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九章 만부부당(萬夫不當) (4)
“공부가 잔치를 벌인답니다.”
“잔치? 이거 부아가 치밀어서. 나라를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고는 뭐가 좋다고 잔치야? 하아!”
전보영주가 탁한 숨을 토해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공부가 벌인다는 잔치에는 숨은 의도가 있다. 물론 잔치를 순수한 의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협박이 되기도 한다.
무림이 내 것이다. 이 사람들과 싸워도 좋다면 건드려 봐라.
일종의 위세를 보였다고 할까? 무림 전체가 공부를 위해서 칼을 들지는 않겠지만, 많은 사람이 동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원랑과 사구정에 대해서 뭐 좀 나온 건 없어.”
“사구정은 공부 곁에만 머물러 있고 하원랑은 워낙 홀로 다니는 사람이라서. 아직까지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벌써 움직였어.’
전보영주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원랑은 맹수다. 사구정도 맹수다. 맹수 두 마리가 공부 곁에 있다. 그들이 는 먹이만 받아먹고 있을 리 없다. 그들은 분명히 움직였다. 그런데 정보영에 아무런 소식이 들어오지 않는다.
‘설마 또?’
전보영주의 머릿속에 얼른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전임영주 탁호가 살아있을 때도 가장 큰 두통거리였는데…… 전보영에 허도기 사람이 숨어 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한 정보를 가로채고 있다.
‘끊어도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촉수. 성검문주, 당신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 감탄했어.’
전부영주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성검문주에 관한 사실은 근위대장과 호황위 군주에게 사실대로 전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성검문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밀히 조사해서 하루에 한 번씩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성검문주는 쥐꼬리만 한 흠조차 남기지 않는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해도 잡을 것이 없다. 완벽하게 밝은 양지에서만 움직이고 있다.
“계속 지켜봐. 보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일홀문주에게도 사람을 보내서 공부가 성검문에 있다고 알려줘.”
일홀문주와 공부가 숙적이라는 사실은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불구대천지수다. 실제로 벌써 여러 번 부딪쳤다.
허도기가 성검문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면, 일홀문주도 즉시 달려올 것이다.
동영제일검 두주를 박살 낸 일홀문주.
지금처럼 마음이 답답할 때는 쾌도난마 식으로 거침없이 칼을 쓰는 사람만이 속을 풀어줄 수 있다.
“아! 일홀문주가 있었네요. 공부를 누가 상대할까 고민했는데. 왜 일홀문주를 잊고 있었지?”
일부 부주가 말했다.
“공부가 껄끄럽긴 하지만 일홀문주라면. 하아! 일홀문주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삼부 부주도 맞장구쳤다.
전보영주는 침묵했다.
그 역시 아걸이 와서 허도기를 치워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잊고 있는 게 있다. 허도기는 명실공히 천하제일인이다. 아걸에게 기대를 걸기는 하지만 역으로 아걸이 당할 수도 있다.
‘이 판국에 잔치라니. 변방에서는 병사들이 창을 겨누고 있는데 한자리에 모여서 고기와 술을 먹으며 웃고 떠든다는 거잖아. 이놈들 해도 너무 하네.’
“하아!”
전보영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아걸이 사라졌다.
아걸은 황상이 보낸 마차까지 거절한 채 혼자서 훌훌 떠나갔다.
아걸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억지로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아걸이 움직이면 누구도 찾지 못한다. 아걸의 이목을 속이고 그를 뒤쫓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일홀문주를 찾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전보영주가 답답한 듯 말했다.
“잠시 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만한 싸움을 했으니.”
“그렇겠지. 할 수 없군. 기다리자. 일홀문주를 보면 바로 연락하라고 하고.”
“네. 계속 주시하겠습니다.”
전보영주는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원래 전보영은 무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무림에 간여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라를 이렇게 우환덩어리로 만든 허도기가 무림으로 들어갔으니 무림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고민이 깊어간다.
* * *
“응?”
아걸은 목을 축이러 계곡으로 나왔다가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왜소한 체격, 남루한 몰골…… 깊은 산속인데도 가진 것 하나 없이 지팡이 하나만 달랑 들고 있는 노인.
“할배? 할배가 여긴 웬일이야?”
아걸이 놀란 눈으로 노인을 쳐다봤다.
“이놈의 자식아! 오랜만에 만났으면 밥은 먹었는지 안부부터 물어봐야지! 웬일이냐가 뭐야! 웬일이냐가!”
“밥은 먹었고.”
“안 먹었다. 이놈아!”
“밥 안 먹은 게 내 잘못은 아닐 텐데? 왜 내게 화를 내? 그런데 이 시간까지 밥도 안 먹고 뭐 한 거야? 왜 사람들이 막 쫓아내고 그래? 아니면 무슨 큰 죄를 짓고 도망쳐 들어오셨나?”
“그런 너는 이놈아! 새파랗게 젊은 놈이 왜 산속에서 뱅뱅 맴돌고 있냐!”
“수련. 나는 수련 중이라니까. 젊은 사람이 산에 들어와서 할 일이 수련밖에 더 있어?”
아걸과 아삼은 만나는 순간부터 티격태격했다.
