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九章 만부부당(萬夫不當) (5)
무인이 다루에 들어섰다.
그는 점소이의 안내도 받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무인이 밖을 쳐다본다.
다루 옆에는 오래된 연못이 있다. 다루를 만들 때 같이 만든 인공 연못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연못처럼 인위적인 모습이 사라졌다.
연못 안에는 제법 굵직한 잉어가 헤엄치고 있다.
“손님 주문은……?”
점소이가 와서 물었다.
“차는 됐고, 주인 좀 보지.”
“주인님요?”
“…….”
“지금 주인님은 바쁘셔서……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말씀 주시면 전해드립죠.”
“멀리서 온 검.”
무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네?”
점소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귀찮다. 가라. 아이들 시켜도 될 일을 내가 직접 온 것은 네 주인에 대한 예우야. 가서 나오라고 해.”
무인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일단 전하기는 하겠습니다만…… 어느 분이시라고?”
무인은 더는 말하기 싫다는 듯 연못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팟! 파파팟!
때아니게 살기가 감돌았다.
무인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손님들이 슬금슬금 일어나더니 도주하듯 튀어 나갔다.
미리 점소이에게 사전 고지를 받은 게 틀림없다.
파파파팟! 파팟!
강력한 살기가 밀려든다.
무인은 살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밖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심심한지 주담자를 들어서 보리차를 따라 마셨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무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예의가 없군. 손님을 너무 기다리게 해. 만나기 싫다면 돌아가야지. 일다경 준다. 더는 기다리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해. 그리고…… 칼을 쓰려면 쓰고 말려면 말고. 숨어서 변죽만 울리는 짓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그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인가?
“틈이 없습니다.”
“너희가 틈을 찾지 못했다면 상당한 무인이라는 소리군. 누군지 알아보겠어?”
왜소한 노인이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저런 무인에 대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음! 날 만나보겠다? 멀리서 온 검. 정확히 날 알고 찾아온 손님이군. 그러면 만나봐야겠지.”
스읏!
다루 주인이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다. 몸이 너무 왜소해서 어린아이보다 조금, 아주 조금 더 크다. 몸도 깡말라서 뼈와 힘줄이 확연히 보인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다.
“신중하셔야 합니다.”
“괜찮아.”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
“절 찾아오셨다고.”
깡마른 노인이 무인 앞에 앉았다.
“나 성검문 사구정이다.”
무인, 적위군장 사구정이 거침없이 말했다.
“아!”
노인이 비로소 알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날 아는군.”
“적위군장 사구정. 킬킬! 그래서 아무 정보도 없었군. 킥킥! 우리 애들이 틈을 찾지 못한다기에 누군가 했는데…… 그런데 내게는 무슨 볼일?”
다루 주인의 태도가 돌변했다.
정중한 모습이 사라지고 전신에서 날카로운 얘기가 흠씬 풍겨 나왔다.
파파팟! 파파파팟!
주위에 흐르는 살기도 더욱더 진해졌다.
이번에 쏟아져 나온 살기는 변죽만 올리는 살기가 아니다. 진실로 칼의 날카로움이 담겼다. 대화 여부에 따라서 사구정을 베겠다는 의지가 실려 있다.
“문주님께서 보자고 하신다.”
“나를?”
“가자.”
무인이 대답도 듣지 않고 일어섰다.
“후후! 안하무인이군. 당신…… 옛날이나 장군이지 지금도 장군인가? 내가 당신 부하도 아니고. 볼일이 있으면 성검문주가 직접 와야지 내가 왜 가?”
왜소한 노인이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며 사구정을 쳐다봤다.
“동영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해야 하는 절대 왕이 있다. 어떤 말이든 지시하면 거역해서는 안 되지. 그 절대 왕이 부르신 거야. 따라나서든가 죽든가, 선택은 네 자유다.”
사구정이 차분하게 말했다.
“킬킬킬!”
다루 주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동영에도 법이 있지. 불청객은 가차 없이 벤다는.”
“그래도 좋고.”
사구정은 태연했다.
“좋아. 서로 베겠다니 누가 누구한테 베일지는 나중에 알아보고…… 일단 이곳에는 왕이 많은 모양이야? 황궁에도 있고, 성검문에도 있고. 킥킥킥! 그런 말을 막 해도 되는 거야? 역모 아냐? 어쨌든 청했다니 가서 만나보기는 하지.”
노인이 일어섰다.
스스! 스스스!
주변에서 파랑이 일었다. 그러자 다루 주인이 말했다.
“괜찮다. 나 혼자 가도 돼. 너희들은 있어라.”
그러자 파동이 멈췄다.
“걔들을 잘 훈련해 놨군. 이런 날카로움을 진작 썼으면 좋았을 텐데. 쓰라는 데는 못 쓰고.”
“말조심하지. 혀가 개차반이야.”
“못난이한테는 무슨 말이든 해도 돼. 상당히 많은 정보를 주었는데도 제대로 일을 못 하고 있잖아. 그런 바보들은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할 말이 없어.”
“킥킥! 적위군장, 아무래도 제명에 죽지 못하겠네.”
“제명에 죽을 생각 없다. 하지만 하찮은 놈들에게 들은 말은 아니야. 너야말로 말조심해라.”
“킥킥! 약속하지.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먼저 받은 일부터 마무리 짓고…… 그 일이 끝난 후에는 반드시 장군에게 하찮은 검을 보여주지.”
“마음대로.”
사구정이 웃었다.
또르르륵!
백옥 찻잔에 연녹색 찻물이 채워졌다.
“다루를 운영하고 있으니 차를 잘 알겠지? 감평 한 번 해봐. 좋은 차라는데 난 도대체 알 수가 없어서.”
