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525화 (525/600)

第百五章 대해사투(大海死鬪) (5)

슷!

적면이 걸음을 멈췄다.

정확하게 일족일도(一足一刀)의 거리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공격할 수 있다. 눈 깜짝할 순간에 죽음이 일어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 한 걸음을 누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지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적면에게는 일족일도의 거리지만 아직 아걸에게는 살상 거리가 아니다.

장검은 길고 반철도는 짧다.

병기의 길이만큼 손해 보는 것은 당연하다. 일대일의 싸움에서 창이 검보다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장병일수록 사용이 어렵지만, 효과는 크다.

물론 두 사람에게는 일족일도의 거리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족(二足)이나 삼족 거리라도 단숨에 일족 거리로 좁힐 수 있다. 이미 거리와는 상관없이 칼을 쓴다.

하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거리가 지금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두 사람은 절정고수, 티끌만 한 차이가 승부를 가른다는 점에서 일보나 반보 차이는 매우 클 수도 있다.

스읏!

적면이 검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아걸은 반철도를 축 늘어뜨린 채 무심히 검 끝을 지켜봤다.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볼 것이 없어서 본다는 느낌이 맞을 것이다.

적면이 검을 상단에서 중단으로 낮췄다.

아무래도 상단 공격이 여의치 않다. 아걸을 흔들어서 빈틈을 유도해내야 한다.

아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적면은 왼발을 살짝 옆으로 비틀었다. 찌르는 검, 내리치는 검, 올려 치는 검에서 베는 검으로 변화시켰다. 머리, 목, 옆구리, 다리…… 벨 곳은 많다.

딱 한 걸음…… 한걸음에 승부가 좌우되는데 그 한 걸음이 내딛어지지 않는다.

어떤 변화에도 흔들림을 보이지 않는 자, 이런 자에게는 무슨 검을 쳐낼까.

적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끊임없이 검세를 변화시킨다. 어떤 검이 날아올지 전혀 짐작되지 않는다. 그것도 한 걸음…… 코앞에서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눈이, 감각이 쫓아가지 못할 만큼 빠르다.

이런 자에게는 어떤 칼을 쓸까?

적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걸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머릿속이 텅 비었다. 적면의 검을 부지런히 쫓아가야 하는데, 정말로 무심히 지켜봤다.

솔직히 어떤 칼도 생각나지 않는다.

적면은 일족일도의 거리에 서 있지만, 반보 거리에 서 있는 것만큼 심하게 압박해온다. 보통의 경우라면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을 것이다.

물러서면 최소한 십 초 이상 밀린다.

반보라도 뒤로 물러서면 형체 없이 흐르던 변화가 당장 마검이 되어서 터져 나온다. 물러선다는 것은 기세에서 밀렸다는 것, 검을 쳐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적면은 그만큼 강하게 압박해왔다.

반보…… 매우 짧은 거리다.

반보 거리에서 어떤 칼을 펼쳐낼까? 딱히 생각나는 도법이 없다. 하지만 막상 칼을 써야 할 때가 되면 어떤 도법이든 튀어 나갈 것이다. 마치 미리 생각해 두었던 것처럼 반철도가 화려하게 움직일 것이 분명하다.

사실은 도법을 펼쳐낸 것이 아니다.

적면에게는 도법이 쏟아져 나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걸이 덤벼든 것이다. 칼이 아니라 몸이 덤벼든다. 아걸은 몸이 곧 칼이다. 도신일체다.

몸을 썼는데, 칼이 날아간다.

자연도, 원심력, 구심력, 칼의 무게를 이용한 공격, 중력, 지면 반발력…… 모든 요소가 전부 가미된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것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검을 떨쳐내어서 몸을 찌른다면…… 진파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의 검을 일 촌쯤 빗나가게 해서 피해를 최소로 줄인다. 심장에 틀어박힐 검을 늑골 아래쪽에 박히도록 조절한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 역시 본능이 시킨 대로 한 것이다.

머리로 생각하고 펼쳐낸 것이 아니다. 즉응(卽應), 몸이 곧바로 응대한다.

아걸은 일홀도를 펼치고 있다.

그 말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어떤 도법도 떠올리지 않고, 멍한 눈으로 상대를 지켜본다는 뜻이다.

지금은 이런 칼을 쓸 순간이다.

싸움 중에 잡념을 떠올리면 바로 저승행이다. 요행조차 바라지 못한다.

아걸은 적면 같은 고수를 앞에 두고 잡념을 떠올렸다.