아삼이 종이로 둘둘 감은 밥 덩이를 툭 내던졌다.
“이거나 처먹어, 이놈아. 네놈이 좋아하는 연잎밥 싸 왔다.”
“그거 말끝마다 이놈, 이놈. 이제 나도 다 컸는데. 이 나라 호황위 군주가 내 부인이라는 거 모르시나.”
“왜? 수틀리면 잡아가게?”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아걸은 종이 뭉치를 풀었다. 안에는 연잎으로 감싼 밥이 있었다.
연잎밥은 손이 많이 간다. 물론 아삼이나 아걸이 즐기는 연잎밥은 손이 많이 가는 정식 연잎밥이 아니다. 소금 뿌린 밥을 연잎으로 둘둘 감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연잎으로 감싸 놓으면 밥에서 연잎 향이 풍긴다.
아걸은 입안에 감도는 그 향이 좋았다.
“내가 이쪽 길로 간다는 걸 어떻게 알고 따라온 거야? 참 귀신이 따로 없다니까.”
아걸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사내놈이 큰 고비를 넘으면 그다음에는 뭘 하겠냐? 마누라밖에 더 찾아? 네놈이 어디로 가는지는 내 손바닥 안이다.”
할배가 개울물로 발을 씻으며 말했다.
큰 고비? 큰 고비…….
아걸은 미소를 지었다.
두주를 상대한다는 것은 상당히 큰 압력을 주었다.
두주를 찾아가는 내내 두주의 검에 대해서 고민했다. 오죽하면 중간에 마차를 돌려서 비무까지 했겠나. 자신의 칼을 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에게 반 초 뒤진 검이라면 자신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압박!
사람들 눈에는 지극히 태연해 보였어도 아걸 자신은 매일 고민했다.
그 과정을 넘기고 나자 긴장이 탁 풀어졌다.
옛날 탕산 싸움을 마치고 나서 수일 동안 잠을 청했듯이 이번에도 극심한 긴장감이 탁 풀어주면서 무력감, 허탈감이 찾아왔다. 그래서 산으로 들어왔다.
산을 거닐다 보면 정신이 맑아진다. 몸에 힘이 넘친다.
하나 이 정도로 아걸의 행로를 탐지할 수는 없다. 마누라를 찾아가는 길…….
‘그런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몽설을 향했던 것 같다.
사실 몽설 생각이 간절히 났다.
몽설이 호황위 군주라는 것도 잊었다. 취화원 원주라는 사실도 잊었다. 몽설은 한 여자일 뿐이다.
내 부인, 내 여자.
몽설은 만나서 무엇을 하겠다거나,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계획도 없다. 그저 보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얼굴만 보면 좋겠다.
일홀도에 매달려서 그리움이 치밀 때마다 꾹 눌러 참았지만, 더는 참지 못하겠다.
너무 보고 싶다.
하지만 자신의 발길이 도성으로 향하고 있는 줄은 자신도 몰랐다.
산에 들어와서 무작정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도성으로 향하고 있었나? 산 정상에 올라설 때마다 이정표를 본다. 이곳이 어떤 봉우리이며 다음 봉우리가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 살핀다.
그저 산을 살피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머릿속에는 이미 지도가 그려졌고 그 지도는 도성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참 누가 적랑대주 아니랄까 봐.”
아걸이 웃으면서 밥을 먹었다.
“허도기 소식은 들었냐?”
“성검문으로 돌아왔다며?”
“산에 처박혀 있는 놈이 들을 건 다 듣네.”
“이곳에도 입이 있거든.”
“그렇지. 입 없는 곳이 없지.”
할배가 물에 젖은 발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물기를 말렸다.
산에도 말하는 입이 있다. 사냥꾼들이 오가면서 세상일을 말한다. 약초꾼들도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지나간다. 먼 길을 가는 길손이 말을 하기도 한다. 누가 되었든 두 사람만 모이면 말을 한다.
지금 세상에서 회자하는 말 중에서 단연 압권은 허도기가 세외 유람을 끝내고 성검문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자마자 천하 대잔치를 벌인다.
“어떻게 할 거냐.”
아삼이 물었다.
“뭘?”
“뭐긴 뭐야 이놈아! 허도기가 왔으니까 한판 해야지!”
“나 이제 막 싸움 끝냈거든! 동영제일검하고!”
“그래서 안 싸우겠다고?”
“성검문주에 대한 말만 들었지, 나에 대한 말은 못 들었나 봐?”
“뭐? 무슨 말?”
“영웅. 세상에 다시 없는 영웅이 나타났다고 하잖아. 그게 나야, 나. 할배 손자가 세상이 말하는 바로 그 영웅이라고.”
“영웅은 무슨. 영웅이란 놈들 다 얼어 죽었는가 보네. 네놈이 영웅 타령하는 걸 보니.”
“잠시 영웅담에 취하게 좀 내버려 두면 안 되나? 할배 말처럼 몽설이 보고 싶어서 죽겠는데, 잠시 좀 쉬면 안 돼?”
“너도 진짜 영웅 되기는 틀렸다. 가문의 복수, 사문의 복수 다 때려치우고 여자부터 찾겠다. 이거 아냐.”
