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十一章 낙화혈룡(洛花血龍) (2)
탁탁탁탁 탁탁탁!
아걸이 달려왔다.
아걸이 달려오는 모습은 전혀 놀랍지 않다. 신비하지도, 경쾌하지도 않다. 빠르다거나, 강하다 혹은 위험하다는 느낌이 일절 일어나지 않는다.
신법이 지극히 평범하다!
소위 중원제일도라는 자인데…… 달려오는 모습이 너무 평범해서 혹여 다른 암수가 숨어 있지 않나 의심될 지경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반철도를 주고 앞으로 뛰라고 하면 꼭 아걸처럼 뛰어갈 것이다.
“이 정도면 맞힐 수 있어!”
토족 전사들의 눈에 활기가 감돌았다.
중원제일도라고 하기에 놀라운 줄 알았더니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몸놀림이나 칼 쓰는 속도, 신형의 움직임…… 모두 따라잡을 수 있다. 싸울 수 있다.
아걸의 몸놀림은 토족 전사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좋아!”
란 차이가 칼을 휘둘렀다.
그는 주엉이 자신에게 당부한 말을 잊어버렸다. 어떻게든 현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아니, 잊고 싶어서 잊은 것이 아니다. 아걸이 그를 향해서 달려왔기 때문에 되새길 틈이 없었다.
우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한다.
아걸과 싸워야 한다!
아걸의 칼은 스무 명 중에서도 유독 란 차이에게 집중되었다. 주엉이 한 말을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쉐에에엑!
란 차이가 쳐낸 칼이 와락 아걸의 머리를 잘라갔다.
란 차이의 칼은 매우 날카로워서 금방이라도 아걸의 머리가 싹둑 잘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칼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슈웃!
“간발의 차이! 아!”
토족 전사들은 아쉬움에 탄식을 절로 흘렸다.
정말 딱 눈썹 한 올만큼만 칼을 밑으로 내렸어도…… 그랬다면 승부가 났다. 아걸을 잡는다.
그 순간, 반철도가 란 차이를 쳤다.
퍼억!
란 차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반철도의 일격은 매우 강력하다. 란 차이는 죽는 줄도 모르고 쓰러질 것이다.
“으……!”
토족 전사들이 다시 뒤로 물러섰다.
아걸의 일격을 보자 새삼 그가 중원제일도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방금 일격은 매우 놀라웠는데, 다시 보니 또 평범하다. 중원제일도의 신위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평범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이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정도쯤이야 금방이라도 베어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란 차이는 간발의 차이로 아걸을 놓쳤다. 티끌만큼만 칼을 내렸어도 아걸을 잡았다.
“할 수 있다! 잡아!”
주엉이 명령했다.
척척척! 척척!
토족 전사들이 재빨리 아걸을 포위했다. 기세등등하게.
퇴빙!
살수들만 아는 은어(隱語).
얼음이 매우 천천히 녹아서 없어져 버리는 듯이 전혀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뛰어남이나 비범함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경계도 하지 않는다.
퇴빙을 이루면 모든 기도가 사라진다.
강렬한 투지 같은 것이 드러날 리 없다. 이미 얼음은 녹아서 물이 되었다. 겉모습에서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마음속에서도 사라진다.
아걸은 토족 전사들과 싸우겠다는 강렬한 투지를 일으키지 않았다.
칼을 들고 있고, 싸워야 하니 싸울 뿐…… 굳이 적을 치겠다는 생각이 없다.
이러한 속마음이 겉으로 우러나야 진정한 퇴빙이 된다.
퇴빙은 아걸을 평범한 범인으로 보게 만든다.
평범한 것 같기도 하고, 무인일 것 같기도 하고, 높은 수준에 있는 자만은 분명히 아닌 것 같고…… 이런 아리송한 판단 기준이 아걸을 무승 육칠 단계로 보게 했다.
아걸은 특정한 무공을 펼치지 않는다.
방금, 란 차이를 죽인 일격은 이십이대 문주의 산화도다.
산화도를 정식으로 펼치면 몸을 한 바퀴 크게 돌아야 한다. 칼도 몸을 따라서 빙글 움직인다. 산화도라는 명칭에 어울릴 만한 큰 움직임이다.
아걸이 방금 전개한 일격은 크지 않다.
몸은 삼분지 일 정도밖에 돌지 않았다. 하지만 칼은 완전히 한 바퀴를 휘둘렀다.
그 차이가 아걸을 비범에서 평범으로 떨어뜨린다.
산화도를 펼치면 매우 비범해 보이는데, 정작 효과는 같으면서 움직임은 적은 수법을 택하자 당장 평범해졌다. 사실은 산화도를 모두 펼칠 필요가 없었을 뿐인데.
아걸은 란 차이에게 딱 알맞은 손속만 전개했다.
스읏!
아걸은 포위한 토족 전사들을 쳐다보면서 반철도를 가슴 앞에 세웠다. 일면, 가슴을 보호하는 모양새다.
이런 모습 또한 아걸을 비범에서 평범으로 떨어트린다. 아걸이 방어에 치중하고 있지 않나. 무슨 중원제일도가 토족 전사 스무 명을 앞에 두고 방어만 하나. 당장 호랑이가 양 떼를 찢어 죽이듯이 달려들어도 모자랄 판에.
“죽어!”
쌔쌔쌔쌔!
사방에서 칼바람이 불었다.
만도가 아걸을 몰아쳐 왔다. 그 순간,
따당! 땅땅땅땅!
검과 칼이 맞부딪히며 불똥을 튀었다.
