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540화 (540/600)

第百八章 무형영웅(無形英雄) (5)

아아악!

비명이 울렸다.

진개는 눈을 떴다.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비명이 꿈결처럼 아련하게 들려온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방금 꾸었던 꿈속에서 들린 소리 같다. 사실이 그렇다. 성검문에서 비명이 터질 리 있나.

크으윽!

저미한 신음이 뒤를 이었다.

그래도 진개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지? 어젯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는데. 만취해서 잠자리에 들었고…… 느닷없이 비명이라. 습격인가? 누가 감히 성검문을 공격하지? 때가 됐나?

“아함!”

진개는 길게 하품했다.

이십사 위문이 탕산 싸움에서 멸절당한 이후, 성검문은 거의 폐문 상태다. 정식으로 봉문을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오가는 사람이 뚝 끊겼다.

실질적으로는 봉문한 것이나 진배없다.

이십사 위문이 패배한 후, 진개는 곧바로 성검문에서 외인을 방출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놀고먹으면 되나. 여긴 문 닫았으니까 떠나도록.”

사실 그들은 그저 성검문이라는 문파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 아니다. 문주 허도기의 수족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 반발도 있을 것으로 봤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릴 이렇게 마음대로 내보내도 되나? 일단 일을 벌이기 전에 문주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공봉 중 유일하게 진개의 술친구 노릇을 하던 구관청이 말했다.

술을 마시면서 어느 정도 가까워진 사이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문주의 위세를 믿고 하는 말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공봉들은 진개를 문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허도기가 없는 동안 잠시 성검문을 이끄는 대리인일 뿐이다.

스릉!

진개는 검을 뽑았다.

“내가 거의 반은 미친놈이잖아? 팔도 하나 잘렸고, 성격도 개차반이고, 머리에 든 것도 없어. 도대체가 이런 위대한 성검문을 이어받을 몸뚱이는 아니라는 거지. 그런데도 그놈의 욕심이 뭔지. 그래서 욕심을 부린 김에 다 가지려고. 꺼져.”

“말은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어. 심한 말을 할 때는 가려서 하라고. 그래도 몇 날 며칠을 서로 술로 외로움을 달랬던 사이인데, 함부로 말하면 되나.”

“그래서 이렇게 말해주는 거야. 죽이고 싶지 않아서. 목욕하고 올 동안 가도록 해. 그게 신상에 좋아. 수틀리면 다 벨 생각이거든. 킥킥! 나 미친놈이야.”

진개는 정말 목욕을 했다.

목욕하면서 공봉들이 남아 있으면 베어버려야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린 말일 뿐, 아무 의미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공봉들을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만은 진심이다.

군식구를 다 털어내고 그냥 조용히 있고 싶다.

성검문을 자신이 이어받을지 아니면 내팽개쳐질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신경 쓰는 사람 없이 그냥 조용히만 있고 싶다. 오직 그 생각뿐이다.

공봉들은 진개가 목욕하는 동안 짐을 꾸렸다. 그리고 일제히 문밖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진개에게서 살의를 느꼈다.

마공 분뢰절맥은 마단을 복용하면서 수련하는 악공(惡功)이다. 약간만 살의를 일으켜도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변한다. 마기가 줄줄이 풀어져 나온다.

공봉들은 성검문에서 물러섰지만,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식으로 초도성 객잔에 여장을 풀었다. 진개가 정말 살검을 들 것 같으니까, 검으로는 진개를 당할 수 없으니까 일단 몸만 피한 것이다.

멀리 가버렸으면 좋겠는데, 신경 쓰이게 떠나지도 않고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아무려면 어떤가. 이걸로 만족한다.

“문 열지 마. 문 열면 죽는다.”

“비무 신청이 들어오면 그것도 내칩니까.”

“네가 상대할 수 있으면 받고.”

진개는 그날부터 술을 탐닉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술부터 찾았다. 그렇게 찾은 술이 잠들 때까지 이어졌다. 곡기는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진개는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이십사 위문…… 전력을 기울였는데. 후후!”

지금도 진개의 머릿속에는 탕산 싸움이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이십사 위문이 무너질 수 있나? 그런데 무너졌다. 실질적으로 중원을 지배하던 거대한 기둥이 뚝 분질러졌다.

