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十章 적혈지한(赤血之恨) (2)
백살도축은 중지되었다.
겉보기에는 그렇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도 진행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동영 인자는 누구를 죽일지 백 명에 대한 신상명세를 공개하지 않았다. 수많은 고관 중에서 허도기와 반대쪽에 있는 사람을 무작위로 죽이는 중이다.
그러니 도검에 죽은 자들만 백살도축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없다.
독살당하거나, 마차에 치여서 죽거나,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들까지 모두 의심해야 한다.
유음류라고 하니 오대신술만 생각하지만, 명백히 살수다. 사람을 죽이는 데 무공을 고집하지 않는다. 죽일 수만 있다면 뭐든지 행할 자들이다.
공식적으로 동영 인자들에게 확실히 척살된 고관은 모두 서른두 명이다.
상당히 많은 숫자다.
그중에서 당상관만 열일곱 명이다. 나라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지금 고관들 곁에는 취화원 살수들이 있다. 또 금군도 호위에 나섰다. 조금이라도 피살 위협이 있다고 판단되면 신분 여하를 불문하고 호위한다.
- 조용하다고 경계를 늦추지 마라! 놈들은 우리 주위에 있어. 기회만 생기면 즉시 달려들 거다. 아귀처럼.
근위대장이 아침 훈시를 할 때마다 하는 말이다.
동영 인자들의 습격은 호황위 군주와 근위대장이 토형술을 깬 후부터 뚝 끊겼다.
고관도 더는 죽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이런 고요는 언제 깨질지 모른다. 지금 당장 깨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조용하군.’
근위대장은 시가를 순찰했다.
허리에 검은 찼지만, 갑옷은 벗었다. 민간인 복장으로 시가를 순찰한다.
이것은 획기적인 변화다.
평생 황궁에서 떠나지 않던 근위대장이 황상 곁을 떠나 시가를 거닌다는 것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근위대장은 호황위 군주를 믿는다.
그녀가 황상을 진심으로 호위하고 있어서 안심하고 시가로 나올 수 있다. 또 호황위 군주는 황상을 지킬만한 능력이 있다. 조직의 강함이나 본인의 무공이 근위대와 견줄 수 있다.
몽설에게 순찰을 부탁하고, 자신이 황상 곁을 지킬 수도 있다.
그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면 동영 인자들의 살수를 막아낸다는 보장이 없다.
실제로 동영 인자들이 어떤 식으로 밀고 들어오는지 보지 않았는가.
동영 인자들의 살법은 군인이 아는 전쟁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인들의 싸움과도 다르다. 그들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용할 만한 사람들은 모두 이용한다. 하다못해 어린애까지 끌어다가 쓴다.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면 병기뿐만이 아니라 나무젓가락까지 모두 끌어낸다.
이런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근위대보다는 취화원이 훨씬 낫다.
그래서 황상 곁을 기꺼이 몽설에게 내주었다.
그녀는 믿을 수 있다.
저벅! 저벅!
금군이 걸어온다.
좌우로 다섯 명씩, 열 명이 누군가를 호위하고 있다.
열 명의 호위를 받는 사람이라면 당상관이다. 최소한 일부(一部)를 이끄는 장(長)이다.
지붕 위에서는 취화원 살수들이 날다람쥐처럼 따라붙었다.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매우 은밀해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는다. 취화원의 암영검은 몇 번을 봐도 감탄이 나온다. 하지만 근위대장은 단번에 파악했다.
구곡주라면 모를까, 다른 살수들은…… 그의 눈을 속이기에는 아직 수련이 미진하다.
지나가던 근위군이 근위대장을 알아보고 눈인사를 했다.
고개도 숙이지 않고 단지 고개만 까딱거리는 인사다.
근위대장은 황궁 밖에서는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많은 사람이 알아보는 것도 귀찮고, 그럴 바에는 민복을 입고 밀행하는 의미가 없어서다.
조용히 시가를 거닐면서 동영 인자들의 급습에 대비한다.
‘오늘도…….’
근위대장은 ‘오늘도’ 다음에 ‘아무 일이 없군. 그럼 이만 돌아갈까’라는 생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파파파파팟!
근위대장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취화원 살수들이 지나간 자리, 지붕 위에 낯선 자들이 나타났다.
취화원 살수는 아니다. 근위대도 아니다. 그러면 동영 인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저들은 민복을 입었다. 민간인이 지붕 위에? 아니다. 민간인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
쒜에엑! 스스스스슷!
