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五章 대해사투(大海死鬪) (4)
“설마 이름 따위를 물을 것 같지는 않고…… 우리 사이에 물을 게 있나?”
사내가 피식 웃었다.
“이런 것이 궁금해서.”
“이런 것?”
“네가 하는 있는 짓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하는 짓? 하하하! 하하하하하!”
사내가 크게 웃었다.
“내가 바다에 표류하고 있을 때 말이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뒀으면 이삼일을 버티지 못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이렇게 배 위에 올라와 있고. 너만 이기면 살 수도 있겠어. 괜히 긁어서 부스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하하하!”
사내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왜 공격한 거야?”
“이유는 세 가지다.”
사내가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세 가지씩이나? 궁금하군.”
아걸이 물음을 던졌다.
“첫째 대만도가 지척이다. 조류를 따라서 흘러가면 하루나 이틀 정도면 도착해.”
“아! 그래? 다행이군.”
아걸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다를 알지 못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도, 돛을 펼칠 위치도 알지 못한다. 한데 사내가 중요한 점을 알려주었다. 그저 이대로 바다가 이끄는 데로 따라가면 대만도가 나온다.
사내만 이기면 정말로 살 수 있게 되었다.
‘하루나 이틀 거리…… 그럼 다 왔군.’
대만도가 지척에 있다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굳이 공격해 온 것이 이해가 된다.
“둘째, 수군도독 진일호가 수색에 나섰다. 복주에서 대만도에 이르는 뱃길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다.”
“아!”
아걸은 이번에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만도가 지척이고 수군도독이 수색에 나섰다면 상황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동영 입장에서는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탈진해서 죽겠지만, 그 전에 구조될 것이 너무도 명확했다.
“마지막은 뭐지? 더 궁금해지잖아.”
아걸이 사내를 쳐다봤다.
“네가 대만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 수군이 수색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널 공격했을 것이다.”
“그럴 것 같긴 해.”
“그럴 것 같다고? 후후! 너도 짐작되는 이유가 있는가 보지?”
“자만이지.”
“자만?”
“유음류는 천하최강이다. 뭐 이런 거 아냐?”
“후후! 짐작하고 있었군.”
파팟!
사내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아걸은 사내를 빤히 쳐다봤다.
사내의 눈에서 절대 강자의 고독이 읽혔다. 사내는 두주가 아니다. 동영 인자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절대 강자의 고독을 뿜어내고 있다.
강하다는 무인과 싸워보고 싶다는 충동이 엿보인다.
절대 강자 두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알 수 없다. 그걸 누가 아나? 싸워봐야 알지. 이것이 세상의 판단이다. 대부분 일진 사나운 자가 질 거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싸움에 임하는 당사자들은 그런 생각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무조건 이긴다고 말한다. 절대 강자들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네가 그렇게 강해? 좋아! 그럼 내 검도 꺾어봐. 내 검을 꺾은 후에야 강하다는 말을 입에 담아.
강자는 모두 그런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
거기에서 쾌감이 일어난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한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한순간만 실수하면 즉시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긴장감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밀려온다.
강자의 검은 싸울 상대가 나타나면 고독하지 않다.
고독은 싸워서 이긴 후에 일어난다. 이자를 쓰러트렸으니 이제는 어쩌지? 내 검을 받을 자가…… 있나? 이제는 이 검도 싸울 일이 없겠구나.
기껏 절정 무공을 수련했는데 어디다 쓰지? 이제는 정말 전율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할까? 시답잖은 자들만 나타나면…… 지겨울 거야. 일방적인 살상일 테니.
이런 심정이 절대 강자의 고독으로 표출된다.
사내는 이미 그런 정도까지 올라섰다.
또 하나,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눈빛도 읽었다.
눈빛이 강렬하게 빛나면서도 출렁거린다. 뜨거운 전율보다는 긴장감이 앞선다.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나누고 있지만…… 사내는 긴장했다. 긴장감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노련할 뿐, 전신은 이미 잔뜩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곤두섰다.
확실히 두주와는 거리가 있다.
허도기에게 일 초를 패했다는 자라면 이런 긴장감을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평온하거나, 아니면 어서 빨리 검을 섞어보고 싶다는 투지에 휩싸이거나.
