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九章 만부부당(萬夫不當) (1)
한 사람이 만 명을 대신할 때가 있다.
천군만마가 질주해 오는데 수많은 병사와 군마는 보이지 않고 딱 한 사람, 맨 앞에서 질주해 오는 딱 한 사람만 유독 눈에 뜨일 때가 있다.
한 사람의 존재가 천군만마를 대신하는 것이다.
천군만마보다도 앞장서서 달려오는 한 사람이 더욱 무섭게 느껴지는 경우다.
성검문주 허도기가 그런 존재다.
성검문은 당장 오늘 문을 닫아걸어도 하등 이상하지 않았다. 발전이라는 말보다는 퇴색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옛날에는 강했지만, 지금은 쇠락한 문파일 뿐이다.
성검문은 그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성검문을 떠받들던 인재와 문파들이 속절없이 사라졌다. 소축십검이 죽었고, 이십사 위문은 말도 안 되는 패배를 당했다. 탕산 싸움에서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지만, 후유증 때문에 무림의 지배력을 잃었다.
성검문은 더는 옛날의 성검문이 아니다.
이것은 확실하다. 지금의 성검문은 너무 쇠락해서 진개가 아니라 어느 누가 문주가 되더라도 성검문을 천하 무림의 태두로 올려놓기에는 벅차 보인다.
모두 다 그렇게 생각했다. 성검문주 허도기가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는.
공부가 돌아오자 당장 상황이 변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싶게 빠른 속도로 무림이 정리 정돈되고 있다.
“공부가 돌아왔다고?”
전보영주 허굉우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전임 영주 탁호가 피살되고, 그 뒤를 이어서 전보영을 맡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불면의 밤이 지속되고 있다. 어느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든 적이 없다.
요즘 들어서는 특히 잠들 수 없다. 여기저기서 갖은 사건들이 빵빵 터지는 바람에 눈코 뜰 새가 없다. 세외팔국, 동영 인자, 허도기, 동영 인자들…….
모든 사건이 전력을 기울여서 조사해야 할 중대 사건들이다.
그런 시점에서 성검문을 버리고 떠난 허도기가 다시 돌아오는 의외의 사건이 벌어졌다.
“네. 돌아온 지 사흘 되었다고 합니다.”
일부 부장이 말했다.
“공부는 조위 장군과 맞서 있잖아?”
허굉우가 이해할 수 없어서 되물었다.
공부가 함곡관에서 조위 장군과 맞서 있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안다. 상황도 좋지 않아서 북방 민족과 부딪치기 일보 직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군을 중원 땅에 끌어들인 매국노!
그런 사람이 느닷없이 중원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중원 땅을 밟았을까? 공부는 황상의 진노도 무섭지 않은가? 지금도 조위 장군은 함곡관에서 갑옷도 벗지 못하고 있는데.
“공부가 언제 중원으로 들어왔는지 아는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주변에 사람을 배치해 놨는데…… 어떤 연락도 없는 것을 보면 모두 제거된 듯합니다.”
“음!”
허굉우는 침음했다.
“주변을 뒤지면 공부를 잡아넣을 거리가 있을 것 같아서 샅샅이 살펴봤는데…… 주변 정리를 워낙 철저히 하는 사람이라서…… 찾지 못했습니다.”
이 부장이 답답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렇겠지. 공부 아닌가.”
허굉우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쳤다.
회의를 거듭해보지만, 공부 허도기를 잡아넣을 구실이 잡히지 않는다.
허도기는 그 누구도 자신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중원에 들어섰다.
사실이 그렇다.
공부는 누가 봐도 대역죄인이다. 나라를 전쟁의 위기로 몰아넣는 자다. 한데 그의 죄를 물을 길이 없다. 공부가 세외팔국을 돌아다니면서 이민족을 충동질했다는 증거가 없다.
공부의 말 한마디 했다고 세외팔국이 움직여?
사실이다. 세외팔국은 공부의 말을 쫓아서 움직였다. 하지만 증명할 수가 없다. 누군가를 잡아들이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손톱만 한 증거도 없다.
모두 공부가 다시는 중원 땅을 밟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공부는 비웃기라도 하듯 중원에 들어섰다. 그러자 정작 그에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전보영은 약간의 의심이라도 있는 자라면 가차 없이 잡아들인다. 증거가 있건 없건 잡아들인 후에 고문을 통해서 실토받는다. 없는 죄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공부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다.
“지금 뭘 하고 있지?”
“성검문을 정비하고 있습니다.”
