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四章 시산혈해(屍山血海) (2)
휘이익! 휘익! 피이익!
한밤중에 휘파람 소리가 일어났다.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들어온다는 말이 있다. 땅꾼이 휘파람으로 뱀을 부리기 때문에 생긴 말인데…… 그래서 밤에는 휘파람을 부는 게 금기시된다.
휘파람을 부는 자는 금기 따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저쪽 항구 끝에서 시작한 휘파람 소리가 중간 부근까지 이어진 후, 뚝 끊겼다.
휘이익! 휘익! 휙!
휘파람 소리가 다시 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섯 번을 울린 끝에 멈췄다.
세상은 다시 조용해졌다.
어느 누구도 휘파람을 불지 않았다.
타타탁! 타탁!
아걸은 지붕에서 지붕으로 건너뛰며 마지막 휘파람 소리가 울린 곳으로 달려갔다.
휘파람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곧바로 따라붙으면 일곱 번째 복면인들 다섯 명은 쉽게 잡아챌 수 있을 것 같다.
복면인들은 반 각에 한 번씩 서로의 안위를 점검하는 듯하다. 해변에 도착한 후, 반 각이 흘렀다는 소리다. 처음으로 휘파람 소리를 들었으니까.
휘파람 소리는 정확히 방사형을 이루며 번졌다.
여섯 번째 휘파람 소리가 울렸고, 일곱 번째에서 막혔다. 원래는 열두 번째까지 이어져야 했을 것이다.
쉬이익!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첫 번째 휘파람 소리가 울리자마자 내달리기 시작해서 바로 쫓아왔다. 목적지…… 화물 창고에 도착한 후에야 두 번째 휘파람 소리가 끝났다.
동영 인자들은 화물 창고 안에 있다.
‘움직인다!’
아걸은 방사형으로 늘어선 동영 인자들이 빠르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육안으로 항구 저쪽 끝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휘파람을 불던 자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은 단박에 들었다. 휘파람이 더 울리지 않은 것도 벌써 이상 유무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파아앗!
아걸은 창고 안을 주시했다.
인자들은 금형술을 펼친 채 창고 안에 숨어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다른 자들은 쉽게 찾아냈는데, 이자들은 좀처럼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다. 몰안을 일으켜서 지켜봐도 인기척이 감지되지 않는다.
저들이 벌써 떠났나? 그럴 리는 없다. 창고에 도착한 후에야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저들은 분명히 창고 안에 있다. 움직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들과는 다른 자들…… 이들이군. 숨어서 표창을 날린 자들.’
아걸은 움직이지 않고 창고를 주시했다.
시간은 많다. 날이 샐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 저들은 인자술을 수련한 만큼 참을성에 대해서는 독보적일 것이다. 하지만 아걸 또한 그런 부분에서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참을성이라면 자신한다.
파앗! 팟!
아걸은 지붕 위에 엎드린 채 창고를 주시했다.
저들의 기척이 탐지되지 않으니 자신이 먼저 신형을 드러낼 수도 있다. 다짜고짜 창고 안으로 들어서면 틀림없이 공격을 취해올 것이다. 그 검들을 되받아칠 자신도 있다.
저들의 검은 빠르지 않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빠르고 신랄한 검이지만, 아걸 눈에는 느리게 보인다.
아걸이 염려하는 것은 제삼의 수법이다.
저들은 잠자고 있는 민초를 깨워서 인질로 삼을 수 있다. 아니면 밤새워 일하고 있는 인부들을 인질로 잡을 수도 있다.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데 무슨 짓인들 못 할까.
아걸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싸우면 자신만 불리하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알았다.
그래서 급습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금형술을 파악한 후, 쾌속하게 쏘아 나가서 단숨에 베어버린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베고 난 후에는 즉시 사라진다. 밤새도록 숨바꼭질을 해보자.
‘완벽하게 숨었어. 상당한 고수들이야.’
이들은 확실히 죽은 복면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공은 모르겠는데, 은신술만큼은 탁월하다고 말해줄 수 있다.
중원 무인도 은신술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숨을 죽이고 숨는 것은 기본이다. 몸을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히기도 한다. 아예 호흡까지 끊은 채 몇 날 며칠을 버텨내기도 한다. 주로 살수들이 많이 사용한다.