‘좋군. 어떻게 싸울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 싸움을 하게 되면 늘 어떤 칼을 쓸까 생각했는데.’

아걸은 자신에게 만족했다.

복주에 도착하기 전에 일홀도를 점검해 본 것이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검, 변함없는 검, 본능의 검. 유음류…… 좋은 검이야.’

아걸은 적면이 선보이는 유음류에도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싸움을 하게 해준 황상의 배려가 고마웠다.

쒜에엑!

검이 날아온다. 순간적으로 쭉 뻗어왔다.

‘머리!’

검은 머리를 노리고 일직선으로 찔러 왔다. 아니, 아니다. 검첨이 머리 근처에서 툭 퉁겼다. 쭉 찔러 오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검날이 뒤집히면서 목을 쳤다.

검을 곧게 찌르다가 손목 힘을 잃어버렸을 때, 갑자기 몸이 마비된다든가 해서 검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낙하 현상이 생겼다.

무리를 알아도 반사신경이 따라주지 않아서 쓰지 못하는 고도의 검술이다.

아걸은 즉시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왼 어깨로 상대방의 손목을 쳐올렸다. 견(肩)!

강호 무인들이 박투술에서 종종 쓰는 수법이다.

어깨에 손목이 닿았다. 그 순간 반철도가 정면에서 심장을 쑤시며 들어갔다.

푹!

뼈와 살이 갈라졌다.

두 사람은 껴안듯이 몸을 맞댔다.

아걸의 왼쪽 어깨가 적면의 오른팔 밑으로 들어가 있었다. 적면은 정면, 아걸은 왼쪽 어깨를 앞으로 내민 측면…… 어깨로 몸을 들이받은 모습이다.

“쿨룩!”

적면이 거세게 기침했다.

그의 심장에서는 피가 쿨럭쿨럭 쏟아져 나왔다. 반철도가 아직 뽑히지 않았지만, 참지 못하겠다는 듯 붉은 피가 칼과 살의 틈새로 꾸역꾸역 밀려 나왔다.

승부는 찰나에 끝났다.

허도기의 발검술처럼 아걸의 발도술은 빨랐다. 어깨로 손목을 치는 순간, 이미 반철도는 심장에 꽂혔다. 일체 변식을 사용하지 않은 직도(直刀)다.

적면도 광(光)을 펼쳤다.

검이 너무 빨라서 밝은 빛만 보인다는 절정 쾌검…… 동영제일쾌를 사용했다.

양쪽 모두 후회 없는 일전이다.

“좋은 칼…….”

스르륵! 쿵!

적면이 미끄러지듯 넘어갔다.

“휴우!”

아걸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순간 긴장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마치 거대한 산을 타고 넘은 기분이다. 후련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만큼 적면의 검은 반응하기 힘들었다.

적면의 검이 이런데 두주는 어떨까?

사실, 쾌검에서는 절대 쾌를 찾기가 무척 힘들다. 어느 수준에 올라서면 거의 비슷해진다. 허도기의 검이나 적면의 검이나 모두 같은 속도로 보인다.

물론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흔히 ‘간발의 차이’라고 하는데, 무인은 이 차이를 무공으로 일궈낸다. 우연이 아니라 갈고 닦은 수련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니 열 번을 싸우면 열 번 모두 같은 결과가 나온다.

허도기도 적면과 싸울 때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두주와 싸울 때처럼. 손톱만큼이라도 실수하면 당장 전세는 역전된다. 승자가 될 사람이 패자가 된다.

쾌검 싸움은 이런 맛이 있다.

적면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싸움을 택했고, 아걸은 그에 응해 주었다.

쾌와 쾌의 대결에서 아걸이 이겼다.

아걸이 지닌 도법 중에서 가장 빠른 도법이라면 탄궁도와 유성비도를 들 수 있다.

두 도법은 거의 비슷하게 빠르다.

탄궁도는 반탄력을 이용하고 유성비도는 낙하하는 힘을 이용한다. 이용하는 힘이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도 도법을 전개해보면 속도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는 그런 도법도 사용하지 못했다.

아걸의 본능이 도법을 쓰는 것보다 직도를 선택했다. 아니, 선택한 적도 없다. 반철도가 저절로 튀어 나갔다. ‘광’을 본 ‘직도’가 ‘너는 내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걸은 무너진 적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적면의 몸을 뒤졌다.

예상한 대로 금창약을 가지고 있다.