“이럴 때 보면 할배는 정말…….”
“뭐! 인마!”
“그런데 술은 안 갖고 왔나? 마시고 싶은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 앞에서 술타령은.”
“거참! 처까지 있다니까! 솔직히 대가리에 피는 말랐지.”
“옛다, 이놈아!”
할배가 허리춤에서 호로병을 꺼내 아걸에게 냅다 던졌다.
아걸을 호로병을 받아서 마개를 열고 한 모금 듬뿍 마셨다.
“카! 좋네.”
아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삼이 마시는 술은 매우 독한 화주다. 불을 붙이면 불길이 일어난다. 화주는 마시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산에 들어올 때는 불을 피우는 용도로도 쓴다. 몸도 녹여주고 불도 피우고. 그래서 할배는 산을 탈 때마다 꼭 화주를 챙긴다.
“싸구려 술이 뭐가 좋다고.”
할배가 아걸을 보며 안쓰러움을 드러냈다.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술인 줄 알아? 술맛이 어떤지 잊어버렸다니까.”
아걸이 히죽 웃었다.
“네놈 심정 같아서는 지금 당장 성검문으로 달려가고 싶을 텐데, 눌러 찾는 진짜 이유가 뭐야? 몽설을 만나서 알콩달콩 지내는 것도 하루 이틀일 거고. 잠시간은 허도기와 싸우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었는데, 진짜 이유가 뭐냐고?”
“허도기가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거든.”
“응? 이건 또 무슨 개소리?”
“허도기에게 순기능도 있다고. 성검문주의 기능. 이십사 위문이 탕산에서 박살 났잖아. 그것 때문에 무림이 뒤숭숭해. 자칫하면 아주 큰 싸움이 벌어져. 중원 사방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싸울 거라고. 그게 조금 걱정되긴 했는데. 허도기가 애써주고 있잖아. 그럼 됐지.”
“허도기 하는 꼴이 무림을 안정시키려고 애쓰는 것으로 보이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정리는 될 것 같아. 그리고…… 허도기가 괜히 들어온 것 같지는 않아서. 세외팔국을 찝쩍거려서 군사까지 일으켰는데 갑자기 그만두고 들어온다고? 그건 아닌 거 같고. 분명히 허도기가 움직이고 나면 대전란이 일어날 거야. 그 일부터 깨는 게 우선일 것 같아서.”
“그건 이놈아, 허도기만 죽이면 끝나잖아?”
“허도기 죽이는 일이 그렇게 쉬워! 참, 말을 해도.”
“킥킥! 천하에 적수가 없는 일홀문주도 허도기는 무서운 모양일세. 무서우면 관둬라. 킥킥!”
“아! 정말 참 충동질하고는. 아직 준비도 안 된 사람한테 덜컥 칼을 쥐여주고 싸우라고 할 때나 지금이나.”
“내가 싸우라고 했냐, 인마! 몽설이 사람 죽이고 쫓기니까 네가 달려든 거잖아! 솔직히 말해. 너 그때 반했지? 몽설이 제 어미를 타서 굉장히 예뻐.”
“그때 취화원을 충동질한 일은 새까맣게 잊어버리셨나 보네.”
“말해 봐, 인마! 내 생각에는 허도기만 죽이면 다 끝날 것 같은데.”
“허도기를 죽이면 그가 도모하는 일은 끝낼 수 있을 거 같긴 해. 하지만 그러면 본격적으로 전란이 일어날 거 같단 말이지. 조위 장군이 북쪽은 막고 있지만, 서쪽과 남쪽은 다 뚫려 있잖아. 이번 기회에 들이치면 다문 얼마간 땅덩어리라도 차지할 수 있을 거 같단 말이지. 이왕 군사는 일으켰고…… 전란이 일어날 거야. 허도기가 싸움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허도기로 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킥킥킥!”
아삼이 웃으면서 아걸을 쳐다봤다.
“왜? 왜 징그럽게 사람을 쳐다봐?”
아걸이 흠칫거리며 아삼을 쳐다봤다.
“너 이제 일홀문주 해도 되겠다.”
“언제는 일홀문주 아니었나?”
“그게 아니라 이놈아! 넌 지금 너 자신이나 일홀문만 보고 있는 게 아니잖아! 세상을 보고 있잖아! 네 칼 이제 반철도가 아니라 일월도라고 불러도 되겠다는 거지 이놈아! 됐다! 말이 통하지 않는 놈과 말해서 뭐 해. 나 간다.”
아삼이 일어섰다.
“왜? 그냥 가게?”
“그냥 가지 이놈아. 네 놈 멀쩡한 거 봤고, 네놈이 일홀문주인 것도 봤고, 네가 알아서 하겠지. 간다!”
아삼이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 참!”
아걸은 아삼을 접지 않았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묵묵히 배웅할 뿐이다.
‘잠시…… 잠시만…… 기왕 속마음도 들켰고…… 그럼 빨리 몽설을 보러 가야겠네. 너무 보고 싶은데. 후후!’
아걸은 몽설을 생각하자 웃음이 피어났다.
요즘은 몽설만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