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三章 남해혈도(南海血濤) (5)
아걸은 천천히 항구를 걸었다.
복주는 매우 큰 항구다. 남쪽 바다를 헤쳐온 배들이 복주에 닻을 내리고 있다.
대부분이 교역선이다.
당연히 복주는 세상에서 가장 활기찬 도읍이다. 복주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국인도 상당히 많이 오간다. 교역을 하기 위한 물자도 산처럼 쌓여 있다.
아걸은 주위를 살피다가 비교한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장소를 찾아냈다.
물건들을 쌓아놓은 창고 주변이 비교적 한산하다.
‘저기가 좋겠네.’
싸움을 치르더라도 사람이 없는 곳에서 싸우고자 한다.
동영 인자들은 암기를 주로 사용한다. 수리검이나 표창 같은 것은 기껏해야 서너 자루에 불과하지만 비침이라도 날리면 허공 가득히 죽음의 그물망이 씌워진다.
애꿎은 사람들이 암기에 당할 공산이 크다.
저벅! 저벅!
아걸은 저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차분히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쒜에에엑! 쒜에엑!
갑자기 등 뒤에서 허공을 찢는 바람 소리가 울렸다.
‘벌써!’
아걸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영문을 전혀 알 리 없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면서 일을 한다.
‘안 돼!’
아걸은 부지불식간 신형을 솟구쳤다. 허공 높이 뛰어오르면서 반철도를 휘둘렀다.
쒜에에엑! 타타타탁!
아걸은 날아오는 표창을 지붕 위로 떨어냈다.
밑으로 떨어지는 표창을 받아쳐서 다시 지붕 위로 올리자니 신경이 두 배로 쓰이지만, 기꺼이 감수했다.
허공을 찢는 소리는 역시 표창이 날아오는 소리였다. 아걸이 가뿐히 쳐낼 수 있는 양, 대여섯 개 정도밖에 날아들지 않았다. 많이 날아왔다면 곤란했을 텐데.
“휴우!”
아걸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토해냈다.
“엇! 뭐야?”
“싸, 싸움이다!”
그제가 싸움이 벌어진 사실을 알고 사람들이 분분히 움직여서 자리를 피했다.
일부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일부는 남의 집 처마 밑에 몸을 감춘 채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쳐다봤다.
한순간에 거리가 텅 비었다.
‘이놈들이 사람들 생각을 할 리 없지.’
저들의 목표는 자신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데, 왜 이런 공격을 했지?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면 결코 이런 허무한 공격은 하지 않을 텐데.
아걸에게 날아오는 표창 대여섯 자루를 막는 것은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쉬웠다.
스읏!
아걸은 표창이 날아온 곳을 주시했다.
물론 저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 없다. 표창을 던진 즉시 몸을 빼냈을 것이다.
동영의 오대신술이다.
지금 저들이 펼치는 것은 금형술(金形術)이다.
금형술이라고 하면 쇠로 무엇을 할 것 같지만, 사실은 인공 건축물을 의미한다.
금형술은 마을 안에서 싸울 때 적합하다.
사람이 지은 건축물은 은폐, 엄폐 장소로 더없이 좋다. 숨기도 좋고, 기습하기도 쉽다.
저들은 금형술로 집안에 스며들었다.
‘이건 목형술보다 더 찾기가 힘든데.’
아걸은 쓴웃음을 흘리면서 사방을 예의 주시했다.
사람이 있건 없건 무조건 공격을 퍼붓는다. 그러니 아예 사람 있는 곳으로 가면 안 된다.
‘역시 저쪽이 좋아.’
아걸은 처음 예정했던 대로 창고로 걸어갔다.
항구처럼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 싸움을 벌이면 많은 사상자가 나온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피해를 줄일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줄여야 한다. 무인의 숙명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곡예를 하는 것이니 수십 명이 죽어도 무방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병기를 든 자들이지 않나.
하지만, 민초들에게는 오직 사는 것만 주어진다. 죽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다. 죽을 위험이 있다고 하면 칼 근처에도 오지 않는다. 그러니 살게 해줘야 한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웃!”
아걸은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사, 살려주세요.”
“제가 죽으면 처자식이 굶어 죽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쇼.”
여기저기서 사정하는 소리가 들리며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는 듯 힘들게 움직인다. 아걸을 향해서 걸어온다.
