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九章 만부부당(萬夫不當) (3)
“천호문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후후후!”
진개는 피식 웃었다.
“천호문 안주인이 직접 오셨는데, 문주님을 꼭 뵈었으면 좋겠다고 사정하시더군요.”
“너 돈 먹었냐?”
“네? 아뇨, 그런 일 없습니다.”
“돈 먹지 마라. 원망 산다. 자칫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명심하고 있습니다.”
“일단 빈객청에 모셔서 편하게 모셔라. 먼 길을 오셨는데 푸대접할 수는 없지.”
“네.”
총관이 총총히 물러갔다.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인 듯한데…… 후후! 사부께서 그렇게 편하신 분은 아니지. 하하하!”
진개는 차게 웃었다.
이십사 위문은 탕산 싸움을 기점으로 희비가 엇갈렸다.
탕산에 들어선 스물네 개 문파 중 열세 문파의 주인이 돌아오지 못했다.
일곱 개 문파는 완전히 뿌리가 끊겼다.
요행히 멸절만은 피한 여섯 개 문파도 재기가 불능할 정도로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열한 개 문파는 운이 상당히 좋았다.
그들은 아걸과 부딪히지 않았다. 아걸이 끝까지 싸움을 밀어붙였으면 그들 역시 무사하지 못했을 테지만, 다행스럽게도 아걸이 중간에서 칼을 멈췄다.
그 덕분에 열한 개 문파는 살아남았다.
그들은 희생자조차도 적다. 기껏해야 한두 명 정도밖에 상하지 않았다.
탕산 싸움을 기점으로 열세 개 문파는 완전히 무너졌고 열한 개 문파는 여전히 건재를 과시한다.
갑자기 무림에 공백이 생겼다.
공백? 사실상 공백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듯이, 강자가 떠난 자리에는 또 다른 강자가 들어선다.
살아남은 열한 개 문파는 멸절한 문파의 영역을 넘본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무공이 강하고, 세력이 탄탄하며, 무엇보다도 성검문의 휘광을 등에 업고 있다.
지금까지 이십사 위문의 기세에 눌려서 힘을 펴지 못하던 중소 문파가 일어설 수도 있다. 인근에 대문파가 있다면 틀림없이 멸문한 문파의 자리를 꿰차고 싶을 것이다. 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강자가 등장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약간의 틈이 필요하다.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해도 좋을까 하는 망설임, 지금이 아니면 이 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조바심, 혹여 이십사 위문이 누리던 영역을 꿰찼다가 공부에 미움을 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이 모든 것들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
딱 그런 시점에서 공부가 돌아왔다.
공부의 귀환은 소멸이 당연시되던 몇몇 문파에게도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었다.
이십사 위문은 단순한 문파가 아니다. 위문이다. 공부를 대신해서 한 지역을 통솔해왔다. 공부의 수족 노릇을 단단히 했다. 탕산 싸움처럼 무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싸움도 기꺼이 치렀다. 그리고 전부를 잃었다.
공부의 명령을 충실히 쫓은 결과다.
그렇다면 공부도 책임을 져줘야 한다. 살아남은 사람을 보살펴주어야 한다. 탕산에서 죽은 문주가 억울하지 않게 그가 다스리던 영역은 후손이 이어받게 해줘야 한다.
물론 문파를 지탱하던 절정 고수가 모두 죽어서 옛 영광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성검문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몇 년은 버틸 수 있다. 그러면 그 몇 년 동안 옛 위세를 되찾을 수 있는 무공을 가다듬을 수 있다.
천호문, 팔천검문, 화화문…… 멸절한 문파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온다.
“후후! 후후후! 사부가 얼마나 차가운 사람인지 진작 알아보지 못한 죄지. 그걸 알았다면 도와달라고 찾아오지도 않았을 텐데. 쯧! 밥이나 먹고 가. 후후!”
진개는 빈객청에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화산파 송문검사(松紋劍士)께서 오셨습니다.”
“후후! 사부가 달콤한 꿀인 건 맞나 보네. 이제는 별 날파리들이 다 꼬여.”
“어떻게 할까요?”
“빈객청에 처박아. 그냥 내쫓으면 또 말이 나올 거 아냐. 쓸데없는 말 하지 않게 입이나 봉해놔.”
“네. 알겠습니다.”
총관이 쪼르르 달려 나갔다.
송문검사는 천호문 안주인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뜻에서 찾아왔다. 직접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안 들어도 뻔하다.
화산파와 광검문은 심한 알력을 겪었다.
화산파의 영역에 광검문이 밀치고 들어왔으니 당연히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싸움은 시시하게 끝났다.
