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四章 시산혈해(屍山血海) (1)
아걸은 뭍으로 나가지 않았다. 몸에 힘을 풀고 바닷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철썩! 철썩!
바닷물이 얼굴을 때렸다.
하늘은 시퍼렇다. 물살은 차다. 하지만 아걸의 두 눈을 뜨겁게 달아올랐다.
몽설에게 동영 인자의 오대신술을 들었을 때는 그런 무공을 쓰는 살수도 있구나 싶었다.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은신술에 치중한 살수 문파이니까.
아걸 주위에는 늘 살수가 득실거렸다.
취화원은 뒤에 만났고, 그 전에 적랑대가 있었다. 취화원에 무너진 귀문도 몽설을 알기 전부터 알았다. 서리형개 사형이 뒤에 있는데 모를 리 없다.
살수를 참 많이 접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동영 인자들의 살법을 들었을 때도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중원에서도 상당히 통할 것 같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 느낌은 탕산 싸움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탕산 싸움에서 저들은 최선을 다했다. 아걸의 이목을 숙이고 곤궁에 빠뜨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탕산 싸움은 자신의 승리로 끝났지만, 초반에는 저들이 확실히 우세했다. 자신은 저들이 펼친 목형술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그때도 은신술 하나는 기가 막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동영 인자들의 살법을 명확히 알았다.
목적을 위해서 민초를 죽이는 살수는 없다. 적어도 중원에는 없다. 이토록 무지막지하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법을 전개하는 살수는 본 적이 없다.
물론 중원에도 잔인한 살수는 있다. 원하는 자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처자식을 이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부모 형제를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 일가족에 국한된다. 이들처럼 전혀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인질로 이용하는 경우는 없다. 도대체 누가 이런 생각을 할 수나 있을까.
이 바다…… 남해를 핏물로 적시기 싫었다.
자신은 나라의 녹을 먹지 않는다. 장군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전혀 없다. 몽설이 호황위 군주를 맡고 있어서 황상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다.
그런 인연도 없었다면 황상과 자신이 어떤 사이든 상관없이 이번 싸움에서 빠졌을 것이다.
애초에 관부와 연계를 맺는 것도 꺼렸다.
허도기가 공부라는 위치에 있지만 않았어도, 성검문주로 계속 있었다면 결코 관부와 엮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허도기의 야망이 자신까지 무림을 벗어나게 만든 셈이다.
하지만 이 싸움을 맡으면서 나름대로는 희망을 품었다. 두주와 자신, 단둘만의 싸움으로 이 전쟁이 막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들은 그런 식으로 싸움을 종식할 생각이 없다. 저들이 바라는 것은 피다. 살육이다.
‘할 수 없지. 이 싸움은 너희들이 먼저 시작한 거야.’
아걸은 이를 꽉 깨물었다.
정말 처절한 싸움을 많이 겪었다. 그중에서 치가 떨리도록 처절했던 싸움이라면 혈도비자의 무명을 얻어준 진평 싸움일 것이다. 그 싸움으로 대산방이 무너졌다.
토족 칠백 명을 죽인 싸움도 처절했다.
토족과의 싸움은 은거무인과 함께했지만, 손에 묻은 게 땀인지 핏물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었다. 입으로 흘러든 것이 핏물이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이번에는 그것보다 더 잔인한 싸움이 될지 모르겠다.
첨벙!
아걸은 몸을 돌렸다.
생각이 정해졌다. 그러니 뭍을 향해서 헤엄쳐간다.
철퍽! 철퍽!
아걸은 바다를 헤엄쳐서 뭍에 올라섰다.
항구 옆에 있는 조그만 해변이다. 거친 모래가 깔려 있어서 해수욕을 즐길 수는 없다. 한쪽에는 마을 주민들이 쓰는 어선이 몇 척 묶여 있다.
스읏!
아걸은 해변으로 올라섰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날아들었다.
스스스스슷!
검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은밀한 검기만 매우 조용히 다가와서 몸을 저민다.
하지만 아걸은 그런 움직임에서도 날카로운 파공음을 들었다. 귀로 들은 소리가 아니다. 느낌으로, 직감으로, 그리고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칼로 들었다.
파앗!
토형술, 검기가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
땅속에 숨어있다가 뛰쳐나오려면 약간의 체공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 허공에 기류를 만든다. 누군가가 습격해 오는 곳으로 착각하고 사위를 경계할 때, 정작 검은 땅 밑에서 솟구쳐 올라온다.