“아까 물속에서 날 공격한 사람, 여자던데. 유음류는 남녀를 가리지 않나 보지?”
“그런 편.”
“물속에서는 동영 제일이라고? 그 정도 무공이라면 평범하지는 않을 것 같고…… 당신과는 어떻게 되는 사이?”
“수하다.”
“단지 그것뿐?”
“잠자리 시중을 들기도 하지.”
“잠자리 시중이라니. 말 더럽게 싸가지 없이 하네. 그 여자, 정말 처절하게 싸웠어. 반철도에 몸이 반 이상 썰렸는데도 악착같이 오수조를 찌르려고 발버둥 쳤거든. 그게 동영 살수의 몸부림으로는 보이지 않더라고? 널 보호하려고 죽을힘을 다해서 가로막았던 것 같은데…… 그러면 말이라도 다정하게 해줘야지. 그 여자 혼이 아직 바다에서 떠나지 않았어.”
아걸은 말을 하면서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 얼굴에는 표정 변화가 없다. 여인에 대한 미련이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 대신 검을 뽑기 위해서 손이 꿈틀거린다. 오직 아걸과 싸울 생각밖에 없다.
“당신…… 내가 베어 넘겨야겠어.”
아걸은 사내를 베기로 결심했다.
사내는 다른 동영 인자와 하등 다르지 않다.
부두에서 만난 인자들처럼 상대를 죽일 수만 있다면 애먼 양민들을 인질로 삼을 자다.
이자의 눈빛이 강자의 고독이라고 본 것도 오산이다.
무공에 대한 결착보다는 상대를 죽이는 부분에 집착하고 있다. 대만도가 가깝지 않고, 수군이 수색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절대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공격할 수밖에 없을 만큼 상황이 급박하다.
절대 강자의 고독을 피워내는 것이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당연히 그런 자격을 지녔다. 그러면서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함도 지녔다는 거다.
이런 자는 벤다.
“끄응!”
아걸은 반철도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그런 몸으로 싸울 수 있겠나?”
스릉!
사내가 검을 뽑았다.
검집은 뱃전에 탁 던졌다. 검을 두 손으로 꽉 움켜잡고 가슴을 겨눴다.
“염정이라는 여자, 내 몸에 오수조를 세 번이나 찍어 넣었어. 여기, 여기, 여기.”
아걸은 오수조에 맞은 부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특히 여기. 옆구리. 이거 조금만 위로 쳐들렸으면 즉사했을 텐데. 당신이 미련 없다는 여자가 이 정도인데, 당신은 더 잘해야지? 그래야 죽은 여자가 원통해하지 않을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라. 목을 베어줄 테니. 난 적면이라고 한다. 알고나 죽으라고.”
슥!
사내가 검을 힘주어 잡았다.
‘적면.’
사실 아걸은 반철도를 들어 올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닷물이 피를 급속도로 빨아냈다. 혈도를 눌러서 지혈을 시켰지만, 그래도 여전히 피를 훔쳐 갔다.
아걸이 말한 것처럼 염정의 오수조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아걸에게서 적어도 육 할 이상의 내력을 소진시켰다. 체력은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만 남겨놓았다.
염정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아걸은 그동안 이런 상처를 매일 같이 안고 살았다. 이보다 더 중한 상처를 입었을 때도 칼을 들고 싸웠다. 화상과 철질려에 온몸이 갈가리 찢어져 나갔을 때도 일홀도를 들었다.
고통을 이겨내는 힘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네가 정말 중원제일도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일홀도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칼이지만 자신 입으로 무적이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일홀도도 언젠가는 꺾인다.
하지만 참을성만큼은 자신 있게 천하제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참는 것은 정말 자신 있다.
“후욱! 후우욱!”
아걸은 무인답지 않게 거친 숨을 쏟아냈다. 하지만 들이쉬는 숨은 고요했다. 날숨은 거침없이 쏟아져 나가고, 들숨은 숨을 쉬는지도 모르게 들어온다.
무공 입문자는 제일 먼저 진기 조율부터 배운다.
아걸이 행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중원제일도라고 불리는 도객이 입문자나 행하는 호흡법을 거리낌 없이 시전한다.
