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四章 시산혈해(屍山血海) (5)
스슷! 스스슷!
사귀는 빠르게 다가왔다.
아걸이 선제공격을 가하면 이들은 피하지 않는다. 칼에 맞더라도 달려든다. 애초에 무공으로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신을 폭사시키는 데만 치중한다.
“목숨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군. 남겨둔 식솔도 없을 테고. 악마라 이건가?”
아걸이 네 사람을 쑥 훑어보며 말했다.
“우리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것 같은데. 후후! 중원제일도와 같이 간다면 영광이지. 우린 밑져야 본전인데, 너도 그럴까? 너 같은 고수와 같이 간다면 결코 손해가 아니야.”
사귀 중 북쪽에 선 자가 말했다.
“이건 손해니 뭐니 그런 걸 따지면 안 되는데. 너희 목숨이 끝나는 거야.”
“무인의 목숨은 언제든 떨어질 수 있는 건데, 뭘 새삼스럽게. 이게 아니어도 널 죽일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선택했겠지. 우리 처지도 이해해 달라고.”
“그렇군.”
아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슷! 슷! 스슷! 슷!
사귀는 말을 하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다가왔다.
몇 마디 말이 끝났을 때, 서로 간의 간격은 격투 상태로 좁혀졌다. 반보만 내디디면 검을 찔러넣을 수 있다. 폭혈공을 터트리면 다섯 명 모두 죽는다.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사귀에게는 유리했고, 아걸에게는 치명적인 오만이었다.
쓸데없는 말을 나누지 말고 재빨리 피했더라면, 혹은 가차 없이 공격을 가했더라면 자신을 폭발시키는 폭혈공과 직접 맞닥트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묻자. 이 무공의 이름은?”
“후후! 곧 죽을 놈이.”
“죽지 않을 거니까. 말했잖아. 너희 개죽음하는 거라고. 같이 죽더라도 무슨 짓거리에 죽는 줄은 알아야지.”
“사무멸폭공(死無滅瀑功). 우리 유음류 말로는 화형술.”
“이게 화형술일 것이라는 짐작은 했다. 다른 신술과는 상당히 다르군. 다른 신술은 삶이 우선인데, 이건 죽음을 앞장세웠어. 살지 말라…… 아! 그래서 ‘사무’인가?”
“너희들이 쓰는 공부보다 훨씬 강하지. 후후!”
“우린 이런 짓거리 안 해. 사마외도 중 일부 무리가 쓰기는 하는데…… 이거 살상 범위는 어떻게 돼? 어느 정도나 도주하면 살 수 있을지 가늠해 보려고.”
“직접 부딪쳐 봐.”
“야박한 놈들이군. 하긴…… 인간이 아니니까.”
아걸이 입가를 비틀이며 씩 웃었다.
중원에도 이런 식의 마공이 존재한다. 살상 범위는 대략 사오 장 정도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소멸한다. 철갑을 입고 있어서 뼛조각에 관통당한다.
단전 진기가 터지고, 경맥이 터지면서 일으키는 폭발력은 능히 화약 천 근이 폭발하는 힘과 비견된다.
이들은 화형술에 자신을 가진다.
천천히 다가설 때마다 지척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지금이 훨씬 편안해 보인다. 사무멸폭공이라는 자폭공을 성공시켰다는 만족감까지 엿보인다.
그만큼 살상 반경이 넓다.
이들이 자폭하면 최소한 오륙 장은 쑥대밭이 된다. 풀 한 포기 살아남지 못한다.
이것은 추측이지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직 가만히 있지? 동영 인자라면 벌써 자폭을 결행해야 했는데.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는 것보다 적을 죽이는 것이 우선일 텐데.
‘시간!’
사무멸폭공을 전개하는 데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진기가 운집되고, 경맥이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팽창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일 것이다.
경맥은 수용할 수 있는 진기만 받아들인다.
한계를 넘어서는 진기가 밀려오면 일단 자체적으로 분산을 시도한다. 경맥 파열을 몸이 우선하여 막으려고 한다. 인체의 신비한 작용이다.
그것을 뚫고 계속해서 경맥을 팽창시킨다.
‘거의 다 됐어.’
아걸은 차분히 기다렸다.
눈을 반개하고…… 말을 주고받는 중에도 도신일체를 풀지 않은 채 저들을 지켜봤다.
준비되기 전에 공격하지 않는다. 최상의 상태에서 펼친 무공을 짓이겨준다. 목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마저도 좋게 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이들은 처절한 패배감을 간직한 채 쓰러져야 한다.
철컹! 철컹!
사귀가 검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두 손 모아 합장했다.
‘끝났군.’
아걸은 자폭 준비가 끝났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제 곧 자폭이 시작된다.
