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六章 무념몽사(無念夢死) (1)
달빛이 대낮처럼 환하게 바다를 밝힌다.
하늘도 밝고 바다도 밝다. 하늘에 달이 떠 있고, 바닷속에도 달이 너울거린다.
철썩! 철썩!
파도가 배를 두들긴다.
범선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닻을 내리고 제자리에 멈춰 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범선은 움직이고 있다. 물살에 밀려서 조금씩 미끄러져 간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도 봤다.”
묵직하면서 차분한 음성이 울렸다.
“제가 가볼까요? 배를 다루지 못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배는 다를 줄 안다.”
“그러면 부상이라도?”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닌 것 같다.”
묵직한 음성의 주인, 수군도독 진일호가 말했다.
남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히 꿰고 있는 해귀(海鬼)들에게 범선 한 척 찾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동영군처럼 배를 능숙하게 부릴 줄 아는 자들이 솜씨를 한껏 드러내어 빠르게 이동한다면 찾기 힘들다. 하지만 한 자리에 못 박혀 있는 배를 찾기는 무척 쉽다.
해류만 파악하고 있으면 어디서 어느 쪽으로 배가 흘러올지 알게 된다.
특히, 지금처럼 수군도독이 직접 승선해서 탐선에 나선다면 눈에 불을 켜고 찾지 않을 수 없다. 탐선 같은 자잘한 일에 도독이 직접 나서다니.
움직이지 않는 범선에 아걸이 타고 있다.
싸움은 누가 이겼을까? 배가 한 시진 넘게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걸이 이긴 것 같은데.
범선 근처에는 작은 소선들이 십여 척이나 떠 있다.
아걸이 배에 오를 때, 배에 탔던 군졸들은 반대쪽으로 하선했다.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배를 지켜봤다.
그들이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배에 올라타지 않는다.
아마도 모종의 신호가 약조된 듯하다. 저들이 배에 타지 않는 것은 아직 신호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직도 싸움 중인가?
귀를 기울여 봤지만, 싸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바다 한가운데서 병장기를 부딪치면 그 소리가 무려 이십 리 밖까지 전해진다. 소리가 막힘없이 바다로 번져 나간다. 한데 배 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싸우는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는다. 싸움은 없다.
소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면 동영 인자 쪽에서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 말은 아걸이 이겼다는 뜻으로 풀이해도 좋지 않을까?
아걸이 이겼다면 그는 왜 범선을 움직이지 않을까?
두 가지가 즉시 생각된다. 하나는 심각한 상처를 입어서 움직일 수 없는 처지이거나 아니면 배 다루는 법을 몰라서 돛을 부리지 못한다는 거다.
아걸을 배를 안다.
복주에서 범선을 몰고 바다로 나왔다. 풍랑을 만나기 전까지는 매우 안정적으로 배를 움직였다.
그렇다면 상처를 크게 입었다는 뜻인데.
“가서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수군도독이 범선을 쳐다보며 침중하게 말했다.
“애초에 계획이 틀어졌다. 대만도를 거쳐서 차분히 파사해협으로 모실 보낼 생각이었다만…… 그 싸움이 벌써 시작됐다. 이러면 우리는 손댈 여지가 없어.”
“우리는 손 뗀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장군! 안 됩니다!”
부장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도독을 쳐다봤다.
“지금은 저들을 지켜보자. 저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직도 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수군도독 진일호가 말했다.
“으음!”
부장은 침음했다.
범선을 쳐다보면 도둑의 눈은 활활 불타고 있다.
농담이 아니다. 이번 일에서 손을 뗀다고 했지만, 완전히 내버려 둔다는 생각은 아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아걸을 주시하고 있지 않은가.
범선에서 신호가 터지고, 소선에 탄 군졸들이 배로 돌아간다면…… 아걸이 진 것이다. 그때는 당장 탐선에 나선 전선 일곱 척을 휘몰아서 범선을 들이친다.
도독이 손을 뗀다는 말은 범선 주위에 늘어선 소선이 다시 승선하지 않고 물러설 때에 한한다.
그러니 일단은 소선들이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저들의 모습을 지켜본 후에 대응한다.
“처음부터 손을 뗄 생각이셨습니까?”
부장이 물었다.
“원래가 명부판관에게 맡길 싸움이었다. 한데 벌써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우리가 개입할 여지가 없어.”
