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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537화 (537/600)

第百八章 무형영웅(無形英雄) (2)

‘이 사람, 정말 안 오네.’

아걸은 높은 돛대 위에 누워서 검은 바다를 바라봤다.

꽈앙! 꽈아아아앙!

일다경 전까지만 해도 아걸이 머물렀던 전선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이제야 화약고가 터졌다.

아걸은 싸움을 피하지도 않았다. 도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두주를 이긴 후에도 전장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치열하게 싸우지도 않았다.

아걸은 은밀하게 다가가서 치고 빠지는 유격전만 벌였다.

작은 소선을 빼앗아서 빠져나가는 방법도 있었다. 아걸 자신이 빠져나가고자 한다면 앞을 막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적들은 당장 포격을 가해오겠지만.

아걸 스스로가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아걸은 진일호 수군 도독을 생각했다.

자신이 이곳에 보낸 황상의 뜻이 정말 두주에게만 있을까? 기왕이면 수군을 도와달라는 뜻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쉽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대만도에 머무는 수군이 꿈쩍하지 않고 있다. 자신이 두주에게 이겼다는 사실은 벌써 도독의 귀에 들어갔을 터인데, 그런 일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싸움에 대한 소식을 못 들었을까? 아니다. 수군은 그만한 정보망쯤은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아걸은 잠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얼굴만 보았던 진일호 장군을 떠올렸다.

한눈에 봐도 강맹한 장군이다. 머리를 쓰는 지장(智將)이라기보다는 싸움판에 뛰어들어서 칼을 휘두르는 맹장이다. 싸울 기회만 있으면 와락 달려드는 용장이다.

겉모습은 그랬다.

하지만 사실, 진일호 장군은 대단한 지장이다. 용장이면서 지혜도 겸비했다.

그런 장군이 두주가 죽고 동영 인자들이 물러섰다는 말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는다.

전쟁을 철저히 회피한다는 인상이다.

싸우지 말라는 황명이 있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아걸은 도독의 눈에서 싸움을 기다리는 늑대의 잔인함을 읽었다. 기회를 노리는 맹수의 눈이다.

도독은 싸울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토록 적진이 혼란스러운데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일홀문주가 적들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는다.

도독은 아걸과 황제의 관계를 안다. 아걸과 호황위 군주 몽설의 관계도 안다.

한 마디로 매우 중요한 인사다.

이런 식으로 내버려 두었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목숨으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는다. 왜? 이유 없는 행동은 없다.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또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아걸은 수군이 움직일 때까지 적진에 머물 생각이다.

꽈앙! 꽈아아앙!

화약은 안택선 한 척을 절반이나 무너트렸다.

당장 침몰하지는 않았지만, 곧 침몰할 것으로 보인다. 어찌어찌 침몰은 면하더라도 전선의 기능은 상실했다.

벌써 여섯 척째다.

‘오늘은 여기서 잠을 자고…….’

아걸은 높다란 돛대 위에서 잠을 청했다.

“엇! 놈이닷!”

“일홀문주다!”

막 아침을 먹으려던 수군들이 화들짝 놀라서 병기를 움켜잡았다.

아걸이 당당히 선실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적군을 보고도 긴장조차 하지 않는다. 지옥의 마병처럼 섬뜩한 반철도를 들고 태연히 그들을 향해서 걸어갔다.

슷!

누군가가 아걸을 향해 창을 내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반철도가 그를 겨눴다.

창을 내지르면 넌 죽는다.

아걸의 눈빛에서 살광이 번뜩였다.

수군은 병기를 움켜잡기만 할 뿐, 아걸에게 덤비지 못했다.

저벅! 저벅!

아걸은 자신을 겨누고 있는 수십 자루의 병기는 완전히 무시했다. 어떤 식으로 공격해와도 대응할 수 있다. 하물며 지금은 저들이 어떤 식으로 훈련을 받았는지도 안다. 창 쓰는 법, 칼 쓰는 법이 비슷비슷해서 알았다.

슷!

아걸은 선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주먹밥을 주워들었다.

“맨날 이런 것만 먹나? 아무리 적진이라고 해도 밥은 제대로 먹어야지.”

수군 중에 중원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걸은 선 채로 주먹밥을 먹었다. 그리고 한쪽으로 걸어가서 물통에 든 물을 바가지로 떠서 마셨다.

전선에서 며칠 동안 분주히 오가다 보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환히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내 집처럼 자유롭게 오가면서 마시고, 먹을 수 있다.

아걸이 알아낸 것이 있으면 적들도 알아낸 것이 있다.