더욱이 해변은 굵은 모래로 깔려 있다. 숨어있기 딱 좋다.
척!
아걸은 반철도를 꺼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해변을 향해 후려갈겼다.
파파팟! 파파파팍!
순식간에 오도(五刀)가 터졌다.
서리가헌 사형이 쓰던 일탄십검이 선공(先攻)으로 터지고, 이문주의 목도일참이 후공으로 뒷받침했다. 일탄십검에 쓰러진 자가 두 명, 목도일참에 베인 자가 세 명이다.
푸아악!
해변에서 핏물이 솟구쳐 올라왔다. 여기저기, 다섯 군데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동영 인자들은 토형술을 풀지 못한 채 죽었다.
츠읏!
아걸은 즉시 신법을 펼쳐서 몸을 감췄다.
취화원의 암영검이다.
아걸은 취화원 살수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거의 매일 보았다. 암영검이 전개되는 과정, 흐름, 진기의 집중점을 모두 안다. 수련만 하지 않았지 이미 알고 있는 무공이나 다름없다.
아걸이 펼친 암영검은 절정 수준이다.
모습이 잠깐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숨어서 움직인다. 또다시 민초들이 인질로 잡혀서는 곤란하다. 그러니 자신이 어디 있는지 저들이 몰라야 한다. 항구는 넓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따라잡지 못한다.
‘일흔 명. 예슨 명은 확실하고 열 명은 덤.”
아걸은 암영검을 펼치면서 어둠을 골라서 움직였다.
오늘, 사냥이 시작된다. 인간 사냥이.
퍼억! 퍽퍽! 퍽!
금형술이 깨졌다.
금형술을 사용하면 요소요소에 숨을 수 있다. 기와 밑에도 숨을 수도 있고, 벽틈으로 스며들 수도 있다. 사람의 머리로는 상상되지 않는 곳에 숨는다.
금형술은 목형술처럼 특별한 위장포도 필요하지 않다. 인간이 만든 건축물을 원형 그대로 이용한다. 토형술처럼 땅속으로 파고들지도 않는다. 위험이 닥치면 즉시 반격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아걸의 칼은 피하지 못했다.
‘너무 빨라!’
아걸에게 당한 사람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
칼이 너무 빠르다. 아걸은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는 반철도를 뽑지 않았다. 허리춤에 찬 상태로 무심히 걸어왔다. 누군가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아걸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금형술을 풀고 공격을 취할 때, 미친 칼이 번쩍 터졌다. 언제 어디로 흘러왔는지 모를 칼이 몸을 썰었다.
처마 밑에 숨어있던 자는 처마와 함께 잘려 나갔다. 대들보 위에 숨어있던 자도 대들보와 함께 썰려버렸다.
상당히 파괴적인 패도(覇刀)다.
벽틈에 은신한 자는 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칼날에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팔이 들어올 수 없는 각도라고 여겼는데, 불쑥 반철도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패도가 아니었다. 무리한 힘을 사용하지 않고 세심한 세기(細技)를 사용했다.
아걸의 칼은 자유자재로 변한다.
힘을 쓸 때는 강력한 패도가 되고, 변화를 요구할 때는 연검처럼 부드럽게 흐른다.
칼 귀신, 도귀다. 중원제일도라는 명성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푹! 퍽! 털썩!
또다시 다섯 명이 쓰러졌다.
동영 인자는 다섯 명이 한 조로 해서 움직이는 것 같다. 늘 한 곳에 다섯 명씩 뭉쳐 있다.
아걸은 사 조 스무 명을 참살했다.
이들이 숨어있는 곳을 찾기가 어렵지, 찾아내기만 하면 척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걸은 손의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이 싸움은 이들이 먼저 시작했다.
아걸은 동영 인자들이 쓰러지는 순간, 즉시 암영검을 펼쳤다. 검법은 취하지 않고 보법만 끌어다가 썼다.
자신을 철저히 숨긴다.
제삼 부두에는 황돛을 단 배가 있었다.
아걸은 제삼 부두에 와서야 황돛이 수군도독의 깃발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돛에 영(令)자가 그려져 있다.
사내 말처럼 황돛은 아무나 쉽게 걸 수 있는 깃발이 아니다. 특히 돛에 수군도독을 지칭하는 글자가 적혀있다면 접근하는 것조차 꺼려진다.