성검문주가 광검문을 찾아서 좋은 문파를 만들어달라며 보검을 건넸다.
그것으로 승부는 끝났다.
이제 광검문 문주가 죽고 광검문 검사들이 떼 몰살을 당했다. 하루아침에 수많은 검사가 고혼이 되었다.
이쯤 되면 송문검사가 찾아온 이유쯤은 단박에 짐작된다.
“화산파쯤 되면 제 뜻대로 하는 것도 있어야지. 사부에게 허락을 구해야 옆 동네에 산책이라도 하는 입장이라…… 후후! 화산파도 답답하겠네.”
성검문이 무림을 영도하고 있다지만, 공식적으로는 무림 문파와 성검문은 허락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다. 완전히 별개의 문파로 서로 간섭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찾아와서 눈치를 살핀다.
허도기가 양해를 해주면 광검문의 영역을 차지할 것이다. 반대로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면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갈 것이다. 그러다가는 다시 누군가를 보내겠지. 끝내 허도기의 양해를 구해야만 어떤 행동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후후후! 너희 신세나 내 신세나.”
진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풍도곡이 비었지?”
“네.”
진개가 대답했다.
“풍도곡을 나눠줘. 열세 개로 쪼개면 만석 넘게 돌아갈 거야. 그 정도면 편히 먹고 살겠지.”
“알겠습니다.”
진개가 대답했다.
풍도곡은 거친 땅이다. 일홀문 사형제가 사용하던 땅이라서 개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땅만 나눠 가져도 능히 만석지기 이상의 땅을 가질 수가 있다.
‘쓰러진 자는 쓰러진 채로 두라는 거군. 후후! 이럴 줄 알았지. 사부는 결코 기회를 두 번 주지 않아.’
진개가 속으로 비웃었다.
멸망한 자는 멸망한 채로 둔다. 그들이 후손이 다시 무공을 배워서 애 죽은 문주의 뒤를 잇기에는 세월이 너무 오래 걸린다. 무림을 그만큼 오랫동안 공백 상태로 놔둘 수가 없다.
힘이라는 것이 한시도 비어 있어서는 안 된다.
정도가 힘을 포기하면 사마외도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자칫 야천이나 마인들이 정도를 뚫고 올라설 수도 있다. 그러니 강한 힘이 버티고 있다가 그들을 눌러야 한다. 사마외도가 날뛰지 못하도록 억제해야 한다.
냉정하지만 옳은 판단이다.
또 야박한 결정도 아니다. 풍도곡을 나눠주면서 현재 가진 것도 온전히 보존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무림에 대한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리고…… 잔치를 하자.”
“잔치라시면……?”
“별다른 것은 아니고 오랜만에 무림 동도들끼리 술이나 한 순배 돌리자는 거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초대할까요?”
“먼저 우리 식구부터 챙겨야지? 살아남은 십일 문을 불러. 어려울수록 힘을 실어줘야지.”
“네.”
“구파일방 오대세가 장문인도 초빙하고.”
‘쳇!’
진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단순히 술이나 하자는 잔치가 아니다. 십일문파가 문주와 대방파의 장문인을 한자리에 모은다는 것이 어떻게 평범할 수 있나. 말해주지는 않지만 어떤 다른 노림수가 있다.
허도기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문도가 삼백 명 이상 되는 문파도 초빙해. 그 정도는 술 한 잔 나눌 자격이 있어.”
“그런 조건이면 대략 천여 명 이상 모일 겁니다.”
“그렇게 해.”
“네.”
진개가 공손히 대답했다.
이것은 상당히 큰 잔치다. 어떤 방파도 중원 전역에서 이만한 사람들은 모아들일 수 없다. 도움이 되지 않는 자리에 참석하고자 먼 길을 달려올 사람은 없다.
허도기가 부르면 달라진다. 누구든 기꺼이 온다. 물론 일부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문도 삼백 명으로 기준을 잡는다면 참석자가 천 명은 훌쩍 넘을 것으로 생각된다.
“잔치는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또 다른 분부는…….”
“너. 너도 문제야.”
허도기의 지적에 진개는 침묵했다.
“그동안 성검문을 좀 잘 이끌라니까 이런 식으로 망가트리기나 하고.”
“죄송합니다.”
“이번 잔치가 끝나면 나랑 같이 폐관하자.”
“같이…… 말입니까?”
“오래 있을 필요는 없겠지. 딱 열흘만 있다가 나오자. 너도 이제 여길 이어받아야지?”
‘또 그 소리. 언제까지 달콤한 유혹으로. 이번엔 또 뭐가 필요하신가? 날 또 어떻게 부려먹고 싶어서 달콤한 미끼를 던지는 거야? 내 목숨도 딸 때가 되었나?’