아걸은 공격해오지 않는 자는 치지 않는다. 하지만 공격을 하면 처절하게 죽인다. 시신마저도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물어뜯는다.

수군들은 아걸이 아침을 먹고 물까지 마실 동안 공격하지 못했다. 병기를 들고 노려보기는 했지만,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선실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미 많이 봤다.

아걸이 넓은 장소로 나갔을 때…… 활이나 포로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다.

“맛은 없어도 배는 든든하네. 잘 먹었어. 누구 아침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걸이 수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쒜에에엑! 쒜엑! 꽈앙!

화살이 날아와 난간에 틀어박혔다. 포탄이 갑판을 사정없이 으깨버렸다.

“아! 좀 쉬고 싶은데. 잠시 쉬는 꼴을 못 보내.”

아걸은 방패를 들고 일어섰다.

화살을 막는 데는 방패처럼 요긴한 물건이 없다. 신법으로 피해낼 수도 있지만 뭐 하러 그러나. 간단히 막을 수 있는데, 왜 힘들게 움직이나.

모양이나 형식을 볼 필요가 없다. 최상의 효과를 얻어내는 방법이 있다면 꼴이 우스워지더라도 당장 쓴다. 싸움할 때는 체면도 버린다.

쒜에에엑!

아걸은 신형을 쏘아냈다.

이쪽 배에서 다른 배로 건너뛰었다.

한배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오래 머물면 저들은 배를 폭발시켜 버린다. 전선 한 척을 희생양 해서 아걸을 죽이고자 한다. 당연히 포탄이 집중된다.

반자포망은 지겹게 당했다.

그런 포격이 터질 때마다 배에 탄 수군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간다. 하지만 정장은 수하들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걸을 잡을 생각만 한다.

아걸은 바다에 펼쳐진 그물도 봤다.

바닷속으로 뛰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짐작된다. 그러니 바다로 뛰어들지 않는다.

쒜에에엑! 쒜에엑!

수군과 직접 부딪치지 않는다. 부딪치면 죽여야 해서 일부러 피한다. 화살과 포격은 용인한다. 저들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다행스럽게도 저들은 배와 배의 간격을 좁혔다.

같은 배에 탄 자들은 공격하지 못하고 피하기 급급하다. 공격하는 자들은 다른 배에 탄 자들이다.

이미 아걸의 무서움이 동영군을 뒤흔들고 있다.

쉬이이잇!

아걸은 적의 화살을 피해서 재빠르게 움직였다.

“잡을 수 없습니다. 놔줘야 합니다.”

“희생만 커질 뿐입니다.”

장군들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걸이 정말 얄밉다. 아걸은 화살이 집중되는 지점을 안다. 그래서 미리 피해버린다. 포격이 가해질 곳도 안다. 가만히 서 있다가 포가 쏘아지면 옆으로 슬쩍 이동한다.

괜히 애꿎은 배만 파손된다.

아예 놈이 타고 있는 배를 날려버리려고 하면 놈은 바로 이동한다. 다른 배로 건너뛴다.

무슨 짓을 해도 잡지 못한다.

“으음! 이런……!”

타카스기 장군은 꽉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번 전쟁에는 무림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안다. 그래서 두주의 명령을 충실히 받았다. 지금처럼 아걸 같은 놈이 불쑥 나타나서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면 머리가 아파진다.

그런데 딱 그런 함정에 빠졌다.

“파손된 안택선이 일곱 척, 사망자는 삼백이십 명. 벼룩 잡으려다 초가 태웁니다. 보내주셔야 합니다.”

장군이 또다시 건의했다.

안택선이 침몰한 것에 비하면 사망자가 매우 적다. 일곱 척이 침몰했다면 못해도 이천여 명은 죽었어야 한다. 아무리 희생자를 적게 잡아도 말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걸은 최대한 살상을 줄이고 있다.

“으음!”

타카스기 장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멀리서 고동 소리가 울렸다.

‘이제 온 거야?’

아걸은 수평선에 쫙 늘어진 전선들을 봤다.

진일로 도독이 드디어 움직였다. 대만도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배들이 일제히 일자진(一字陣)을 펼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장군기를 앞세우고.

“왔으면 내 할 일은 끝났지?”

아걸은 즉시 점 찍어 놓은 작은 배로 신형을 쏘아냈다.

스으읏!

아걸이 배로 뛰어내리자, 노를 젓고 있던 수군 두 명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아걸은 반철도로 그들을 겨눌 뿐, 쳐내지 않았다.

아니, 마음속으로는 이미 쳐냈다. 뱃전에 내려섰을 때, 이들 두 명은 풀썩풀썩 쓰러졌다.

아걸의 팔로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몸으로 친다.

