히 무공으로 맞서 싸울 생각을 한다. 그럴 때, 아걸의 칼은 강해진다. 아주 무서운 칼이 되어서 들이닥친다.

적면은 유음류 방식대로 아걸의 칼을 본다.

유음류는 음자 집단이다. 음자는 웬만해서는 정면 대결을 취하지 않는다. 항시 암습을 가한다. 가장 타격하기 좋을 때를 골라서 공격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걸의 칼도 별것 아니다.

‘너무 오래 기다렸어. 지겨워.’

적면은 결단을 내렸다.

“팔탈.”

“합!”

자강류 음자 시절부터 자신을 쫓던 음자 여덟 명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바다는 두주의 영역이다. 하지만 중원은 누구의 영역도 아니야. 중원 땅에서 손님맞이를 해라.”

“합!”

여덟 명이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팔탈은 적면처럼 자강류 출신이다. 즉, 비주류 서자다. 그들이 기댈 사람은 적면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의 소망은 충족되었다. 수많은 음자를 제치고 부주의 직속 수하가 되었으니 어느 정도 소망은 이룬 셈이다.

“사귀(四鬼).”

“합!”

복면인 네 명이 머리를 숙였다.

이들은 유음류 음자다. 처음부터 유음류에 몸을 담았다. 하지만 적면에게 충성한다.

“팔탈 뒤를 받쳐라.”

“합!”

팔탈과 사귀는 적면의 의도를 명확히 읽었다.

아걸과 정면 대결을 펼치면 승산이 없다. 그런 싸움은 시키지 않는다. 아걸은 탕산에서 유음류 인자들을 척살했다. 목형술을 단박에 깼다. 그러니 오대신술로 싸우는 것도 불가하다.

팔탈과 사귀는 살법을 구분하지 않고 오직 죽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염정(艶貞).”

“네.”

복면인이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여인이다. 체구도 작다. 하지만 다른 자들과 똑같이 흑의를 입고, 복면을 썼다.

“팔탈과 사귀가 무너지면 내가 아걸을 맞이한다. 넌 내 뒤를 받쳐.”

“알겠습니다.”

여인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절했다.

“그럼 저희는!”

쉬잇! 쉿!

열두 명이 선실을 뛰쳐나갔다.

적면은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육지는 누구의 땅도 아니다. 저들이 육지에서 아걸을 맞이한다면 그것은 도주의 명을 어기는 게 아니다. 저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싸운 것일 뿐.

적면은 붓을 들었다.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썩은 무라도 베고 물러서야지. 안 그런가, 장군들.’

적면은 장군들에게 남기는 서신을 적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주의 명령을 충실히 적었다. 막아서면 죽을 테니까 물러서라는 명령까지 상세히 기술했다. 그리고 자신이 더는 두주의 명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팔탈과 사귀는 동영 인자들을 모두 빼내 간다.

그들은 부주의 수하다. 부주가 움직이면 아랫사람도 움직이는 게 당연하다.

배에는 두주만 남는다.

유음류가 전력을 다해서 막을 생각이다. 하지만 그래도 막지 못한다면…… 물러서는 게 낫지 않을까? 목숨이라고 구해서 돌아가려면 말이다.

적면은 긴 서신을 마쳤다.

“염정, 이것들을 돌려. 그리고 바로 따라와.”

“네.”

염정이 머리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 * *

“워워! 워!”

마부가 마차를 멈춰 세웠다.

오랜 여정이었다. 마부는 하루에 한두 시진만 잠을 잤다. 그리고 내처 달려왔다.

아걸은 마차 안에서 편히 쉬었다. 비록 덜컹거리기는 했지만, 침상에 곰 가죽을 넉 장이나 깔아놓아서 몸이 묻힐 지경이었다. 잠은 충분히 잤다.

마부가 정말 고생이 많았다.

쏟아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면서 치달리는 모습이 환히 보였다.

“이제 좀 쉴 수 있겠네?”

아걸이 말했다.

“저는 여기까지만 모시겠습니다. 부디 돌아가시는 길도 모실 수 있길 바랍니다.”

마부가 허리를 숙였다.