동영 인자도 그런 쪽에서는 상당히 발달해 있다. 아예 무공은 제쳐두고 은신술만 전문적으로 파헤쳐 온 것 같다.
저들이 한 번 숨으면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다.
탕산에서 목형술로 숨었을 때, 토형술로 땅에 숨었을 때, 금형술로 건물 안에 숨어 들어갔을 때…… 제각각 특성이 있지만 완벽하게 숨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다리지. 분명히 너희가 먼저 움직일 거야.’
아걸은 휘파람 소리가 울려 나오던 창고를 주시했다.
파앗! 팟!
움직임이 일어났다.
아걸의 판단은 틀렸다. 창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기척을 흘리지 않았다. 그 대신에 다른 쪽에서 사납게 기척이 울려 나왔다. 일부러 기척을 흘리고 있다.
‘빠르게? 내 위치를 알았군.’
아걸은 피식 웃었다.
동영 인자들은 정말 귀신 같은 자들이다. 자신의 움직임을 간파해 내다니.
좌측, 우측 그리고 뒤에서 많은 자가 접근하고 있다.
포위망은 이미 형성되었다. 여섯 군데로 흩어졌던 복면인들이 한자리로 모인다.
‘이러면 내가 고맙지.’
아걸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자신이 찾아내서 도륙해도 모자랄 판인데, 저들이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보다 고마울 노릇이 어디 있나. 결전은 언제든 환영한다.
아걸은 은신술로 싸우는 것보다 칼과 칼을 맞대고 격렬하게 싸우는 걸 좋아한다. 그런 싸움이 시원시원해서 좋다. 은신술로 싸우는 것은 죽이는 것이 목적 같아서 싫다.
스읏!
아걸은 숨었던 곳에서 몸을 일으켰다.
적들이 사방에서 달려온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종적을 찾아냈다는 뜻이다. 자신이 지붕 위로 달릴 때, 이미 저들 눈에 띄었던 것 같다. 항시 지붕을 노려보고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저벅! 저벅!
아걸은 지붕 위에서 내려와 창고를 향해 걸었다.
창고로 가는 길은 마차 두 대가 비켜 지나갈 정도로 넓었다. 대낮에는 많은 사람이 북적거렸다. 하지만 깊은 밤이 되자 사람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곳에서는 인질도 구하지 못한다.
사람이 없는 한밤중이라서 천만다행이다. 저들이 인질로 협박하지 못하니…… 싸움을 빨리 끝낸다. 이런 자들과 오래도록 손을 맞대기가 싫다.
덜컹!
아걸이 창고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응?’
아걸은 창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앞쪽에 쭉 늘어서 있는 여덟 명을 봤다.
강하다! 상당히 강한 인자들이다.
이들은 전혀 숨지 않았다. 자신이 도착했을 때부터 이 상태로 자신을 기다렸다. 그런데도 기척을 전혀 감지해내지 못했으니…… 금형술에서는 단연 압권이다.
이들은 전신에서 어떠한 기도도 흘리지 않는다. 기도를 안으로 숨기는 단계다.
이런 모습은 오히려 강렬한 기도를 뿜어내는 것보다 더 힘들다. 취화원 살수 중에서도 이런 정도까지 기도를 숨길 수 있는 사람은 구곡주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의 무공수준은 구곡주와 엇비슷하다고 봐야 한다.
상대방의 무공이 구곡주 정도라면 충분히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이십사 위문과도 싸운 사람이 너무 엄살을 부리는 건 아냐? 지금 당장 달려들어도 될걸?
아걸이 걱정하는 것은 결전이 아니다. 이들이 취할 비인간적인 행동이다.
스읏!
아걸이 반철도를 뽑았다.
그때, 늘어선 자 중, 가운데 위치한 자가 말했다.
“이대로 싸워도 좋을까?”
“무슨 말이야? 안 될 건 없잖아.”
아걸이 처분이 대답했다.
“안 될 것 같은데. 후후!”
사내가 묘한 말을 했다.
순간, 아걸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휙 뒤를 돌아봤다.
“엇!”
아걸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봤다! 창고 밖에는 사방에서 달려온 복면인들이 에워싸고 있다. 놀라운 점은 그들이 품에 어린아이 한 명씩을 품고 있다는 거다. 또 아이들의 심장에는 소검이 대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복면인과 아이들은 한 몸이다. 끈으로 복면인과 아이들의 허리가 묶여 있다.