“그게 정비한다고 되나? 성검문은 이미…… 꺼진 불씨를 되살릴 수 있다는 건가. 음! 무림…… 설마 무림을 통해서? 무림! 무림 동태는 어때? 이십사 위문이 무너졌으니 세력 판도가 바뀌었을 텐데, 왜 아무 보고도 없지?”
전보영주가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변화가 없습니다.”
“뭐?”
“공부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돌자마자 무림 문파들이 속속 사자를 보내고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네. 일종의 충성 맹세인 셈이죠. 구대 문파, 오대 세가…… 세력이 큰 곳일 수도 즉시 사람을 보내서 귀향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무림 동태를 담당하고 있는 삼부 부장이 말했다.
예전에…… 허도기는 소축십검인 초가평을 시켜서 은밀히 정적을 제거했다. 대문파의 장문인, 장로 등등 비중 있던 인사들이 결전의 형태를 빌어서 속속 쓰러졌다.
그들은 무너트린 형식은 결전이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허도기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제거되었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각 문파는 초가평 개인이 성검문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이 스스로 벌인 일이기 때문에 성검문에 항의도 할 수 없었다. 굳이 복수하자면 초가평에게 결전을 청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누가 소축십검과 싸우려고 할까?
성검문은 혈무대 비무를 개방해 놓고 있지만, 도전자가 없다. 아걸에게 무너져서 그들이 약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아걸이 나타나기 전까지 소축십검은 무적이었다.
소축십검과 싸울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정적을 제거하면서도 항의조차 못 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공부의 일 처리 방법이다.
전보영은 이런 사실을 진작 수집했다. 하지만 그때는 초가평이 왜 무림 명숙을 죽이고 다니는지, 왜 생사 비무를 청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무공을 증명할 필요도 없고, 명성을 새로 쌓을 이유도 없는데.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초가평이 한 일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이제는 중원 무림에서 공부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이 모두 사라졌다. 남은 사람은 앵무새일 뿐이다. 공부와 싸우기보다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이게 바로 초가평이 할 일이다.
무림 명숙이 죽었으니까, 장문인이 죽고, 장로가 죽었으니까 복수를 해야 한다. 비무로 무너진 원한은 다시 비무를 통해서 찾아와야 마땅하다.
이런 생각이 보편적이고 타당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무림 각 문파는 성검문에 호의적이다. 오히려 성검문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이 배척 대상이었다. 성검문이 통치하는 무림에서 정도 무림은 하늘처럼 존경받았다. 세력도 굳건해지고, 부와 명예도 충실히 쌓았다.
성검문을 배척할 이유가 전혀 없다.
각 문파, 각 세가에서 공봉이라는 이름으로 성검문에 기숙하는 사람들이 좋은 사례다. 그들은 성검문에 의탁해 있지만, 암중으로는 본문과 기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다. 각 문파에서 성검문에 파견한 일종의 사자인 셈이다.
이제 성검문을 성토하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오히려 성검문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무림 판도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성검문이 천하를 장악하고 있다는 건데…… 후후! 이거 어디 무서워서 건드릴 수나 있겠나. 공부의 손가락이라도 건드리면 난리 나겠군.”
“무림만큼은 공부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니까요.”
“십 년이나 무림을 떠나있었는데도 그렇군. 후후! 황상께서 공부에게 날개를 달아줬어. 공부라는 호칭이 주는 영향인가?”
전보영주는 회의를 시작한 이후 한 번도 밝은 표정을 짓지 못했다. 그만큼 공주가 돌아온 일은 충격이었다.
이부 부장이 말했다.
“공부가 오기 전에 진개가 공봉을 내쫓았는데, 그들이 다시 돌아왔죠.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원래 허도기 사람들이니까.”
“무림이 먼저 인사를 한 것이고, 사람을 보내서 다시 맹세를 거듭한 것이나 다름없죠. 무림이 차곡차곡 정비되어 간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겁니다.”
“후후! 허도기가 원하는 쪽으로 정비된다는 점이 문제지.”
전보영주는 쓰게 웃었다.
허도기는 분명히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는데, 죄를 묻지 못한다. 혼란이 가신 것도 아니다. 겨우 한 군데, 남쪽 동영만 정리되었다. 아직도 세외칠국은 여전히 중원을 위협하고 있다.
“계속 주시하겠습니다.”
삼부 부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성검문이 그렇다면…… 야천도 공부를 향해 움직이겠네?”
“네. 그렇습니다.”
“후후! 그러면 그동안 아걸은 도대체 뭘 한 건가? 실컷 죽 쒀서 개 준 꼴이지 않나.”
허굉우는 실소를 흘렸다.