팔로 칼을 쳐내면 일정한 궤적이 그려진다. 칼이 어느 방향에서 떨어질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팔이 몸과 반철도를 이은 줄일 때는 칼의 궤적을 짐작하기가 힘들어진다. 어디서 어떤 칼이 날아올지 모른다.

물론 상승 고수와 싸웠을 때 일어나는 일들이다. 수군 두 명을 베는 데는 이런 칼을 쓰지 않아도 된다.

스읏!

아걸이 반철도로 바다를 가리키자, 수군들이 군말 없이 몸을 날려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걸은 그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다. 허공에 신형을 띄우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가 날아왔는데, 아걸을 보지 못한 듯 조용하다.

아걸은 소선에 내린 즉시 방패를 세워서 사방에 둘러칠 생각이었다. 머리 위쪽으로도 방패를 대야 한다. 그래야 폭우처럼 쏟아지는 화살 비를 막아낼 수 있다.

그런데……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다.

“포기했나? 날 못 볼 리가 없는데. 어쨌든 내 할 일은 끝났으니까. 댔다. 자! 이제 가볼까!”

아걸은 천천히 노를 저었다.

동영군은 그를 가로막을 수 있다. 예전 같으면 당장 전선을 움직여서 앞을 막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한다. 이제 동영군은 아걸에게만 집중하지 못한다. 대만도에서 수군이 밀려오고 있다. 그러니 아걸이 떠나주는 게 오히려 고마울 수도 있다.

아걸과의 싸움은 전투이지만 진일호와의 싸움은 전쟁이다.

척척척척! 척척척!

동영군이 수군에 맞서서 첨각진(尖角陣)을 펼쳐나갔다.

아걸이 소선을 타고 빠져나가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걸에게 패하면 몇 사람 죽는 것으로 그친다. 하지만 수군을 막지 못하면 동영군은 전멸한다. 전선 이백여 척 육만 대군이 말끔히 수장된다.

삐걱! 삐걱! 촤아아악!

아걸이 탄 소선과 수군이 탄 대형 사선(沙船)이 교차했다.

아걸이 탄 작은 배는 여섯 명이 노를 젓는다. 대형 사선은 쌀 천오백 석을 실을 수 있다. 길이가 백 척, 너비라 열여덟 척이다. 작은 물고기 옆으로 고래가 지나간다.

사선들은 아걸이 지나가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군사들이 뱃전에 늘어서서 창을 숙여 군례를 취했다. 검을 든 자는 검을 뽑아서 하단으로 늘어트렸다. 장병 모두가 아걸에게 존경을 표시한다. 하지만 아걸을 위해서 밧줄을 늘어뜨린다거나 승선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람들 참 야박하네. 인사를 한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가라는 거야? 너무 실컷 부려먹었어. 공짜로 너무 많이 일해줬나?”

아걸은 피식 웃었다.

나라를 위해서 공짜로 일해준 것이 아니다. 아걸은 이번 싸움에서 자신의 일홀도를 확고히 굳혔다.

사실은 아걸 자신도 일홀도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두주와 싸우기 전에 소무정가에 들려서 일부러 노가주와 비무를 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일월도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만 했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해서는 말이 안 된다. 이것이라는 느낌이 확 일어나야 한다. 머릿속으로 정리된 논리가 아니라 몸이 깨닫고 펼쳐야 한다.

그것을 두주와의 싸움에서 얻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재미없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일홀도가 뭐냐고 물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그저 칼과 하나가 되어서 싸운다? 그 정도밖에 말할 수 없다.

가장 멋있게 설명할 수 있는 무학은 몽설의 혈검경이다.

상궁에 니환일검을 만들어서 운용한다는 자체가 경이적이다. 실제로 니환일검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설명을 들으면 멋있다는 느낌이 팍 든다.

아걸의 일홀도는 전혀 멋있지 않다.

이제 막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초출에게 ‘정신 차리지 못할까!’ 하고 혼내는 말, 바로 그것이 일홀도다.

정신 차려서 검을 든다.

자신의 모든 것을 검 한 자루에 몰아넣는다.

이것은 몰안이 아니다. 몰안도 단지 한 가지 방편일 뿐이다. 도신일체도 방편이다.

정신 차려서 싸우는 것, 그것 이외에 어떤 칼도 필요치 않다.

아걸은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가는 배에서 검을 뽑아 군례를 취하고 있는 장군을 봤다.

수군도독 진일호 장군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아걸을 응시하고 있다.

아걸은 손을 들어서 인사했다.

진일호 장군을 손을 들어서 검을 가슴에 댔다.

스읏! 촤아아악!

두 배가 엇비켜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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