지붕을 타는 솜씨가 매우 날렵하다.
취화원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인데, 은밀하고 속도는 전혀 뒤지지 않는다.
‘수상한 놈들이군.’
스읏!
근위대장은 즉시 쫓아갔다.
머릿속에서 퍼뜩 ‘그놈들이야!’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동영 인자가 아니면 지붕 위를 길처럼 이용할 리 없다. 보통 사람들은 지붕 위로 올라설 일이 거의 없다. 동영 인자가 아니더라도 수상한 자들이 분명하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멀찍이 떨어져서 암암리에 쫓아갔다.
저 정도의 무공을 지닌 자들이라면 동영 인자라고 해도 하급 살수에 불과하다.
아걸의 말을 빌리면 도성에는 부주가 숨어들었다고 한다.
진작 도성에 잠입한 부주는 두주조차도 회수할 수 없는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다.
황제 암살!
동영 암살단이 백살도축보다도 한발 앞서는 절대명령을 수행하고 있다. 백살도축을 중지한 것도 살아남은 인자들을 초점을 황제에게 집중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부주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 후에도 동영 인자들이 날뛰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가장 위험한 자부터 처리하고, 그 밑을 정리하면 된다.
스스스! 스스!
근위대장은 수상한 자들을 쫓아서 골목길을 누볐다.
사내들은 지붕을 매우 은밀히 탔다. 모습을 최대한 숨기려고 애쓰면서 움직였다. 하지만 근위대장의 눈에는 환히 보였다. 저들은 취화원 살수보다도 미숙했다.
“이쪽은?”
근위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를 쫓았을까? 근 반 시진은 따라붙은 것 같다. 저들도 도성에서 볼일을 마쳤는지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머뭇거림 없이 달려간다.
“도성 안에 숨은 줄 알았는데, 밖에 있었나? 이러니 못 찾았지.”
근위대장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 수상한 자들을 쫓아갔다.
수상한 자들은 도성을 빠져나와 들판을 질주했다. 들판 앞에 야트막한 야산으로 가는 것 같다.
“산으로 들어가면 난감한데. 그래도 쫓아야지 어쩔 수 있나.”
스으으읏!
근위대장은 모습을 철저히 숨기면서 뒤를 쫓았다.
스슷! 스스스스스!
주위에서 기척이 일어났다.
‘아!’
한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미숙함이라니!
근위대장은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은밀히 숨어서 이동하던 자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야산 곳곳에서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이 싸늘한 시선으로 근위대장을 쳐다봤다. 그가 쫓아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확실히 추격에는 젬병이야.”
근위대장은 툴툴 웃으면서 일어섰다.
그의 무공이 낮아서 발각된 것이 아니다. 추격술이 서툴렀을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전문적인 추격술을 배우지 않았다. 무공을 수련하면서 터득한 몸놀림으로 쫓아온 것이다.
반면에 동영 인자들은 도피와 추격술에 목숨을 걸었다.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쉬었을 거다.
근위대장은 그들을 쭉 훑어왔다.
‘응?’
뭔가가 이상하다.
동영 인자들은 흑의를 입고 복면을 한다. 그런데 이들은 복면하지 않았다. 상의는 벗었고, 하의는 가죽으로 된 치마를 입었다. 두 발은 맨발이다.
병기도 이상하다. 투박하게 구부러진 만도다.
근위대장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남만족?”
“그렇게 부르면 섭섭하지. 우리를 어설픈 남만족 따위로 부르지 마. 우리는 토족이다. 남만족의 왕. 밀림을 지배하는 어둠의 군주. 아는지 모르겠지만.”
“후후! 남만족의 왕은 다른 사람 아냐? 진짜 왕은 지금 병사를 이끌고 국경에 와 있지 않나?”
“마음대로 생각하고.”
근위대장은 자신에게 말대꾸하는 자를 쳐다봤다.
주위에는 토족이 이백여 명이나 있다. 그중에 이 자가 우두머리인 듯싶다.
“그런데 토족이 중원에는 무슨 일로?”
“여기 얼추 이백 정도 있는데, 전혀 기죽지 않네. 역시 혈랑이라 이건가. 후후! 얘들아! 이분이 바로 혈랑이시다. 야수검을 터득한 핏빛 늑대. 눈에 담아둬.”
‘나를 알고 있다 이건가?’
근위대장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자신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침없이 대한다. 야수검까지 알고 있는 자가.
