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十章 적혈지한(赤血之恨) (1)
휘이이잉!
산 정상에 찬 바람이 몰아쳤다.
어둠이 깃들 무렵에 몰아치는 산바람은 더욱 차갑고 매섭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옷깃을 여미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서운 바람일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시원하기만 하다.
모두 감회어린 눈으로 산 밑을 내려다봤다.
불야성(不夜城)!
밤을 대낮처럼 밝힌다는 말이 불야성이다. 바로 그 말이 어떨 때 쓰이는 건지 정확히 알았다.
산 밑에서 불길이 일렁거린다.
용암이 흘러내리듯이 불의 물결이 춤추고 있다. 드넓은 땅에 불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아직 초저녁인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맞다. 초저녁이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지 않았다. 하지만 산 밑에는 불길이 가득 피어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성벽이다.
도읍 전체를 휘감아 돌듯이 크고 넓은 성벽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너무 넓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선을 여러 번 쪼개서 봐야 전부 볼 수 있다.
도성의 광대함이 천 근 무게로 가슴을 눌러온다.
두 번째로 보이는 것은 성벽 안에 있는 많은 집이다.
얼마나 될까? 일만? 이만?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집이 성벽 안에 있다.
그리고 성벽 안에 또 다른 성벽이 있다.
안쪽에 형성된 성벽 안에도 상당히 큰 전각들이 즐비해 있다. 가장 큰 전각은 칠 층 높이로 우뚝 솟아 있어서 망루에 오르면 도성 전체를 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휘이잉! 휘잉!
찬바람이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식혀준다.
“다 봤나?”
쵸 디엔이 말했다.
“후후! 저걸 쓸어버리는 거죠? 당장 시작하죠. 지켜만 보자니 몸이 근질거려서.”
“킥킥! 곧 불벼락이 떨어질 텐데…… 그래, 세상 모르게 쉬어라. 편히 쉬다가 죽는 게 좋지.”
토족 전사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토족은 도성을 휩쓸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럴 만한 능력도 되지 않는다. 도성에 들어가서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당장 금군이 달려 나올 것이다.
토족 전사들의 목표는 딱 하나, 황상이다.
그런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도성 전체를 공격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있다.
이 정도는 무시해도 좋다. 그런다고 해서 토족 전사들이 목표를 잃어버리거나 경거망동하지는 않는다. 단지 불야성을 보고 흥분한 것뿐이다.
남만에서는 이런 불야성을 볼 수가 없다.
어떤 면에서는 압도되는 느낌도 있다. 적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 보일 수도 있다. 또는 실속은 없으면서 겉모습만 휘황찬란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처음 보는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은 개인 각자의 몫이다.
“내려가자.”
쵸 디엔이 말했다.
그러자 토족 전사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먼 길을 달려왔다. 드디어 도성에 도착했고, 눈 아래 굽어보고 있다. 아직도 도성에 들어서기까지는 반나절 거리가 더 남았지만, 이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들이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공격하지는 않는다.
쉰다.
원정 공격 시, 공격 전에는 반드시 쉰다.
토족 전사들의 불문율이다.
먼저…… 공격하는 곳이 낯선 곳이다. 토족 전사 중에 도성에 와본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성벽 안의 경계가 어떻고 또 그 안에 있는 황궁의 경비는 어떤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물론 웬만한 정보는 다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남이 얻어준 정보에 목숨을 걸 수는 없다. 내가 직접 보고 파악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의심 없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기본 바탕 정도는 마련해 놓아야 한다.
공격 전에 반드시 쉬어야 한다는 불문율은 적정을 탐지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두 번째로 충분히 휴식을 취한다는 목적이 있다.
마지막 불길을 태워내기 위해서 소진했던 등잔 기름을 가득 채운다. 체력을 보충하고, 진기를 가다듬는다. 병기를 손질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다.
“계곡 안쪽에 좋은 장소가 있습니다.”
꼰샥낙넨이 말했다.
쵸 디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족 전사가 말하는 ‘좋은 장소’란 몇 날 며칠이고 숨어 있어도 안전한 장소를 말한다.
그야말로 지극히 은밀한 장소다.
죄를 지은 범죄자나 세상 사람들을 피해서 은거하는 사람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다. 이런 곳에 숨으면 평생을 머물러도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토족 전사는 이백 명이나 된다. 그 많은 사람이 머물면 반드시 표시가 난다.
