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四章 시산혈해(屍山血海) (3)
저벅! 저벅!
복면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동영 인자는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부여받은 명령이 명확해서 말을 나눌 이유가 없다. 지금 같은 경우, 아걸을 죽이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하지만 복면인은 입을 열었다.
다른 동영 인자와 달리 어느 정도 자기 결정권이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거 중원제일도 앞에서 협박질을 하려니 살이 다 떨리네. 후후! 아걸, 협박 좀 해도 되겠지? 말 몇 마디 한다고 목을 베지는 않을 거 아냐.”
“아이들을 보내라.”
아걸이 차분하게 말했다.
분노가 차곡차곡 쌓이면 오히려 차분해진다. 냉철해지고, 예리해지며, 고요해진다.
“애들을 풀어주기 전에.”
복면인이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서 아걸에게 던졌다.
“안에 독단이 들어있어. 몸에 아주 나쁘지는 않아. 정신을 잃는 정도? 그것도 일다경 후에야 발효되니까, 그 전에 몇 수 쓸 수는 있어. 적어도 이 정도는 안전장치를 해놔야지?”
독단을 복용하라는 말이다.
“일다경이면 너희를 베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그렇다고 했잖아. 우린 네 말을 믿고 저 애들을 풀어줄 건데, 네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없어서.”
복면인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어서 독단을 복용하라는 뜻이다.
“그 말을 믿지. 약속을 어기면 나도 너희를 벤다. 틀림없이.”
아걸이 침중하게 말하며 행랑을 열었다.
행랑 안에는 사내가 말한 것처럼 기름종이에 쌓인 환단이 들어있었다.
검은색이고, 말똥 냄새가 풍긴다.
아걸은 망설임 없이 환단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우물우물 씹은 후에 꿀꺽 삼켰다. 마지막으로 입을 쩍 벌려서 먹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후후! 좋아. 간단하네.”
복면인이 만족한 듯 웃었다. 그리고 즉시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묶어라!”
순간, 밖에서 아이들을 붙잡고 있던 복면인 중 두 명이 재빨리 뛰어들었다.
그들 손에는 밧줄이 들려 있었다. 아걸을 묶으려는 것이다.
“아이들 먼저 보내라고 했다!”
아걸이 싸늘하게 말했다.
“하하! 아직도 기세가 죽지 않았네. 그런데 어쩌지? 넌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복면인이 팔짱을 끼며 아걸을 빤히 쳐다봤다.
“그 독단은 일다경 후에 발효되는 게 아니야. 즉시. 지금 즉시 독이 퍼질 거야. 물론 독성도 지독해. 창자가 녹아 들어갈 텐데,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일다경이면 우리 모두를 죽이고도 남는다고? 해볼 수 있으면 해보고.”
툭!
복면인은 아걸이 버린 반철도를 발로 차서 아걸 앞으로 던졌다.
“아이들을…….”
“일단 묶여. 조금 있으면 창자가 녹을 텐데, 그러면 절망감이 회오리칠 거야. 그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우리도 살길은 열어놔야 하지 않겠어? 아이들은 그 후에 보내주지.”
“묶어라.”
아걸이 체념한 듯 말했다.
뒤에서 뛰어든 두 명이 즉시 다가서서 아걸을 묶기 시작했다.
손을 묶고, 발을 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묶은 손과 발을 한데 묶었다.
아걸은 사지가 결박당했다. 꿈지럭거리면서 발버둥 칠 수는 있지만, 누구도 해치지 못한다. 혼자서는 일어서서 앉지도 못한다. 완벽하게 잡혔다.
“이해가 안 돼. 이놈들, 피붙이가 아니잖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아이들이 그렇게 중요했나? 목숨을 버릴 정도로? 이게 중원이 말하는 인의대협인가?”
“이제 아이들을…….”
“아이들, 아이들, 아이들! 들어주기도 귀찮네. 뭐 괜찮아. 너를 잡았으니. 조금 있다가 죽는 걸 보고 풀어줄게. 그전에는 안 돼. 네놈은 위험인물이야.”
복면인이 뒤로 물러섰다.
아걸은 사지가 결박당해 있지만, 그래도 검으로 끝장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독단을 복용시켰으니 시간이 흐르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다.
“큭! 컥!”
아걸이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창고 바닥에 떨궜다.
드디어 독효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말을 하지 못하게 혀를 태우고, 위장을 녹이고, 창자를 가닥가닥 찢어버린다. 오장육부를 한 줌 진물로 만든다.
복면인이 내준 독단은 동영 인자들이 자살할 때 사용하는 절명독이었다.