“장군. 혹시 대장군님께서 그런 명령을 주신 겁니까?”
부장이 다시 물었다.
“후후! 하하하! 멍청한 질문.”
도독이 크게 웃었다.
“으음!”
부장은 다시 침음을 흘렸다.
그렇다. 자신이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이었다. 대장군께서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따르고 안 따르고는 전장에 선 사람의 몫이다. 검을 들고 싸우는 사람의 판단이 최우선이다.
수군도독 진일호는 말 안 듣기로 유명한 장군이다.
사전에 계획한 대로 움직이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일 때가 꽤 많다. 하지만 나중에 결과를 보면 도독의 판단이 항상 옳았다. 계획대로 움직였으면 크게 낭패당했다.
군명(軍命)을 어기고도 수군도독까지 된 데는 ‘패하지 않는 장군’이기 때문이다.
도독은 본인이 아니다 싶으면 그 누가 명령해도 듣지 않는다.
그러면 손을 뗀다는 판단은 도독의 냉철한 분석과 결정에 기인한 것인가?
그때, 도독이 말했다.
“이 싸움은 우리 싸움이다. 왜적이 침입했는데 무인에게 싸움을 맡겨서야 쓰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나서야 할 싸움인 거지. 설혹 무인이 도움을 주겠다고 해도 거절했어야 마땅한 것…… 하지만 이 명령은 받들 수밖에 없다.”
“받…… 받듭니까?”
수군도독이 명령을 받든다고 말했다. 전장에 선 장수의 판단보다도 명령을 우선한다는 뜻이다.
“그럼 혹시 이 명령이……?”
도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황상께서 직접!’
부장은 입을 쩍 벌렸다.
황상은 전장에 개입하지 않는다. 전술에 대한 명령은 더더욱 내리지 않는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직 전장에 선 장군들의 몫이다. 황상이 전장 상황까지 파악한 후에 명령을 내릴 수는 없지 않은가.
황상은 명령은 사전 명령이다.
전장을 보지 않은 채, 무조건 아걸에게 맡기라고 했다.
이런 명령은 정말 터무니없다. 아걸을 죽이겠다는 거다. 어떻게 한 사람이 육만 대병을 상대할 수 있나. 아닌가? 전쟁하지 말고 은밀히 잠입해서 두주만 척살하라는 명령이었나?
설혹 황상이 그렇게 명령했을지라도 지금은 그럴 계제가 아닌 것 같다.
동영 수군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사해협에 뭉쳐있던 배들이 슬슬 대만도를 향해서 다가서고 있다. 금방이라도 상륙해서 살육할 것처럼 으르렁거린다. 배에 탄 군졸들도 완전 무장상태란다.
당연히 이쪽도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대만도에 상륙할 기미만 보여도 대포가 터질 것이다. 전선 삼백 척이 일제히 달려든다.
어느 한 명이라도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기만 하면 당장 전쟁이 발발한다.
그토록 긴박한 상황인데…… 아걸 혼자 보낸다고?
“눈을 떼지 말고 지켜봐라. 어떻게 움직이는지.”
도독이 신중하게 말했다.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어둠이 밀려나면서 동녘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스읏! 스슷! 스으윽!
범선 주위에 늘어서 있던 소선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배들이 물러갑니다.”
보고가 즉시 들어왔다.
부장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뱃전으로 나가서 소선들을 쳐다봤다.
보고와 같다. 범선 주위에 늘어서 있던 작은 배들이 일제히 빠져나가고 있다.
저들은 범선 주위에 있을 때만 해도 도독의 전선을 염려하지 않았다. 적대적 입장이니 당장 공격당할 수도 있는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범선만 지켰다.
저들은 물러날 때도 도독의 배는 염려하지 않는다.
짐작은 했지만, 일반 동영 수군이 아니다. 어떤 공격도 무력화시킬 자신이 있는 것을 보면 동영 인자들로 추측된다. 그런 자들이 범선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물러선다.
아걸의 싸움이 끝났다. 그리고 아걸이 이겼다.
만약 저들이 배 위로 올라선다면 당장 아걸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일반 수군이라면 목숨을 건질지도 모르지만, 동영 인자라면 틀림없이 죽는다.