‘일단 몸부터 추스르고…….’

대만도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이대로 물살에 배를 맡겨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무리를 하면서 공격해 온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로 공격하지 않았다. 뗏목 하나로 바다에서 표류한다는 것은 죽음을 예약했다는 뜻이다.

아걸은 배를 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금창약을 덕지덕지 바른 후 뱃전에 축 늘어졌다.

허도기에게 당한 이후, 가장 크게 당한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상처는 자신이 자초한 것이다.

목형술, 금형술, 토형술을 보면서 오대신술을 파악했다고 자신했다. 그런 자신감이 피를 불러왔다. 수형술을 알지도 못하면서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은신술일 뿐!

은신술이 아니었다. 수형술은 수공(水功)이었다. 그리고 오수조를 든 여인은 수공을 제대로 수련했다.

어쩌면 오대신술은 모두 공부(功夫)일지도 모른다.

단순한 은신술이 아니라 수형술처럼 오랜 시간 갈고 닦아야 하는 무공 말이다.

동영에서는 오대신술이 무적으로 통했다.

굳이 공부 단계까지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적을 베는 데 하등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위장포만 뒤집어쓰고 숨만 죽여도 적이 알아채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대다수 사람이 공부를 포기하고 은신술에 치중한다.

잘 숨는 것이 잘 죽이는 것이라는 인식이 들게 된다. 그러면 망조가 나는 것인데.

적면이 전개한 쾌검은 유음류의 진신공부다. 그런데 다른 인자들은 쾌검을 떨쳐내지 않았다. 진신공부를 수련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유음류에 절대 검자(劍者)는 두세 명에 불과하다.

아걸이 본 바로는 수형술을 전대한 여인과 적면, 그리고 두주만이 진신공부를 수련했다. 팔탈과 사괴마저도 검에서 위협을 느끼지는 못했다.

‘몽설…… 조심해.’

아걸은 뱃전에 누운 채 하늘을 쳐다봤다.

달빛이 밝다. 별도 촘촘하다. 그 한 가운데에 몽설이 화사하게 그려진다.

여인을 죽인 후라서인지 몽설이 더 그립다.

두주는 황제 암살에 동영 인자를 투입했다. 절반 이상의 인원을 잠입시켰다.

누군가에게 통솔권을 주었다는 뜻이다.

동영 인자들을 부릴 수 있는 자, 유음류의 절반을 쥐어져도 안심할 수 있는 자, 두주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 진신 공부를 수련한 자…….

황제를 암살하는 일이다. 자칫하면 유음류 정도는 광풍에 휩쓸린 먼지처럼 날아가 버린다.

최소한 부두목 정도는 되는 자에게 맡겨야 한다.

몽설이 상대해야 하는 자는 적면 같은 자다. 진신 공부를 수련해서 검 대 검으로 싸워도 승산을 점칠 수 없는 초고수가 중원 땅에 들어가 있다.

몽설은 그자의 존재를 전혀 모른다.

지금까지 동영 인자들은 오대신술에 의존했다. 은신술만 파악해내면 처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경계심도 느슨해졌다. 확실히 처음처럼 경계심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는 상태는 아니다.

그자는 동영 인자들이 대거 쓰러지는 중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어떤 반격도 하지 않은 채 당하기만 했다.

그자가 나타나면 매우 위험해진다.

아걸이 본 검은 쾌공이다. 직도가 아니었으면, 변초를 섞었으면 오히려 당했을 것이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이 칼이 적중하지 않으면 내가 당한다’라는 신념으로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몽설이 상대해야 하는 자가 쾌검을 수련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바닷속에 있던 여인은 수공을 수련했다. 적면이 말했듯이 물속에서는 상대할 사람이 없다. 물속 싸움은 지상에서와는 전혀 다른 힘을 이용해야 한다. 부력과 물의 저항을 알아야 한다. 지극히 깊이 있게 수련해야 한다.

여인이 어느 정도나 수련했는지는 아걸의 몸에 새겨진 잔흔들이 말해준다.

몽설도 조심해야 한다.

‘니환일검이 선수를 잡을 거야. 니환일검이…….’

아걸은 니환일검을 생각하다가 눈을 사르륵 감았다.

잠시 쏟아졌다.

대만도가 지척이라고 하지 않았나. 수군이 수색한다고 하지 않았나.

배는 곧 발견될 것이다.

수군이 그를 대만도로 인도할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은 배를 저어 가는 것이 아니라 몸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걸은 깊은 잠으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