“후후! 아걸이 우리 손에서 끝날 줄은 몰랐군. 우리가 되레 잡힐 줄 알았는데. 두주께 보고해라. 아걸은 팔탈이 잡았다고. 사귀. 애써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나? 임무가 이렇게 끝나버렸네? 그만 돌아가지. 하하하!”
복면인은 기분 좋은 듯 웃어 젖혔다.
동서남북, 네 곳에서 미미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들은 복면인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아걸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딱 한 마디만 했다.
“좋군. 두주께 미리 보고하지. 상세한 보고는 너희가 직접 하도록. 너희 공을 가로챌 생각은 없다.”
슷! 스스스슷!
네 명이 일제히 신형을 솟구쳐 사라져갔다.
더는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이미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중원제일도 일홀문주가 만육계(萬戮計)라는 어처구니없는 계획에 무릎을 꿇었다.
만육계는 열 번을 사용하면 열 번 모두 실패한다.
어떤 자도 생면부지 낯선 자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분노는 터트리지만, 병기는 절대 놓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은 인질이 오히려 짐이 되고 만다.
그런 하중하(下中下)의 계략이 아걸에게 먹힐 줄이야.
“후후! 공을 가로채려야 챌 수도 없지. 이미 적면께서는 이런 상황을 환히 보고 계실걸? 하하하!”
복면인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다른 복면인을 보며 말했다.
“뭐 해! 빨리 치우지 않고.”
순간, 창고 밖에 있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손을 썼다. 소검을 휘둘러서 아이들의 심장을 찔렀다.
“크윽!”
“악!”
짧은 비명이 어지럽게 울렸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죽었다. 복면인의 품에 안겨진 아이들은 혼절 상태였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비명밖에 지르지 못한다. 그것도 매우 짧다.
“안 돼!”
아걸이 고통스럽게 일갈을 내질렀다.
“후후! 안 되기는. 잘만 되는데. 그런데 너 아직 안 죽었니? 벌써 뒈질 때가 넘었는데, 목숨이 고래 심줄이네. 괜찮아. 조금 더 기다려줄 수 있어.”
복면인은 아걸 옆으로 다가서지 않았다.
그때다. 두두둑! 소리가 울렸다.
아걸을 묶었던 밧줄이 일시에 끊어져 나갔다. 동시에 땅바닥에서 맹수가 튀어 올랐다. 맹수의 손에는 어느새 볼품없는 반철도가 들려 있었다.
쒜에엑! 퍼억!
반철도가 단숨에 복면인의 머리를 찍었다.
목도일참!
어떤 싸움이든 단 일 초만 사용했던 이대문주의 절정도법이 유감없이 펼쳐졌다.
“죽인다고 했다!”
아걸은 복면인의 머리를 내리찍는 데 그치지 않았다. 손에 힘을 집중시켜서 칼을 더 밑으로 그어 내렸다. 머리를 찍은 칼이 목을 뚫고 가슴까지 그어졌다.
아걸은 분노했다.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섰을 때, 이미 충분히 분노한 상태였다.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아이들의 죽음은 한 조각 남은 이성마저 단숨에 빼앗아갔다.
동영 인자들이 간과한 점이 있다.
아걸이 명문정파에서 수련을 쌓은 귀공자가 아니라는 점을 몰랐다. 아니, 그런 점은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칼이 너무 강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인자로서는 치명적인 실수다.
임무를 받으면 암살대상자의 배경부터 파악한다. 기본이다. 출신 내력, 살아온 환경 등등을 파악해야만 효율적인 암살 계획을 짤 수 있다.
동영 인자들은 아걸이 누구 손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성장 과정에 대해서 무심했다. 아걸이 활검문 십검과 부딪친 시점부터 관심을 가졌다.
그 당시, 아걸의 칼은 많이 부족했다. 소축십검을 힘들게 상대하면서 쫓기는 처지였다. 그러니 그 이전의 상태까지 신경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걸은 적랑대 대주, 아삼 손에 키워졌다.
아삼은 아걸을 곱게 키우지 않았다. 힘든 곳, 험한 일에 내몰았다. 목숨이 위험하기도 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나 저지를 짓도 서슴없이 시켰다.
일정한 선을 지키기는 했지만…… 아걸이 자라면서 겪은 일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
동영 인자들은 허리춤에 암기를 꽂고 있다.
장검과 소검을 휴대했고, 그 외에도 수리검을 좌우에 두 자루씩 꽂아놨다. 표창은 앞가슴에 꽂혀 있다.
병기가 상당히 많다.