이들이 자신을 발견한 것은 훨씬 전이다.
자신이 숨거나 죽이는 모습을 본 것은 아닐 것이고…… 숨은 자들에게 변괴가 생긴 것을 알아챘다. 휘파람 이외에 다른 연락 수단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 휘파람은 연락 수단이 아니다. 저들이 아걸을 꿰어내기 위한 술수다.
그때 이미 아이들이 잡혀 있었다.
저들이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아이들은 지금처럼 묶여서 같이 움직였다.
“너희 참 치사한 족속이구나.”
아걸이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창고 밖에 있는 자들은 어림짐작으로 서른 명가량 된다. 맞을 것이다. 복면인이 모두 예순, 아직 서른 명을 베지 못했다. 그들이 전부 이곳에 왔다.
“아이들을 어떻게 한 거야?”
아걸이 축 늘어진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혼절만. 워낙 빽빽대고 울어대는 통에.”
아이들은 혼혈을 짚어서 정신을 잃은 상태다. 아직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음!’
아걸은 침음했다.
아이가 한두 명이면 구할 생각이라도 하지만 서른 명 정도가 되면 손도 쓰지 못한다. 지금 당장 움직이면 대여섯 명쯤은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머지는 즉시 도륙된다.
“어때? 싸울 수 있겠어?”
사내가 말했다.
“아이들은 놔주지? 무인이라면 칼로 싸워야지. 너무 비겁하잖아.”
“꿩 잡는 게 매라고 하지? 이것저것 따져서 뭐 해. 그런데…… 저 애들 너와는 상관이 없잖아? 그래도 네 목숨이 중요할 텐데, 아이들이고 뭐고 우선 싸워야겠지?”
“아이들 몸에 털끝 하나 건드리면 너희는 모두 죽는다.”
“하하하! 되게 웃기네.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으면? 살려줄래? 그래서 서른 명이나 감쪽같이 죽이셨어?”
“원하는 게 뭐냐?”
“네 목숨.”
“음!”
“하하! 역시 안 되겠지? 아이들이고 뭐고 내가 죽는 마당에 뭐가 소용 있겠어. 다 소용없어. 내 목숨이 최고야. 자, 그럼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볼까?”
사내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우선 맛보기.”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푹!
아이를 안고 있던 복면인이 말릴 사이도 없이 소검에 힘을 주었다.
소검은 자루까지 푹 들어갔다.
아이의 심장이 깊이 꿰뚫렸다. 인정사정없는 일격을 혼절 상태에서 당했다.
“큭!”
아이가 신음을 토하며 고개를 떨궜다.
아이는 혼혈 상태라서 검이 들어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고통은 느꼈을 것이다. 반응이라고는 움찔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아이는 신음을 흘린 후 바로 절명했다.
아이를 죽인 복면인은 즉시 뒤로 빠졌다. 분노한 아걸이 칼을 쳐올까 봐 염려한 모습이다.
이들은 이런 경우까지 모두 계산했다.
뒤에서 아이를 품고 있던 자기 즉시 앞으로 나오며 길을 막아섰다.
“즉사. 그래도 다행이지. 고통 없이 죽었으니까. 우리가 그래도 죽이는 것 하나는 깔끔해.”
“너희 놈들!”
아걸이 이를 부득 갈았다.
“놈이고 년이고 그런 건 나중에 따지고. 일단 칼을 버려. 중원제일도가 칼을 들고 있으면 오금이 저려서. 아! 죽을 생각이 없구나? 그럼 우릴 치기 전에 아이들부터 죽이고.”
사내가 느물거리며 말했다.
덜컹!
아걸은 미련 없이 반철도를 던졌다.
“이젠 아이들을 풀어줘라.”
“아직. 무릎 꿇고, 손 머리 위로.”
아걸은 사내가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손을 머리 위로 얹지는 않았다.
“이 정도 양보했으면 아이들을 보내줘. 안 그러면…… 나도 더는 받아주기 힘드니까.”
“하하하! 아직 모르고 있네. 무릎을 꿇은 순간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는데. 넌 우리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그걸 아직도 모르고 있다니. 쯧!”
“좋게 말할 때 풀어줘라. 네놈…… 날 잡은 후에는 아이들을 죽일 것 같거든.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잖아. 아이들부터 보내. 한 명도 죽이지 말고.”
파팟!
아걸의 눈에서 분노의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