야천은 살아있는 생명체다.
아걸은 야천을 무너뜨리고 어둠을 손에 쥔 듯했지만, 마유 마인들이 나타나면서 뿌리가 흔들렸다.
만약 아걸이 마유 마인들까지 뿌리 뽑아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는 또 다른 자가 나타난다. 그들을 없애면 또 다른 자가, 또 다른 자가…… 계속, 계속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하는 것이다.
야천 같은 거대한 조직은 뿌리 뽑히지 않는다.
야천 구룡은 없앨 수 있지만, 또 다른 자가 나타나서 야천과 흡사한 조직을 만든다.
야천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공부처럼 목에 개 줄을 채워놔야 한다.
이 세상에 있는 개를 모두 죽여서 없앨 수 있는가? 없다. 그러면 우두머리의 목에 개 줄을 채워서 방향을 조정해야 한다. 이것이 야천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아걸이 한 일은 개 한 마리를 죽인 것에 불과하다. 허도기는 야천 목에 개 줄을 걸었다.
“야천 놈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미 공부에게 충성 맹세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야천에 새로운 자들이 나타났을 거야. 마유 마인들만 가지고는 통제가 안 될 테니까. 어떤 자들이 나타났는지 자세히 살펴. 신분 내력까지 전부 다 캐내.”
“알겠습니다.”
“마유 쪽도 세심하게 살펴보고. 예전에 수군 도독 시위등이 비밀리에 전선을 움직인 적이 있어. 황상께 허락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였는데…… 훈련이라고 하지만 뭔가 찜찜해. 뒤를 캐봐. 마유와 연관이 있을 것 같아.”
“네. 알겠습니다.”
삼부 부장이 대답했다.
“역할 분담을 하자. 일부장은 성검문에 모인 공봉을 낱낱이 조사해.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 허도기가 소축십검은 버려도 무림 공봉은 버리지 않았다는 거잖아. 아무래도 그들에게 뭔가가 있는 거 같아.”
전보영주 허굉우는 무인 출신이다. 한때는 전인 영주의 명을 받고 취화원을 도운 적도 있다. 그래서 무림에 대한 촉감이 예민하게 살아있다.
“네.”
일부 부장이 대답했다.
“이 부장은 공부가 왜 중원에 들어왔는지 이유를 찾아봐. 대장군님께는 이 사실을 알렸지?”
“소식을 듣는 즉시 바로 전서를 보냈습니다. 지금쯤 받아보셨을 겁니다.”
“잘했어. 공부가 괜히 들어오지는 않았을 거야.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을 텐데. 곧 큰 사달이 일어날 테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대비해. 아차 하면 늦어.”
“알겠습니다.”
전보영주는 무거운 마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황궁으로 간다.
허도기가 돌아온 사실은 황상에게 보고해야 한다. 호황위 군주와 근위대장에게도 알려야 한다.
‘공부가 왜 돌아왔을까? 기껏 일을 벌여놓고. 아직 매듭지어진 게 하나도 없는데.’
전보영주는 찌푸려진 미간을 풀지 못했다.
공부는 돌아오자마자 대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만천하에 귀향 사실을 공표했다.
잠시 외도를 하고 돌아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법, 무인은 무림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제 다시 돌아온다. 무림에 적을 둔다.
자유롭다. 이제 숨이 트인다.
남은 삶은 무림 발전을 위해서 바칠 것이다. 무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손발이 헤질 때까지 일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천 리를 마다하지 않고 오갈 것이다.
‘어떻게 이 사람은 힘이 날로 강해지나.’
무너질 것 같은데 무너지지도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공부의 힘은 더 강해져 있다.
전보영주는 공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천하 무림이 충성 맹세를 하고, 마유 마인과 야천이 동조한다.
지금 허도기의 귀향을 온 세상에 널리 퍼트리는 일도 야천이 도맡았다. 파락호들이 술을 마시면서 늘어놓는 헛소리, 홍루의 기녀가 사내 품에 안겨서 흘리는 말…… 이 모든 일상생활 속에 성검문주에 대한 칭송이 교묘하게 녹아있다.
그들은 성검문주가 원하는 말만 한다.
‘무림 때문에 돌아온 건 아니야. 분명히 무슨 일인가 있어. 무슨 일인지 캐내야 해. 아걸! 아걸이 있어야 해! 아걸이 빨리 돌아와야 하는데.’
허도기는 아걸의 숙적이다.
당금 무림에서 허도기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무인이 바로 일홀문주 아걸이다.
아걸만 오면 골치 아픈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각! 다각! 다각!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소리가 우울하게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