온몸에 병기를 휘두르고 있으니 한두 자루쯤 빠져나가도 알지 못한다. 칼이 날아올까 봐 몹시 긴장한 상태라면 더더욱 병기에 신경을 쓰지 못한다.
복면인들이 아걸을 묶을 때, 아걸은 그들이 지닌 병기를 뽑아서 등 뒤 허리춤에 꽂았다.
저들은 사지를 결박할 것이다. 앞으로 묶지 않고 등 뒤로 묶는다. 거의 대부분 결박을 할 때는 등 뒤로 묶는다. 앞으로 묶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독단은 복용하지 않았다.
복면인이 눈앞에 있지만, 그 역시 긴장 상태다. 그리고 지금은 밤이다. 창고 안은 특히 어둡다. 횃불조차 켜놓지 않았기 때문에 문틈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의존한다.
단환을 복용하는 척하면서 앞가슴 속으로 던지는 것쯤은 장난처럼 할 수 있다.
아삼은 아걸이 어렸을 적부터 녹선마황을 복용시켰다.
거머리를 짓찧어서 즙액으로 만들어 주었다면 먹기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면 한 그릇을 만드는데도 최소한 십여 마리는 써야 한다.
그만큼 먹일 정도로 녹선마황이 충분하지 않다.
할배는 녹선마황을 생으로 씹어먹게 했다. 입안에 넣기도 껄끄러운 거머리를…… 비린내와 악취가 심하게 풍기고, 입안에서 미끈거리고…… 정말 먹기 고약했다.
그때 써먹던 수법을 이번에도 썼다.
빛, 손재간, 긴장 상태……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서 복면인은 아걸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정면 대결을 선택했다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봤겠지만, 암계는 늘 실수를 몰고 온다. 상대가 속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아걸은 용수철처럼 퉁겨 올랐다.
쒜에에엑! 퍼퍼퍼퍽!
옆에 있던 자는 순간적으로 툭 튀어나오는 칼, 자연도를 막지 못했다. 반철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튀어나왔다. 신법과 조화를 이루지 않고 훨씬 빠르게 달려 나왔다.
“컥!”
복면인이 비명을 토했다.
반철도는 상대방의 심장을 베고 지나갔다.
살이 갈리고, 심장이 뜯겼다. 갈비뼈도 후드득 잘려 나갔다.
아걸은 그의 몸을 발로 차버렸다. 다른 자를 공격해야 하는데, 이미 절명한 자가 앞을 막고 있다. 어서 비켜라. 뒤에 있는 자를 빨리 베어야 한다.
쒜에에엑! 퍽!
또 한 명이 쓰러졌다.
칼과 상대방의 몸이 일직선을 그었다. 가장 빠른 길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칼이 흘렀다.
탄궁도가 목에 박혔다.
복면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부릅뜬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가득했다.
그는 마지막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팔탈이라고 불린 자 중 세 명이 쓰러졌다.
남은 다섯 명은 즉시 반격했다. 다섯 방위를 점한 후,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연수합격진이다.
미안하지만 이미 이런 싸움은 숱하게 경험했다.
칼로 자신을 무너트릴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느리다. 다섯 명을 빙 돌아가면서 한 명씩 베어도 충분할 것 같다. 이들은 빠름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반철도가 허공을 갈랐다.
츄아아아악! 따앙!
칼과 검이 부딪쳤다. 강철 검들이 나무젓가락처럼 힘없이 부러져 나갔다.
반철도는 웬만한 도검은 힘으로 뭉개버린다. 아니다. 힘을 아주 강하게 쓴 것 같지만, 아걸은 조금도 힘을 쓰지 않는다. 강하게 칼을 쓰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쓴다. 칼이 지닌 무게만 제대로 활용해도 굉장한 타격력을 얻는다.
땅이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 중력은 어떤 인위적인 힘보다도 강하다. 거기에 진기만 살짝 얹으면 젖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내어서 칼에 담은 것처럼 보인다.
퍼퍼퍽! 퍼퍼퍼퍽!
반철도에 격타당한 복면인들이 가랑잎처럼 나가떨어졌다.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는다. 죄 많은 놈들. 너흰 무인이 아니야. 무인의 수치지.”
쒜에에엑!
아걸은 창고 밖에 있는 복면인들을 쫓아갔다.
창고 밖으로 나오자 길에 쓰러져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처참하게 드러났다.
복면인들이 죽은 아이들을 거침없이 던져버렸다. 아이를 묶었던 허리띠로 제멋대로 뒹굴었다.
“죽인다!”
쎄에에엑!
반철도가 섬광처럼 번뜩였다.
시작되었다. 일방적인 도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