근위대장이 말했다.
“그건 대답이 아닌데? 말하지? 토족이 중원에는 무슨 일로 왔나? 대답 여하에 따라서 너희의 목숨이 좌우되니 신중하게 말해. 상대가 누군지 똑바로 알고.”
“그게 뭐 어려운 말이라고. 황제를 죽이러 왔어.”
“뭐라!”
근위대장은 어처구니없어서 상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농담은 아니다. 상대의 눈빛에서 진한 살기가 퍼져 나온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후후! 얼마 전에 아걸에게 토족 칠백 명이 완전히 발렸지. 그 싸움에서 한 명이 개구멍으로 도망갔는데, 이유가 그럴듯해. 토족에게 적양팔식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나? 아걸이 사정을 봐줘서 돌려보냈는데, 그놈이 네놈인 것 같군.”
“하하하하! 못된 버릇이야. 남의 상처를 헤집는 건.”
두 사람은 여유 있게 웃었다.
이미 상대가 누군지 안다. 어떤 무공을 지녔는지도 안다.
야수검 대 다오 푼 라야.
“검법을 토족에게 전한다며? 전했나?”
“검법을 터득했지.”
“말귀를 영…… 맥을 이었냐고 물어봤는데?”
“그런 건 필요 없다.”
“그러면 그때 아걸이 실수했네. 검법의 맥을 이으라고 돌려보냈더니 그런 건 필요 없다니. 그럼 토족도 당대에 막을 내리겠네. 너희를 끝으로.”
근위대장이 검을 잡았다.
“그럴 생각으로 중원 땅을 밟았다. 살아 돌아갈 생각은 없어. 우린 죽을 것이고 토족은 막을 내리겠지. 다오 푼 라야도 더는 전승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니다.”
“오늘일지 아닐지 두고 봐야지.”
“나를 일부러 유인해 낸 것 같은데, 이유는?”
“황제라는 본 요리를 먹기 전에 잠깐 입맛을 돋우는 전채(前菜) 정도로 하지.”
“그게 적양팔식으로 가능할까?”
“자고로 맹수를 잡을 때는 불을 쓰는 게 가장 좋아. 야수검을 깨는 데는 다오 푼 라야가 제일이지. 조금 전만 해도 오늘 죽을지는 몰랐을 텐데, 후후!”
스릉! 스르릉!
근위대장과 쵸 디엔은 병기를 뽑았다.
‘일이 이상하게…… 꼬였어.’
쵸 디엔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원래 근위대장을 수하들에게 던져줄 생각이었다.
다소 희생이 따르더라도 수하들의 손으로 직접 죽이는 것이 더 벅찬 격정을 불러온다. 희망을 가져온다. 황제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돋궈준다.
하지만 근위대장을 보는 순간, 즉시 생각을 돌렸다.
‘이 자, 맹수다!’
수하들은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말로만 듣던 야수검…… 쵸 디엔은 밀림 속에서 흑표범 무리에게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
이자는 오직 자신만 상대할 수 있다.
토족 전사가 이백 명이나 있지만, 싸움이 붙으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갈 것이다.
그러면 희생이 너무 크다.
이 싸움을 만든 효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절망감만 안겨줄 것이다. 아니, 벌써 잘못되었다. 근위대장이라는 자조차 족장이 직접 상대할 정도라면…… 정말로 황궁을 침입해서 황상을 벨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 것이다.
실제로 토족 전사들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얹히고 있다.
싸움을 잘못 일으켰다. 근위대장을 조금 더 상세히 알았어야 한다.
‘이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해. 그것도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쵸 디엔은 검을 꽉 잡았다.
‘풋! 난 정말…… 어쩔 수 없어.’
근위대장은 고소를 머금었다.
전장을 휘돌 때부터 크고 작은 매복에 자주 걸렸다. 상대를 무시하고 무작정 뒤쫓다 보면 지금처럼 포위당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추격에 신중해야지 하고 반성했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곧 잊어버린다.
야수검은 어떤 포위망도 찢어버린다.
토족 전사들을 이끄는 자, 쵸 디엔의 칼에서 검을 불길이 토해졌다.
칼을 들고 있는데 불방망이를 들고 있는 것 같다.
‘운 나쁜 자들. 하필 전채로 택한 게 나일 건 뭔가. 죽는지 모르고 독을 만져. 후후!’
스읏!
검을 들어 올렸다.
다 찢어버린다. 지금까지 해왔던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