원래 이들은 더 빨리 준비할 수도 있었다. 무인 대부분은 자폭공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면 서둘러서 피하고자 한다. 아걸처럼 태연히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금처럼 운기하는 시간이 길다면 전혀 쓸모없는 공부가 되고 만다. 말 그대로 자신들의 목숨만 잃고 끝난다. 하지만 사귀는 아걸이 기다려 줄 것을 알았다. 아걸의 모습에서 자신들이 시간을 얼마나 쓰든 끝까지 기다릴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급하게 운공하는 대신에 완벽한 쪽을 택했다.
아걸의 코앞까지 다가선 후에도 여전히 공격하지 않고 운기에 집중했다.
단전 진기를 모두 짜내어서 경맥을 팽창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바를 다 했다.
그들의 경맥은 세 배 이상 부풀어서 터지기 직전이었다. 이런 상태라면 자폭공을 멈추고 정상으로 돌아가더라도 몸이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경맥이 늘어난 후유증으로 평생 불구가 되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미 인체는 치명적인 손상을 당했다.
구궁! 구궁! 구구궁!
그들은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저승에서 손짓한다. 빨리 오라고 한다.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다시는 살아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눈동자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가자!”
한 마디를 끝으로 그들은 일제히 정점을 향해 치달렸다.
그 순간! 아걸이 반철도를 휘둘렀다.
꽈르르르릉!
이십오대 문주의 수신도가 펼쳐졌다. 칼이 몸 주위로 휘돌려졌다. 삼백육십 합, 칼날 삼백육십 개가 전신을 감싸며 휘돌았다. 아걸의 몸을 철옹성으로 만들어 주었다.
어떤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와도 다 막아낸다.
전후좌우, 상하에서 쏟아지는 모든 공격을 한 자루 칼이 막아낸다.
사귀의 얼굴에 웃음이 스쳐 갔다.
아걸의 도법은 뛰어나다. 눈부실 정도로 빠르고 강렬하다. 하지만 저런 무공으로는 사무멸폭공을 막지 못한다. 애초에 무공으로 자폭공을 막겠다고 생각한 자체가 무리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무조건 도주했어야 한다.
“끝났다!”
사귀 중 동쪽에 있는 자가 소리쳤다.
완벽하게 정점에 닿은 사무멸폭공, 자신들조차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터져 나오는 힘, 꽉 틀어막힌 동서남북,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아걸.
동귀어진이다. 같이 가자.
아니?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파파파팍! 파파팟!
갑자기 아걸의 발밑에서 뿌연 흙먼지가 피어났다. 거칠게, 사막에서 용권풍이 불어오듯 아주 거칠게 흙더미가 솟구쳐 올라왔다. 반철도가 마구 땅을 팠다.
땅은 순식간에 무릎까지 파였다.
부두로 쓰이는 땅은 너무 단단해서 동영 인자들도 토형술을 포기한 곳이다. 그런 땅을 아걸이 순식간에 파고 들어간다. 이대로 한 호흡만 더 놓아주면 능히 상반신을 묻을 정도까지 팔 것 같다.
파파파팟! 파파팟!
두더지가 땅을 판다고 한들 이렇게 빠를까? 이토록 거칠까? 아걸의 몸은 뿌연 흙먼지에 가려서 보이지도 않았다. 무작정 땅을 파고 들어가는 모습만 보였다.
“안 돼!”
사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걸이 땅속으로 들어간다면 그들은 헛되이 허공만 두들기게 된다. 땅은 몸을 완전히 묻을 정도로 깊게 파지 않아도 된다. 몸을 굽힐 정도면 된다.
그 정도로는 부상을 면치 못하겠지만, 목숨을 구할 수 있다.
방법은 하나!
쒜에엑!
사귀 중 북쪽에 있던 자가 아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아걸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다면 흙구덩이를 향해서 자폭공을 펼친다. 그러면 놈은 완전히 독 안에 든 쥐가 된다.
다른 삼귀도 일귀의 뜻을 알아차렸다.
쒜엑! 쎅!
그들은 일제히 아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아걸이 칼을 쓰겠지만 상관없다. 몸이 베이더라도 아걸을 붙잡는다. 몸을 밀착시킨 채 자폭한다. 칼이 머리를 쳐와도, 몸을 반으로 토막 내도 괜찮다. 이미 자폭공은 운영되었다.
그들이 구덩이를 향해 덮쳐든 순간,
펑! 퍼어엉! 꽈지지지직!
그들의 몸이 터졌다.
아걸이 칼을 써오더라도 이미 늦었다. 하물며 칼조차 쓰지 못했다. 사귀를 향해 칼을 쓰느니 한 치라도 구덩이를 더 파겠다는 듯 맹렬히 땅을 팠다.