저들은 복주 항구에서 너무 지독한 짓을 저질렀다.
“잘 지켜보고 있어! 난 장군께 보고할 테니.”
부장은 재빨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배를 끌어라.”
“네? 명부판관을 저희 배로 옮기는 쪽이 더 빠르지 않을까 합니다만…….”
“거리를 두자. 서로 그게 좋겠어. 안면을 트면 어려울 때 도와주지 않을 수 없으니까. 서로 모르는 게 낫지. 배에 타지는 못해도 배를 끌어줄 수는 있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로 끌어갈지……?”
대만도에서 쉬게 할 것인지 묻는 것이다.
북쪽 항구로 들어가면 대만도를 가로지를 동안 쉴 수 있다. 반면에 남쪽 항구로 가면 바로 파사해협과 마주친다. 길게 쉬어봤자 반나절 쉬면 그만이다.
“저 배에는 음식과 물이 넉넉히 있을 것이다. 저들도 자신들이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물자가 넉넉하니 대만도를 돌아서 곧장 파사해협으로 간다.”
“장군. 명부판관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이라도 하신 후에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만.”
“명부판관은 무인이다.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해. 행동 역시 마찬가지. 파사해협에 도착하면 본인이 스스로 알아서 움직일 것이다. 무인은 우리와 움직이는 방식이 달라.”
“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배를 끌겠습니다.”
부장이 군례를 취했다.
척! 척! 척! 척!
난간으로 쇠갈퀴가 날아들었다.
배를 근접시키고 도선 할 때 사용하는 칼귀 수십 개가 가볍게 범선을 낚아챘다.
스슷! 스스스슷!
전선은 범선을 이끌고 빠르게 이동했다.
스읏!
범선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로 물든 무복을 입은 자, 허리에 반철도를 꽂고 있는 사람…… 아걸이다.
자신이 흘린 피인지 적이 흘린 피인지 알 수 없으나 옷에 묻은 핏물이 확연히 보인다.
수군도독 진일호가 망루 난간으로 갔다. 그리고 아걸을 향해 두 손 모아 포권했다.
아걸도 포권으로 답했다.
두 사람은 포권을 푼 후, 서로를 쳐다봤다. 상대가 누군지 안다.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안다.
아걸은 입 한 번 떼지 않고 뒤돌아서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왜 자신을 전선으로 초대하지 않는지, 왜 굳이 힘들게 범선을 끌고 하는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목청을 살짝만 높여도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가 있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무엇을 할지 알고 있는 듯했다.
“으음!”
부장은 신음을 흘렸다.
배를 끌라는 명령은 도독이 내렸는데 괜히 자신이 미안했다.
아걸을 정말 파사해협 한복판으로 던져놓아도 될까? 그가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고 해도 상대는 대군인데. 아걸은 두주만 상대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저쪽은 이미 모든 전선이 움직이고 있는 상황인데.
도독 말처럼 이 싸움은 군대가 맡아야 한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다. 전쟁이 벌어졌는데 무인 한 사람에게 수습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왜 이렇게 무리한 일을 하지?
이런 명령은 아무나 생각할 수 없다. 너무도 황당무계하기에. 또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다. 목숨이 여벌로 몇 개 더 있다면 모를까 죽는 게 너무 눈에 보이지 않나.
이런 명령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다. 인간이 받아들일 명령도 아니다.
하지만 황상이 명령했고 당사자인 아걸이 받아들였다.
황상이나 아걸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인가? 또 그런 명령을 묵묵히 수행하는 도둑은 뭔가? 도독도 사람이 아닌가?
설마 적선을 뚫고 두주가 있는 전선으로 은밀히 숨어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육지에서 쓰는 은신술을 바다에서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바다에서 은밀히 스며드는 방법은 잠영밖에 없다. 한데 전선이 이십 척 이상 되면 밤낮으로 경계한다. 바닷속 침입도 가시 그물을 쳐놓고 방비한다.
잠영으로도 스며들 수가 없다.
하물며 두주가 적선 이백여 척 중 어느 배에 타고 있는지는 아직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백여 척을 일일이 수소문하면서 찾아야 할 지경이다.
누가 봐도 아걸은 죽음 앞에 섰다.
“천천히. 노를 천천히 저어라. 범선이 흔들리지 않게. 최대한 정중하게 모셔!”
부장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