사흘에서 나흘, 딱 그 정도만 머문다.
또 쉬는 시간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너무 많이 쉬면 오히려 느슨해진다. 등잔 기름이 채워지다 못해서 줄줄 넘친다. 활시위는 바짝 당긴 후, 딱 한 호흡만 쉬고 쏘아내야 한다.
“띠엥 담 레이, 꼰 카오. 너희는 한 시진만 쉰다.”
“넷!”
두 사람이 대답했다.
한 시진을 쉬라는 말은 즉시 정찰을 나가라는 말이다. 땀에 젖은 옷을 벗고 한족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은밀히 도성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얻은 정보와 사실이 일치하는지 살핀다.
물론 황궁 안까지 조사하지는 않는다. 황궁 내부의 사정까지 파악한다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벌어질지 모를 미연의 사태를 철저히 방비한다.
타초경사(打草驚蛇), 괜히 풀을 건드려서 뱀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다. 뱀을 놀라게 할 바에는 차라리 풀을 건드리지 않는다. 황궁 밖에서만 살펴도 황궁 안의 사정까지 대충 알 수 있다.
“족장님도 쉬시죠.”
꼰샥낙넨이 말했다.
“내 걱정은 말고, 너도 쉬어라.”
쵸 디엔은 말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오늘 수련을 하지 못했다. 다오 푼 라야는 하루를 쉬면 그만큼 무뎌진다.
“오늘 하루 정도는 쉬셔도 되는데.”
“아니. 칼은 날카로울수록 좋아.”
“그럴 필요가 없어서 하는 말이지. 지금 족장님의 최상이야. 누구도 족장님의 칼을 받아낼 수 없어.”
“그건 그렇고…… 우린 만일을 대비하자.”
“재수 없는 소리!”
“재수 없다고 해도 할 수 없어. 금군 숫자만 만 명이 넘어. 대비는 해야지.”
“뭘 어쩌자고?”
“만일의 경우, 족장님만이라도 살린다. 어때?”
“그게 될까?”
“어떻게든 되게 만들어야지.”
토족 전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숙의했다.
‘흠!’
쵸 디엔은 전사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한숨도 나오고 실소도 토해진다. 또 앞으로 휴식을 취하는 삼사일 동안에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았다.
편히 쉬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 모두 내 마음 같지 않다. 그 부분을 살펴라.
전임 족장이 늘 하던 말이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수하들의 말을 듣다 보니 퍼뜩 생각났다.
토족 전사들은 수만 리를 달려왔다. 목적은 오직 하나, 중원 땅에서 죽은 동족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다. 전임 족장과 칠백전사의 죽음을 땅에 묻힐 수 없다.
피에 대한 대가는 피로 받아낸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한마음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모두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가득하다.
그런데…… 정작 전사들은 이번 급습이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황궁에 막대한 타격을 주긴 할 것이다.
전사 중 누구도 순순히 죽을 생각은 없다. 자신은 죽더라도 적을 최대한 많이 죽인다. 최소한 두 명, 세 명은 죽여서 피의 대가를 철저히 받아내고자 한다.
삶에 미련을 가진 자는 없다.
그러나 최종 목표, 황상을 죽인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족장을 위해서 퇴로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 증거다.
목적을 이룬 자에게는 퇴로가 필요 없다. 황상을 죽이면 돌아가지 못해도 상관없다. 족장이 죽는 것도 무방하다. 애초에 그럴 각오로 떠나왔다.
퇴로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나 거론된다.
황상을 죽이지 못했을 때…… 또 다른 기습을 위해서 족장만이라도 살려야 한다.
이런 생각은…… 태산에 오르려는 자가 ‘나는 정상에 도착하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며 첫발을 내딛는 격이다.
그런 마음으로는 결코 태산에 오르지 못한다.
몸이 조금만 힘들어도 ‘이제 돌아가야지. 어차피 오르지 못할 건데.’라고 포기한다.
적군을 두 명, 세 명 죽이면 뭐하나. ‘이제 됐어, 내 할 바는 다 했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황제를 죽이겠다는 목표는 잊힌다. 다른 사람에게 미루게 된다.
‘이 정도면 됐다’라는 마음이 제일 고약하다.