성검문주 허도기가 다루 주인에게 말했다.
깡마르고 왜소한 노인은 손등으로 백옥 찻잔을 슬그머니 옆으로 밀쳐놓았다.
“다루를 운영한다고 차를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죠. 다루는 장사일 뿐.”
“잘 몰라? 하하! 그럴 수도 있지.”
허도기가 웃었다.
“그런데 대단해. 중원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 땅에 뿌리를 내렸어.”
“저희도 기숙할 곳이 필요해서.”
“그럴 수도 있겠는데…… 내가 보니 제사보다는 잿밥에만 정신이 쏠린 것 같아서 말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바로 묻지. 부주, 목적이 뭐야?”
“목적이라 하시면?”
“동영 유음류가 중원에 뿌리를 내리는 것, 아니면 황제를 암살하는 것.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순간 노인의 눈가에 이체가 번뜩였다.
성검문주는 ‘황제 암살’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다. 한 마디만 흘러나가도 대역죄인이 될 말을.
“그런 말씀을…….”
“하하하! 여긴 성검문이야.”
허도기는 ‘여기는 모든 눈과 귀가 다 막혀있다. 뭐가 두렵나. 마음껏 말해도 된다’라고 말한다.
“대답하지. 목적이 뭔가?”
“저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질책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맞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저희의 목적은 황제를 암살하는 겁니다. 준비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과 사정이 매우 달라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죠.”
“호왕위 군주 말이군. 호황위를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말로 들려. 그게 문제가 되나?”
“힘이 배로 드는지라.”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서 이번에 아주 강력한 칼을 하나 주려고 불렀어.”
“말씀하십시오.”
왜소한 노인이 눈빛을 반짝였다.
“하하하! 목적을 잃지는 않았군. 자네 눈빛을 보니 확실히 알겠어. 난 그런 눈빛이 좋아. 사실 두주가 아걸에게 패했다고 해서 의기가 꺾였나 잠시 의심했는데 사과하지.”
“그것보다는 좋은 창이라는 게……?”
“이번에 남만에서 좋은 창이 들어올 거야. 그 창이 곧 황궁으로 들이칠 텐데. 그 틈을 이용해보라고.”
허도기가 사구정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사구정이 준비해 있던 목함을 내밀었다.
“비도야. 황궁으로 잠입할 수 있는 비도. 숨겨놓고 안 내준 게 아니고 나도 이걸 얼마 전에야 입수했어.”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왜소한 노인이 눈빛을 반짝였다.
“황제 침소.”
“받겠습니다.”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허도기가 손을 들어 목함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지금 당장 이걸 써먹지는 못해. 비도라고는 하지만 지키는 개가 있으니까.”
노인은 허도기의 말을 기다렸다.
“성급히 쓸 생각은 말고…… 잘 지켜봐. 창이 곧 들어와. 언제 들어올지는 몰라. 내 지시를 받는 놈이 아니라서. 다만 그 창이 두주와 견줄 만한 창이라는 것은 장담하지.”
파팟!
노인의 눈가에 살기가 피어났다. 매우 진한 살광이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마. 어쩌면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알아서 합니다.”
“장담하건대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어. 그러니 반드시 처리해. 만약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러면 어쩌겠나? 중원인의 입장에서 이민족을 몰아내야지.”
“협박입니까?”
“건방지군. 동영 부주 따위를 밀어내려고 내가 협박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나?”
“저희 동영에서는 그런 말씀을 협박이라고 말합니다. 여기는 아닌가요? 당근이 아니라 채찍으로 보입니다만.”
“채찍은 이 사람이면 충분해. 듣자 하니 적위군장과 충돌이 있었다면서? 그 충돌, 진실로 이루어질 수도 있어. 누가 이긴다는 말은 하지 않지. 다만 적위군장을 너무 우습게 보면 안 돼. 이 사람 칼도 꽤 매서워.”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으니…… 협박이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노인이 웃었다.
“내 말을 채찍이라고 들었으니 그러면 당근도 주지. 사력을 다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이 땅에 유음류의 뿌리를 박게 해줄 수도 있고, 동영으로 돌아가서 유음류를 거머쥐게 해줄 수도 있고, 부주에게 군사를 빌려줄 수도 있어.”
“필요 없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두주께서 내리신 명령이 있으니 이행할 뿐입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적위군장에게 약조한 일을 처리할 것이고…… 그 일까지 마치고 나면 돌아가겠습니다.”
“하하하! 그런가?”
“이번이 아마도 문주님과는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일 것 같은데, 인사 없이 돌아가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그 말은 적위군장을 베어도 이해해달라는 말로 들리는데.”
“대화가 통하니 좋군요.”
“하하하! 이해하지. 베고 싶은 사람은 베면서 살아야지. 큰일도 했는데.”
성검문주는 사구정이 옆에 있는데도 태연히 말했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처럼.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노인이 목갑을 챙기며 일어섰다.
“이건…… 궁금해서 묻는 건데.”
노인이 성검문주를 쳐다봤다.
“듣기로 부주 두 명이 일 년 터울 사형제라고?”
“맞습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 말이야. 적면은 한참 젊은 사람이었는데, 부주는…….”
“킥킥! 제 나이 이제 마흔하나입니다.”
“엉?”
성검문주조차도 부주의 말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구정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던 그가 ‘마흔하나’라는 말에는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누가 봐도 노인의 나이는 예순을 넘어 보인다.
“노안증(老顔症)이라는 게 있는데, 제가 열 살 때부터 이 모습이라면 믿으실지.”
“아! 그런가?”
“노안증을 지닌 대신 비수(秘手)를 얻었죠. 황상은 죽을 겁니다. 틀림없이.”
노인이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