이미 구덩이는 상당히 파였지만, 더 깊이 파고 들어갔다.
꽈지직! 꽈다다다당!
사방 육 장을 뒤덮어야 할 사무멸폭공이 아걸이 파고 들어간 곳, 일장 범위로 집중되었다.
퍼억! 퍼엉!
거대한 폭음이 울리면서 땅이 움푹 파였다.
그들 다섯 명이 서 있던 땅은 커다란 구덩이로 변했다. 마치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푹 팼다.
구덩이 주변에는 피가 튀고 살점이 흩어져 있었다. 가닥가닥 끊어진 뼛조각이 암기처럼 틀어박혔다.
사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걸도 사라졌다.
살아서 움직이는 물체는 없었다. 코를 찌르는 역한 피비린내만 부두에 퍼져나갔다.
“철저하게! 철저하게 비탄에 잠겨서 죽어라.”
아걸이 잔인하게 말했다.
저들은 방향을 잡아 잘못 잡았다. 아걸은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았다.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지금의 경우에는 땅을 친 후에 정반대 방향인 하늘을 향해서 솟구쳤다.
저들은 당황해서 땅만 주시했다.
희뿌옇게 일어난 흙먼지와 취화원의 암영검이 아걸의 신형을 완벽하게 가려주었다.
은신술은 동영 인자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걸은 허공으로 솟구친 후, 반철도를 내던졌다. 그리고 반철도를 징검다리 삼아서 더 높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오장 너머로 이동해 버렸다.
사귀는 사무멸폭공을 일으키기 직전, 구덩이 속에 아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죽은 게 아니다. 알았다.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사무멸폭공은 운용되었다. 폭발이 일어나면서 전신을 찢었다.
저들의 얼굴에는 비탄이 그려졌다.
‘이런 개죽음이라니!’
아걸이 무슨 짓을 하든 저들은 다가서지 말았어야 한다. 아걸이 아무리 빨리 땅을 파도 사무멸폭공을 견뎌내지 못한다는 확신을 했어야 한다.
여전히 사방을 포위한 채 자폭했다면 아걸도 무사하지 못했다.
사무멸폭공은 전면에 집중되지만, 후면으로도 튀어 나간다. 사실상 사방을 두루 쳐버린다. 그러니 아무리 신형을 빨리 움직여도 살상 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저들은 구덩이로 달려들었다.
저들 스스로 살상 반경을 좁혔다. 더욱이 아걸을 붙잡겠다고 구덩이 안으로 뛰어들기까지 했다. 사귀의 몸이, 몸뚱이 네 개가 하나로 뭉쳤다.
저들의 폭발력은 사방으로 번져 나가지 않고 땅과 하늘, 상하로 집중되었다.
한 곳에 밀집된 폭발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땅이 움푹 파였다. 이게 인간이 만들어낸 구덩이인가 싶을 정도로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다. 하지만 저들의 골육은 사방으로 비산하지 않았다. 지금은 비산이 필요한데, 저들은 집중했다.
아걸은 이런 공격을 많이 당해봤다.
이런 식의 공격을 처음 만난 것이라면 아걸도 당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수차례에 걸쳐서 체험했다. 화약도 경험해보고, 불길 속에 갇혀도 보고, 철질려도 몸으로 받아냈다.
이런 식의 공격은 익숙하다.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이미 그려져 있다. 허공으로 솟구친 후에 반철도를 던지고, 칼을 징검다리 삼아서 다시 신형을 튕겨낸 것도 임기응변이 아니다.
다른 무인들 같으면 임기응변이 되겠지만 아걸에게는 계획된 신법이다.
저들에게는 아걸의 대응이 순간적인 재치나 기지 정도로 느껴지겠지만 아걸은 저들이 다가올 때부터 이미 빠져나갈 방도를 찾아낸 후였다.
문제는 폭발 시점이다.
탈출은 자폭공을 운용한 후에 시도해야 한다. 운용하기 전에 움직이면 저들도 따라서 움직인다.
그 시점을 파악하기 위해서 도신일체를 풀지 않았다. 예민한 감각으로 진기가 최고조에 이른 시점을 파악해야만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저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동영 인자들도 토형술을 포기한 땅, 바로 그 땅을 판다.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이 거침없이 파인다면 저들은 틀림없이 당황할 것이다.
물불 안 가리고 무작정 달려들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평정심부터 무너트려야 한다.
생각이 옳았다. 그리고 저들은 죽었다.
슷!
아걸은 땅에 떨어진 반철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부두로 걸어갔다.
부두에 황돛을 단 배가 쓸쓸하게 묶여 있었다.
아걸이 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