그런 마음을 갖는 한, 황상을 베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하다.
‘패배 의식부터 씻어내야겠군. 후후! 도성이 너무 크고 넓었어. 그런 광경을 보면 위축부터 드는 건 사실이지. 이곳이 대국인 것은 변함없으니까.’
쵸 디엔은 눈살을 살며시 찌푸렸다.
토족 전사들에게 황상도 인간이며 벨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줘야 한다. 그러자면 최선책을 버리고 차선책으로 가야 한다. 조금 힘들더라도.
‘이렇게 되면 차선책으로 가야 하는데…… 필요 없는 희생이 생길 거야. 놈들…… 왜 그런 생각을. 후후!’
쵸 디엔은 쓴웃음을 흘렸다.
최선책은 쥐도 새도 모르게 황궁에 잠입해서 황상을 베어내는 것이다. 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가장 희생이 적으면서 목표를 제거할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라는 말은 침입자의 생각일 뿐, 저쪽은 결코 그런 침입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마도 전사들이 성벽을 넘자마자 찾아낼 것이다.
이것은 패배의식이 아니라 사실 인지다.
패배의식과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다르다.
정확하게 앞으로 벌어질 일을 꿰뚫어 보고 타계할 방책을 세워야 한다. 이 지점에서 패배 의식은 물러섬에, 현실 직시는 돌파에 방점이 찍힌다.
침입이 발각되면 바로 이십인 일 조, 전원 십 조로 분산한다.
오조 백 명은 사방으로 분산해서 난전을 유도한다. 다른 오조는 곧장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돌진 오조 중에서도 일조는 앞뒤 보지 않고 돌진만 하고, 나머지 사조는 일조를 호위하면서 앞을 막는 가지를 쳐낸다.
뚫고, 뚫고, 뚫고 들어가야 하는 격전이다.
대단한 혈전이 벌어질 것이다. 토족 전사 이백 명 중 살아남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책이다.
차선책은 토족 전사들에게 승리의 달콤함을 맛보여 주는 것이다.
초반에 강력한 적을 무너뜨려서 이들도 사람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물론 전초전을 치르니만큼 필요 없는 희생이 나올 것이다. 급습이 발각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최선책을 버리고 차선책을 택한다. 그것이 패배의식을 갖고 행하는 최선책보다도 돌진 의식만 가진 차선책이 훨씬 성공 가능성이 크다.
“다녀오겠습니다.”
띠엥 담 레이와 꼰 카오가 말했다.
“하나 더. 근위대장과 호황위 군주에 대해서 파악해라.”
“알겠습니다.”
“사흘 후, 내일모레. 바로 공격한다. 그 안에 두 사람의 동선을 파악해 놔. 호황위 군주는 황궁 안에만 있다고 하니까 찾기 힘들겠지. 그러면 버려. 일부러 찾으려고 애쓰지 마라. 황궁 밖으로 나왔을 때만 파악하고…… 근위대장은 백살도축 때문에 나와 있을 거야. 반드시 동선을 잡아.”
“넷!”
두 사람이 힘차게 대답했다.
호황위 군주 아니면 근위대장을 잡는다. 그 정도의 인물을 잡으면 토족 전사들의 투지도 되살아난다. 거대한 위용을 보고 위축됐던 마음이 사라진다.
스릉!
쵸 디엔은 칼을 뽑았다.
다오 푼 라야를 수련한다. 느린 동작으로 적양팔식을 펼친다.
쵸 디엔은 다오 푼 라야 일 초를 펼치는 데 일다경 넘는 시간을 사용한다.
실제로 격투 시에는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할 정도로 빠른 칼이다. 그런 칼을 쳐내는 데 무려 일다경, 속도를 거의 천 배 넘게 늦춘다.
이런 식으로 초식을 전개하면 일 초만 수련해도 진기가 완전히 바닥나는 느낌이 든다.
손발이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전신을 적신다.
인간이 버티기 힘든 기괴한 자세로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벌을 받는다고 해야 하나? 근육이 경직되다 못해서 마비까지 일어난다.
상당히 어려운 수련이지만 쵸 디엔은 이미 능숙해졌다.
이제는 다오 푼 라야 전 초식을 완식(緩式)으로 펼쳐도 몸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스으으으……!
바람이 부동자세로 서 있는 쵸 디엔을 스치며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