진개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차분한 신색으로 사부의 말을 경청했다.
허도기가 말했다.
“그동안 수련한 것이 있으니까…… 열흘이면 조명십해를 어느 정도는 알게 되겠지. 완벽히 수련해내는 것은 추후에 해도 되고, 일단 알아두기는 해야지?”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어. 조명십해는 깨달음의 무학이야. 깨우치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네게 달렸어. 하지만 네 자질도 남 못지않으니 약간만 건드려주면 되겠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개화(開花). 하하! 어렸을 적에는 개화하라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는데. 이제는 내가 네게 말하는구나. 이번 폐관 중에는 반드시 개화하도록 해.”
“조명십해 전부 말입니까?”
“그래. 문주가 되려면 다 알아야지?”
“본문에 오래 계실 생각이 아니십니까?”
“뭐? 하하하! 하하하하!”
공부가 크게 웃었다.
공허한 웃음소리가 아니다. 매우 밝고 활기찬 웃음이다. 은거한다거나 속세를 버리려는 마음 같은 건 티끌만큼도 없다. 앞을 향해서 달려나가는 웃음이다.
‘이 양반, 아직도 황제가 되려는 꿈을 버리지 않았어. 뭐지? 뭘 노리는 거야?’
진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일단 잔치부터 열자. 철저히 준비해.”
“빈객청에 천호문, 공검문…… 사부님의 도움을 받고자 찾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진개는 풍도곡을 나눠주라는 말로 사부의 뜻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돌려서 캐물었다. 추측이 아니라 확실하게 사부의 뜻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건 네가 알아서 처리해.”
만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들을 불러서 탕산으로 집어넣은 당사자이면서.
“십삼 위문이 떨어져 나간 곳은 어떻게 할까요?”
이번에는 처리를 물었다.
이들을 만나지 않겠다면 저들도 만나지 않는다. 천호문을 만나지 않으니 화산파도 만나지 않는다. 멸문한 자들에게 도움을 줄 생각은 없다. 그러면 무림 대방파에 건네줄 생각은 있는가? 아니면 살아남은 십일 문에게 포상차 건네줄 심산인가?
“그것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나?”
“네?”
“무림은 살아있는 생물이야. 내가 어쩌고저쩌고할 게 못 돼. 빈 곳은 저절로 채워지고, 썩은 것은 떨어져 나가게 되어 있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어.”
진개는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 일절 간여하지 마라.
진개는 사부의 말을 이렇게 알아들었다.
도대체 사부가 노리는 것이 뭔지 모르겠다.
사부는 농담을 즐기지 않는다. 농담 삼아 건네는 한마디에도 어떤 모략, 계략, 속셈이 숨겨져 있다.
사부는 그런 사람이다.
잔치를 벌이자는 것, 멸절한 십삼 위문 영역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 모든 말 속에는 반드시 노림수가 담겨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부가 한 일은 늘 득이 되어서 돌아온다.
‘알아서 하쇼. 뭘 원하든…… 난 당신에게 이용당할 생각이 없으니까.’
진개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성검문에서 잔치를 벌인다는데?”
“나도 들었어. 문도가 삼백 명 이상 되는 문파에는 전부 초대장을 보냈다던데? 무림이 어수선하니까 정리하실 생각이신가 봐.”
“그거참…… 나라는 뒤숭숭한데 무림은 잔치판이네.”
“정말 그러네.”
“어떻게 무림은 평화롭고 세상은 전쟁통인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성검문에서 벌이는 무림 잔치는 허도기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로 넓은지 말해준다. 아직도 성검문이 천하제일문파라고 새삼 인식시키는 자리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무림 잔치는 이제 막 떠오르는 영웅조차도 잊게 만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걸이 벌인 싸움은 진한 영웅담이었다.
모든 사람이 아걸을 칭송했다. 입 있는 사람은 모두 한마디씩 했다. 아걸이야말로 진짜 영웅이라고. 사심 없이 나라를 위해서 칼을 쓴 무인이라고.
한데 지금은 말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 잔치만 말한다.
잔치가 아걸의 영웅담까지 묻어버렸다.
“역시 공부야. 공부가 돌아오니 무림이 일제히 숨죽이잖아.”
“싸움만 없으면 장땡이지 뭐. 자기들끼리는 얼마든지 싸우라고 해. 우리만 건드리지 말고.”
“그렇게 될 거야. 성검문주가 있으면 싸움이 뚝 그치잖아.”
사람들이 두런두런 옛날의 평화를 말했다.
공부가 돌아왔으니 무림이 조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