이십사 위문이 패한 것은 아걸이 야천을 장악한 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소축십검을 전부 무너트렸을 때보다 충격이 더 컸다.

소축십검과는 일대일의 싸움을 벌였다. 그런 싸움에서는 오직 무공이 승패를 판가름한다. 조금이라도 강한 자, 혹은 운이 좋은 자가 이긴다.

하지만 이십사 위문과의 싸움은 중원 대 일인의 싸움이었다. 아걸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인 것이다.

아걸이 성한 몸도 아니었다. 군진(軍陣)과 칠절려에 크게 당해서 육신이 붕괴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런 몸으로 초가평과 싸워서 몸이 꿰뚫렸다.

가슴에 검이 꽂혔다.

아걸은 의식불명 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서 탕산 싸움을 벌였다.

중원제일도? 솔직히 그런 말로는 부족하다. 아걸은 천하제일도다.

그러면 아걸이 강해졌기 때문에 술을 마시나? 진개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아냐!

사람은 누구나 몰라볼 정도로 발전할 수 있다. 땅바닥으로 떨어져서 지렁이가 될 수도 있고 하늘에 오른 용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무궁무진한 변화를 일으킬 수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걸의 발전도 별것 아니다.

무공에 무지했던 자가 절세고수의 도움을 받아서 하루아침에 고수가 된 사례는 많다. 아니면 정말 어디서 전설로만 전해지는 용의 진력을 흡취해서 하루아침에 천신이 되었을 수도 있다.

아걸이 그런 식으로 고수가 되었다면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아걸의 성취는 노력으로 일구어졌다.

처음, 아걸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해도 해도 그저 그런 무인이었다.

솔직히 아걸에게 그저 그런 부인이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아걸은 대단히 뛰어난 무인이다. 하지만 무임에 아걸 정도의 무인은 많았다는 뜻이다.

풍도곡 살귀들이 악어를 능가했고, 소축십검이 아걸을 짓눌렀다.

아걸은 그들과 싸웠다. 싸움하면서 더, 더, 더 강해졌다.

아걸의 칼은 기연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스스로 성취해냈다. 가장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직히 아걸은 무림에 출두할 당시만 해도 활검문 문주조차 꺾지 못했다. 활검문주가 소축십검을 본떠서 만든 제자들, 십검을 간신히 상대할 무렵이었다.

그런 자가 천하제일도로 성장하는 동안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바로 이 점이 진개로 하여금 술을 찾게 만들었다.

진기는 자신의 무재가 아걸보다 못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축십검의 무재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소축십검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대단한 무재다. 이십사 위문 문주만 해도 외팔이 진개의 검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런 무재가 다른 사람이 천하제일도로 성장하는 동안 제자리에 정체해 있었다.

그렇다고 진개가 가만히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계속 조명십해를 탐구했다. 팔이 잘린 후에는 마공까지 손댔다. 그런데도 뒤처지고 말았다.

아걸이 거대한 철벽으로 느껴진다.

도저히 넘지 못할 철벽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철벽은 성공문을 적으로 여긴다.

성검문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아걸이 성검문을 치겠다고 마음먹으면 바로 무너진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다.

아걸은 몇 번이고 성공문을 향해 칼을 들었다.

혈도비자로서 칼을 들었고, 명부판관으로 칼을 들었다.

솔직히 명부판관으로 칼을 든 이후부터 성검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따가워졌다. 성검문에 마치 커다란 비리라도 있는 것처럼 눈치를 준다.

지금 같아서는 아걸이 성검문을 몰락시켜도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아걸은 전쟁 영웅까지 되었다.

아걸이 남해에서 벌인 일은 입에서 입을 통해 중원 전역에 퍼져 나가고 있다.

야천을 들이쳐서 민초를 핍박하던 파락호를 죽였다. 일단 외형적으로나마 흑도 세력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부나 명예는 일절 취하지 않은 채 홀연히 떠났다.

그리고는 남해로 가서 동영 수군을 격멸했다.

여기서 아걸의 싸움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무인의 눈에는 두주와의 싸움이 눈에 확 들어온다. 동영제일검을 누른 부분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육만 대 일의 싸움만 본다.

한 사람이 육만 명과 싸우다니!