한눈에 봐도 항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저들 중에는 힘센 장한도 있는데 대항할 생각조차 잃은 채 질질 밀려왔다.
아녀자도 있다. 노인도 있고 어린애도 있다.
아걸을 향해서 뚫린 길은 삼로(三路)다. 걸어가는 방향으로 길이 뚫려있고,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이 있다. 왼쪽은 드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음!”
아걸은 침음했다.
동영 인자들은 아걸을 철저하게 사람들 속에 가둘 생각이다.
‘이거 위험한데.’
사람들이 밀려오는 모습만 봐도 인상을 일그러졌다.
동영 인자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 것 같다. 저들의 목숨을 담보로 암기를 던진다. 암기에 맞던가, 저들이 죽는 것을 내버려 두라고 요구한다.
저들의 희생을 막자니 자신이 당한다.
먼저 던진 표창은 경고였다. 상대방의 여유라고나 할까? 앞으로 이런 표창을 던지겠다는 선전포고다.
대여섯 자루는 지붕 위로 쳐올렸지만 스무 자루, 서른 자루가 되어도 쳐올릴 수 있는지 보자는 거다. 네가 쳐올리지 못하면 사람들이 다치니까 최대한 움직여보라면서 웃는다.
‘이렇게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쉬이잇!
아걸은 창고 지붕 위로 신형을 솟구쳤다. 그리고 재빨리 지붕 위를 치달렸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건너뛰면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거리에서 벗어날 생각이다. 그때,
“아아악!”
“크악!”
갑자기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걸은 걸음을 멈추고 몰려오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중 일부가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이마에는 사각 표창이 머리뼈를 뚫은 채 박혀 있었다.
“크아악!”
이제야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아걸이 움직이면 사람이 죽는다. 신형을 더 빨리 움직이면 더 많은 비명이 쏟아진다.
“이런!”
아걸은 탄식을 쏟아내며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비로소 비명이 그쳤다. 대신 사람들이 더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
사람들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안다. 미적미적 움직이다가는 죽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도 알아버렸다. 아걸이 움직이기 전에 빨리 한가운데로 모여드는 것이 낫다.
억지로 떠밀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아걸을 가운데 두고 한자리에 모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기에 이런 행동을 취한다.
만약 아주 지독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몇 명 더 죽더라도 도주하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그것이 훨씬 살 기회가 많을 테니까.
아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가 되었다.
전혀 낯선 사람들도 인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될 수 있다. 이런 방법은 사마외도에게는 통하지 않는 전술이다. 하지만 분명히 아걸에게는 효과가 있다.
아걸의 두 발은 꽁꽁 묶였다.
‘이건 너무 비겁하잖아!’
아걸은 사방을 쏘아봤다.
동영 인자들이 숨은 곳을 찾아내야 한다. 그들을 베어야 인질들이 풀린다. 한데,
“웃!”
아걸은 너무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잊었다.
인질들 뒤로 복면인들이 쭉 늘어서 있다. 한두 명이 아니다. 한쪽 길에만 적어도 이십여 명은 훌쩍 넘는 자들이 사람들을 밀어붙이고 있다.
길은 모두 세 곳, 사람을 몰고 오는 데 육십 명 이상이 가담했다.
숨어서 암기를 날리는 자들까지 셈한다면 아무리 못 잡아도 일흔 명 이상이다.
쿡! 쿡!
복면인들은 인질들 뒤에서 검을 찔러댄다. 조금이라도 늦게 가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찌른다.
지금 저들은 검을 쓴다. 하지만 아걸이 움직이면 당장 암기로 바뀐다. 비수, 비표…… 온갖 암기를 쏟아낼 것이다.
일시에 일흔 명을 도륙하지 못하면 백 명 이상이 죽어 나갈 것으로 보인다.
“하!”
아걸은 반철도를 축 늘어트린 채 침음했다.
이것은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싸움 방식이다.
방법 하나!
민초들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복면인들을 공격한다.
민초는 죽어 나갈 것이다. 그래도 공격한다. 민초와 복면인들의 옷은 확연히 다르다. 흑의에 복면을 쓴 자만 가차 없이 벤다. 가장 빠르게.
이것이 첫 번째 방법이다.
방법 둘!
저항을 포기한다. 저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다.