적면은 검은 겨눈 채 반보, 반보…… 조금씩, 조금씩 다가왔다.
“신술이 아니고 정통 검법인가?”
아걸이 눈살을 좁히며 말했다.
“원래 유음류는 검법이다. 신술이 아니야.”
“그런가. 지금까지 동영 인자가 쓰는 검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머릿속에 남을 만한 검이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정통 유음류를 보여줄 테니까 서둘지 말고.”
“두주가 쓰는 유음류도 같은가?”
아걸이 물었다.
퍼뜩, 적면의 검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동영 인자들이 사용하던 검과는 완전히 다른 검…… 이것이 유음류면 적면과 두주의 검은 완전히 다르다.
“풋! 유음류는 깨달음의 검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모두 다르지. 같은 사부에게 배워도 다른 검이 나와. 일홀도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역시 짐작이 맞았다.
유음류를 알 것 같다. 유음류는 동영의 일홀도다. 살수검이면서 일홀도다.
일홀도는 초식을 배우지 않는다. 칼을 배운다.
사부는 초식을 전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치 상태로 풀어놓는 것도 아니다. 기본 토대가 될 만한 무공을 가르쳐 준다. 그 무공들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만의 칼을 찾아내야 한다.
유음류도 같은 성격을 가진다. 초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서 자신의 검을 자신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물론 기본적인 검은 가르쳐 줄 것이다.
기본 토대는 같지만 뻗어 나온 가지는 각기 다르다.
일홀도나 유음류나 사문은 곡식을 심을 수 있는 땅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무엇이 될지 모를 씨앗을 준다.
씨앗이 콩이면 콩이 자란다. 고구마면 고구마가 자랄 것이다. 어떨 때는 배추 씨앗을 뿌렸는데, 무가 자랄 때도 있다. 우주 만물의 이치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일홀도나 유음류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
심은 것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칼이나 검이 튀어나온다.
현재, 아걸의 일홀도가 그렇다.
그의 일홀도는 삼십육문주의 일홀도나 사형들의 일홀도와 다르다. 근본이 다르다. 아걸은 지금도 자신만의 도초를 가지고 있지 않다. 몸이 곧 칼이다.
유음류는 어떤 식으로 제자를 양성할까?
분명한 것은 정통 유음류를 전수받은 사람이 적면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대했던 팔탐이나 사귀, 염정은 오대신술로 싸웠다. 그들의 검은 특이하지 않았다.
“그렇군.”
아걸이 중얼거렸다.
새삼스럽게 유음류를 알게 되어서 중얼거린 것이 아니다. 이제야 비로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황상이 자신을 남해로 보낸 진짜 이유를.
황상은 단지 동영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서 아걸을 보낸 것이 아니다.
동영 수군은 수군도독 진일호가 상대할 수 있다.
이미 조위 대장군은 진일호 도독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그렇다. 전쟁은 장군들의 영역이지 무인의 영역이 아니다. 무인 혼자서 싸울 수도 없다.
동영에서 넘어온 범선이 파사 해협에 머물러 있는 것도 이쪽 수군을 깨트릴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진일호 도독이 이끄는 범선은 삼백 척에 이른다. 숫자상으로는 동영 범선들이 오히려 밀린다. 병력이나 물자 면에서도 밀린다. 또한, 진일호 도독은 꽤 유명한 명장이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용장이기도 하다.
아걸은 황상이 자신을 남해로 보낸 이유가 두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동영 병사는 수군이 막을 수 있지만, 절대 검만은 아걸이 해결해야 한다고.
아걸은 지금까지 황상의 말을 부탁으로 여겼다.
한데, 황상의 명령은 부탁이 아니었다. 배려였다. 아걸이 일홀도를 얻지 못했으면 이런 배려도 하지 않았다. 일홀도를 얻었으니 동영의 일홀도인 유음류를 견식해 보라는 배려였다.
황상은 무공을 펼칠 줄 모른다. 하지만 무리에 대해서는 가히 중원 제일일 것이다. 그만큼 많은 무공을 알고 있다. 무공의 장단점을 환히 꿰뚫어 본다.
스읏!
아걸이 칼을 들어 올렸다.
스슷! 스스스슷!
반보, 반보…… 적면은 서둘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