그런데…… 뱃전에 피가 흥건하다.
‘이럴 것 같더라니.’
아걸은 미간을 찡그렸다.
동영 인자들이 자신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렇다면 눈에 거치적거리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벤다고 보는 편이 맞다. 민초들까지 죽이고 있지 않은가.
아걸을 마중 나왔던 사내와 노를 젓는 군졸 네 명이 시신이 된 채 널브러져 있다.
황돛이 동영 인자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마도 황돛을 걸지 않았다면 이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배에 오르기만 하면 은밀히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기왕이면 끝까지 은밀함을 유지하지.
아걸은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역참!’
자신을 복주까지 태우고 온 마부도 횡액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동영 인자들은 역참을 지켜봤다. 누가 마차를 몰고 오는지 분명히 봤다. 수군에게까지 칼을 들이댔다면, 역참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자들……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했어.’
자신이 오기 전까지는 살겁이 없었던 듯하다. 복주는 조용했다. 한데 자신이 도착하자 싸움이 시작되었다.
‘내가 전쟁을 일으켰나? 내가 도화선이 된 거야? 후후!’
아걸은 실소를 흘렸다.
한 시진 내로 돌아온다고 해놓고 두 시진을 넘겼다. 오래 기다릴 것 같아서 와봤는데 이미 죽어 있다.
이렇게 하시겠다? 후후!
스으읏!
아걸은 즉시 몸을 숨겼다.
어떤 경우에도 신형을 드러내지 않는다.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인자들은 민초를 공격할 것이다. 한 번 했는데 두 번인데 안 할까. 철저히 암습을 가한다.
털썩!
또다시 다섯 명이 쓰러졌다.
아걸은 마지막 복면인을 베는 것과 동시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스르륵!
그의 신형이 소리 없이 녹아버렸다.
‘이자들도 아냐.’
아걸은 지금까지 표창을 날린 자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여섯 조 삼십 명을 죽였지만, 이들은 모두 사람들 뒤에서 몰이하던 몰이꾼들이다. 은밀한 곳에 숨어서 자신에게 표창을 날린 자들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무공이 완전히 다르다.
표창을 날린다는 자들은 매우 가벼웠다. 표창이 가볍다는 뜻이 아니다. 무공을 전개하는 모습이 매끄러웠다. 상당한 수준에 이른 자들이다.
방금 쓰러진 자들은 사납다.
동영 인자들의 검을 보고 사납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걸밖에 없다. 사납다는 말은 난폭하다는 뜻이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칼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 날카롭다며 두려워한다.
절정에 이른 살검이라고 인정한다. 아직 서툰 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어쩌나? 아걸이 보기에는 미숙한 것을. 이들은 너무 강함에 치우쳐 있다. 그러다 보니 두 배는 더 빨라질 수 있는 길을 놓치고 있다.
표창을 던진 자들도 미숙하다. 조금 더 세밀하게 던져낼 수 있었다. 세밀하게 던지면 그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하니 더 느려질 것 같지만 사실은 더 빨라진다.
숨어있던 자들은 이들보다 두 배 정도까지는 되지 않아도 적어도 반 배는 강하다.
아걸의 목표는 일흔 명이다.
몰이꾼들을 모두 베고 나면 숨었던 자들도 나타날 것이다. 나타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기어이 찾아낸다. 항구를 이 잡듯이 뒤지면 반드시 찾아질 것이다.
스으으읏!
아걸은 귀신처럼 조용히 움직였다.
날이 밝기 전에, 해가 뜨기 전에 몰이꾼들은 모두 없앤다.
이들이 어떤 곳에 숨는지 알 것 같다. 자신이 바다에 뛰어들었던 곳을 중심으로 해서 방사형(放射形)으로 포진해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동료들이 죽은 사실을 모른다.
이들은 서로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
모든 요건이 아걸에게 유리하다.
동영 인자들의 감각은 최고다. 하지만 아걸은 더 날카롭다. 몸이 느끼기 전에 칼이 먼저 느낀다.
누군가 숨어 있을 것이라는 느낌!
금형술을 깨는 방법은 너무 간단했다. 칼을 고도로 감지하면 이런 느낌은 저절로 찾아온다. 굳이 은신술을 깨려고 다른 공부를 수련할 필요가 없다.
스스스슷!
아걸은 항구를 뒤져 나갔다.
어둠 속에서 쥐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감각을 곤두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