이 세상에 남을 위해서 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죽임이 뻔한데?
더군다나 아걸은 혼자만의 몸이 아니다. 아걸은 황상의 명을 받고 남쪽에서 벌어진 전쟁을 저지하기 위해 왔다. 두주를 효과적으로 저지하기만 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
남쪽 바다에서는 전선 이백 척과 삼백 척이 대치 중이다.
대접전을 벌이기 직전이다. 만약 해전이 벌어지면 양쪽에서 최소한 오만 명 이상은 죽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으로 잡은 수치가 그렇다. 사상자를 최대한으로 추정하면 금방 십만 명이 넘어선다. 양쪽 합해서 십오만이 싸우는데 십만 명 정도는 죽지 않겠나. 더욱이 배가 가라앉으면 손을 쓰지 못하는 해전인데.
저들의 목숨이 아무리 소중하다 한들 십만 명과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십만 명의 목숨은 아직 건재하다. 그들의 죽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에 저들은 지금 당장 죽어간다.
두 번째 방법은 선택하기가 무척 어렵다.
머리로는 두 번째 방법이 타당한데,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은 불가하다.
세 번째 방법도 있다.
저들이 죽어가는 것을 못 본 척 버려두고 도주하는 거다.
첫 번째 방법과 뭐가 다르냐고? 다르다. 도주로는 창고 지붕만 있는 게 아니다. 눈앞에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닷속으로 첨벙 뛰어들면 그때는 저들도 손을 쓰지 못한다.
저들이 민초를 죽이는 목적은 아걸을 잡아놓기 위해서다. 아걸이 없으면 죽일 이유가 없다. 이미 도주해서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되어서 죽이지 않을 것이다.
바다로 뛰어든 자가 어떻게 돌아오나.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물 위로 머리를 내밀면 안 된다. 그러면 보란 듯이 민초를 죽일 것이다.
물속에 몸을 잠그고 최대한 잠영으로 헤쳐나간다.
이것이 최선, 세 번째 방법이다.
자신이 사라진 후에, 저들이 민초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있다. 그런 것까지 어쩌겠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세 번째 방법이 최선일 것 같다.
아걸은 생각을 굳히기 무섭게 즉시 신형을 쏘아냈다.
쒜에에엑!
“크아악!”
“아악!”
아걸이 신형을 쏘아내기 무섭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복면인들이 민초를 죽이고 있다. 하지만 아걸은 이미 창고 지붕 위에서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즉시 드넓은 바닷물을 향해 첨벙 뛰어들었다.
거센 물살이 아걸을 뒤덮었다.
“앗!”
“이런!”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동영 인자도 아걸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듯하다.
“만수압정(萬獸押釘)!”
인자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을 몰고 오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바닷가로 달려와서 암기를 꺼내 들었다.
아걸이 바다 위로 고개만 내밀면 암기를 던질 참이다.
복면인들에게 밀려오던 사람들은 즉각 뿔뿔이 흩어졌다. 감시가 떨어지는 즉시 도주했다.
당연하지 않나. 누가 이런 기회를 놓치나.
동영 인자도 도주하는 사람들은 쳐다보지 않았다. 두 눈 부릅뜨고 바다만 쳐다봤다.
“그만둬. 벌써 도주했어.”
묵직한 음성이 울렸다.
동영 인자들 뒤로 팔탈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바다를 쳐다봤다.
바다는 무심하다. 아걸은 이미 잠영을 써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기가 막힌 놈이군. 바다를 찾아내다니.”
“우리 실수지. 이게 다른 도읍이었다면 통했을 텐데. 바다 옆에서 펼치면 이런 일이 생기네.”
“빨리 놈을 찾아.”
팔탈 중 한 명이 즉시 전서구를 꺼냈다.
복주에는 야천 파락호들이 잔뜩 퍼져 있다. 그들은 마유 마인들의 지시를 받는다. 그리고 보고한다.
야천 파락호들은 자신들의 보고가 마유 마인을 통해서 동형 인자들에게 흘러 들어간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다. 만약 자신들이 수집한 정보가 동영 인자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눈에 불을 켜고 정보를 수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이민족은 싫을 테니까.
팔탈이 띄운 전서구가 마유 마인을 향해서 훨훨 날아갔다.
저들은 아걸이 어느 땅으로 올라서든 즉시 찾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