그게 아걸이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 한, 아걸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걸에게 검을 들이대는 사람이 오히려 역적이 될 판이다. 그러니 아걸이 성검문을 향할 때 성검문은 무너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되나? 무서워서 꼬리라도 말아야 하나? 꼬리를 말면 어디로 가나? 갈 곳도 없다.

진개의 목숨은 아걸이 잠시 맡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아걸이 회수하려고 들면 그 즉시 사라진다.

이러니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나.

공봉들을 내쫓은 것은 그들이 허도기의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성검문에 있어봤자 괜히 거치적거리기만 한다. 그만한 신경도 쓰기 싫었다. 모든 게 귀찮다.

아아아악!

비명이 터진다.

아걸이 왔나? 드디어 성검문의 현판을 뗄 때가 온 건가? 한데 왜 이렇게 요란스럽게 죽이지? 그냥 조용히 임시 문주인 자신의 몸만 베면 끝날 것을.

진개는 몸을 일으켰다.

이런 날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자신이 아걸의 상대가 안 되는 것은 분명하다.

아걸은 사부와 격전을 벌였다. 일 초 발검술에 당하지 않고 몇 시진이고 싸웠다.

사부에게 그만큼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때 이미 아걸의 무공은 증명된 것이다.

‘그래도 싸워야겠지. 내가 비록 개차반 망나니지만, 물러설 곳도 없잖아. 갈 곳도 없고. 인제 와서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을 수는 없지. 소축십검으로 살아온 날이 몇 년인데.’

진개는 실소를 흘리면서 검을 집어 들었다.

아아아악!

비명이 처절하게 울린다.

성검문 무인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청에 모였다.

진개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피난처로 대청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저벅! 저벅!

진개는 대청 한가운데로 걸어가서 사부가 앉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심드렁한 눈으로 무인들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졸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권태롭다.

“누구냐?”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지만 곁에 있던 무인은 즉시 대답했다.

“모릅니다. 느닷없이 나타나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상대가 누군지 모른다고? 아걸이 아니야?”

“네.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근데 너희들은 왜 여기 있어? 가서 싸워야지.”

“싸웠습니다만 패했습니다.”

“패했는데 죽지 않았다고?”

진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무인들을 쳐다봤다.

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로 다른 곳을 보면서 진개의 눈길을 피했다.

“후후! 너희들은 선택받은 놈들이군. 저 비명과 연관이 있어. 모반인가?”

진개가 심드렁하게 웃으며 말했다.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어차피 성검문을 분해 직전이다. 아걸만 나타나면 무너진다. 희망이 없는 곳을 가져서 무엇하겠다고 저리 날뛰나.

살겁을 일으키는 자는 곧 대청으로 올 것이다. 그러니 찾아 나설 필요도 없다.

‘한심한 놈들.’

진개는 대청에 모인 자들을 쓸어봤다. 그때,

덜컹!

대청 문이 부서질 듯 크게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묵직한 모습을 드러냈다.

“엇!”

진개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사부! 성검문주! 공부! 일초단검!

허도기가 걸어온다.

지금 사막에 있는 줄 알았는데, 조위 장군과 대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중원에 들어왔나?

저벅! 저벅!

사부의 뒤를 이어서 일기장군 하원랑과 적위군장 사구정이 들어섰다.

두 사람은 갑옷을 입었다. 갑옷에는 방금 묻은 피가 선명하게 찍혔다.

성검문에서 칼을 휘두른 사람은…… 이 두 사람이 이끄는 군인이다.

진개는 비로소 대청에 모인 무인들이 왜 이토록 순순히 물러섰는지 이해했다.

사실 이들은 싸워보지도 않았다. 그러니 패한 적도 없다.

일기장군과 적위군장이 물러서라고 한마디 했을 때 얌전히 물러섰다.

장군들은 누구를 벤 건가? 성검문에 뿌리박은 간자들이다.

취화원, 적랑대, 전보영, 야천…… 온갖 곳에서 심어놓은 간자들이 싹 정리되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진개가 외팔로 검을 가슴에 대며 읍했다.

“술에 절었구나. 소축에 가서 목욕이나 해라. 오랜만에 왔더니 집안이 썩어 문드러졌어. 이래서야 어디…… 쯧!”

허도기가 못마땅한 눈으로 진개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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