“돌아가는 길도? 그럼 갈 때도 날 태우고 가려고?”

“네. 그렇게 명 받았습니다.”

“혹시 여기 말고 다른 데도 들를 데가 있나?”

“그런 명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날 태우고 어디로 가려고? 황궁으로?”

“어디로 갈지는…….”

마부가 대답하지 못했다.

아걸이 동영에서 온 범선들을 처리하는 동안 다른 명령을 하달받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저는 여기 역참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 길을 오는 동안 마부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

마부의 직업은 마부가 아니다. 전보영 무인이다. 무공이 제법 깊은 것으로 보이니, 직접 말을 모는 하급 무인도 아니다. 상당히 높은 직위에 있는 무인이 틀림없다.

아걸은 그에 대해서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슬슬 관원과는 거리를 둘 생각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나. 무인은 무림에 적을 둬야 한다. 아직도 일홀도가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하다. 일홀도가 일홀사도인 것을 알았으니 죽는 순간까지 칼을 베고 잘 생각이다.

“그럼 난 이만.”

아걸이 마차에서 내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아걸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부가 뒷모습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정이 없어야 불의의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

‘수군도독 진일호.’

아걸은 만나야 할 사람을 떠올렸다.

파사해협으로 들이닥친 범선 이백 척에 대응해서 수군도독 진일호가 전선 삼백 척을 꾸려서 대기 중이다. 아걸이 밟고 있는 곳, 복주에 진영을 꾸렸다.

일단 그를 만난 후에 상황 설명을 듣고 대만도로 넘어간다.

복주에서 대만도까지는 큰 배를 타도 반나절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빠른 전선(戰船)을 타게 된다면 두 시진 정도면 충분할 것이고. 아마도 전선을 타게 되겠지만.

대만도로 가면 거기서 또다시 배를 타고 파사해협으로 간다.

두주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도독님 심부름을 왔습니다.”

낯선 자가 아걸 앞으로 와서 넙죽 인사했다.

사내는 평범한 사복을 입었다. 하지만 싸움에 익숙한 듯 체격이 건장하고 구릿빛으로 번들거린다. 두 눈에서는 형형한 안광을 쏘아내고 있다.

이럴 줄 알았다. 전보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하게 움직인다.

사실은 역참에서 인도자를 만날 줄 알았는데…… 아마도 저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멀리 가야 하나?”

“배를 타셔야 합니다. 이곳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전선에서 만나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셔서.”

아걸은 묵묵히 그를 따라갔다. 아니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우뚝 멈춰 섰다.

“사람을 데리고 왔나?”

사내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은밀히 마중하느라고 저 혼자…… 웃!”

아걸을 마중 나온 자가 급히 주위를 들어봤다.

이상한 기미를 느낀 것은 아니다. 아걸이 주위를 훑어보고 있으므로 반사적으로 돌아본 것이다.

“벌써 손님맞이가 시작됐나 보네.”

“아! 미행당할 것을 우려했는데…….”

사내가 탄식했다.

아니다. 저들은 사내를 뒤따라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습격이 너무 빠르다. 아마도 역참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급하게 달려온 마차가 역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바로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배가 어디 있는지 위치를 알려줘. 내가 찾아가야 할 것 같은데?”

“제삼 부두에 오시면 황돛을 단 배가 있습니다. 그게 저희 배입니다.”

“황돛을 단 배가 하나뿐인가?”

“네. 황돛은 아무나 달 수 없는 곳이라서.”

“그러면 쉽게 찾겠네.”

아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어느 정도나 기다려야 할지?”

“글쎄? 한 시진?”

“한 시진요? 그렇게나 오래 걸립니까? 도대체 몇 명이나 왔기에?”

사내가 다시 주위를 쓸어봤다.

사내는 기습자들을 전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하기는…… 상대는 동영 인자다. 전보영 무인들이 상대할 수 없는 자들이다. 괜히 옆에 있어봤자 거치적거리기만 한다. 사내를 보호하는 것도 일이 될 테니까.

“먼저 가지.”

사내도 아걸의 뜻을 알아챘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출항 준비를 마쳐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사내가 넙죽 인사하고는 급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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