아걸은 칼을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움직였다. 아니, 토족 전사들이 일부러 가슴 앞에 세워진 칼을 떨구려고 집중적으로 칼만 공격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 순간, 반철도가 번뜩였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짧은 순간, 반철도가 전후좌우 네 곳을 향해 활짝 뻗어 나갔다가 거두어졌다.
십삼대 문주의 단도격타!
아걸의 무공은 매우 깨끗하다. 하지만 절정 수법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크윽!”
“악!”
전사 네 명이 쓰러졌다.
그제야 토족 전사들은 아걸이 중원제일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으…….”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토족이 쓰는 만도는 밀림에 적응된 칼이다.
밀림에서는 칼을 쓰기가 무척 힘들다. 나무에 맞고, 바위에 부딪히고…… 광활한 평지에서 칼을 펼쳐낸 것과는 전혀 다른 칼싸움이 전개된다.
만도는 장애물을 스치듯 뚫고 다니면서 적을 친다. 어떤 대는 넝쿨 같은 장애물을 단숨에 끊어내고 쳐야 할 때도 있다. 당연히 도법이 굉장히 난폭하면서도 정교하고 빠르다.
아걸처럼 느린 움직임은 충분히 잡아낼 수 있다.
한데, 정작 칼을 쳐보면 빗나가기만 한다. 간발의 차이로…… 아쉬움만 남긴다.
“잡을 수 있어! 잡자!”
토족 전사가 소리쳤다.
아걸은 토족 전사 스무 명에게 진정을 다 했다.
유음류 두주와 마주 섰을 때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쏟아부었다.
일심전력(一心專力)!
이런 집중이 오히려 아걸은 퇴빙 상태로 유도한다. 비범하지 않고 평범하게 만든다.
쒯!
복부로 흘러드는 칼을 피해서 뒤돌려 쳤다.
상대를 베고 빠져나온 칼로 다시 옆에 있는 자를 치고, 재차 휘둘러서 뒤따라오는 자의 머리를 쳤다.
순식간에 몸을 세 번 회전했고, 세 명이 나가떨어졌다.
삼십 대 문주의 회선도.
이제 삼십육 문주의 무공은 아걸의 몸에 녹아있다. 자신의 칼이라고 생각한 묘리도 녹아있다. 자연도를 비롯해서 모든 칼이 일신에 함축되었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동작이 튀어나온다.
개개의 동작은 각기 다르나, 모두 하나로 어울려서 전체 초식을 구성한다.
토족 전사들이 다시 뒤로 물러섰다.
분대장 우엉까지 죽었다. 이십여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대여섯 명에 불과하다.
이쯤 되면 아걸은 항거할 수 없는 사신처럼 보인다.
“물러서지 마! 싸워!”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리고 즉시 공격이 이어졌다.
사방에서 늑대들이 달려든다.
남만에는 맹수가 득실거린다. 당연히 맹수를 사냥하는 법도 발달했다.
남만족이라고 해서 맹수들과 정면 승부를 가리지는 않는다.
맹수가 오면 일단 도주한다. 도주하면서 함정으로 유인하거나 나무 위에서 공격하거나…… 정면충돌만은 필사적으로 피한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공격한다.
토족 전사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아걸을 공격했다.
하지만 토족이 어떻게 싸우는지는 아걸도 잘 안다. 이미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
파앗!
아걸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졌다.
취화원의 절정 신법, 암영검이다.
아걸이 펼치는 암영검은 취화원 살수들이 펼치는 암영검과는 차원이 다르다. 취화원 살수들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지만, 아걸은 몸 자체로 암영을 끌어낸다.
진기가 어둠을 만든다.
아걸의 신형이 순간 이동을 하듯 사라졌다. 그리고 한순간에 다른 곳에서 툭 튀어나왔다.
파앗!
“크윽!”
비명이 울렸다.
아걸이 암영검을 펼치자, 비로소 그가 고수다워 보였다. 그전까지는 칼을 막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초식다운 초식을 구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거……!”
토족 전사들이 신음을 흘릴 때, 아걸의 신형이 다시 눈앞에서 싹 사라졌다.
파앗!
그가 거짓말처럼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빌어먹을 암영검!”
누군가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은신술, 그리고 곧바로 튀어나오는 살법!
토족 전사들은 변변히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설마 중원제일도가 암습을 가할 줄이야. 암영검 같은 무공은 하급 무인이 상급 무인을 상대할 때나 사용하는 공부다. 고수가 하수에게 쓰지는 않는다.
원래 암영검 자체가 암습에 특화된 공부다.
아걸이 이런 암습을 토족 전사들에게 가할 줄이야.
캄캄한 밤, 어둠이 짙은 숲속에서는 말도 안 되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걸은 잠시 도성을 쳐다봤다.
토족 전사들이 도성을 공격한다. 몽설과 근위대장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어떻게 대처할까?
아걸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칼이 하나 있다.
토족 족장이 보여주었던 적양팔식이다.
그중에 다오 푼 라야 최후초식인 뇻 티엔은 수련한 사람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형태로 표현된다. 일홀문주의 일홀도가 다르듯이 다오 푼 라야도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쵸 디엔이 수련한 뇻 티엔은 어떤 형태일까?
아걸은 모닥불로 돌아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토족 스무 명 중 빠져나간 자는 없다. 모두 이 숲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걸이 그렇게 만들었다. 마지막 몇 명 남았을 때, 암영검을 펼친 게 그런 이유에서다.
이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면 한두 명쯤은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암영검을 펼쳐서 가장자리를 벗어나는 자부터 공격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싸웠을 것이다. 어차피 상대가 안 되긴 했지만.
타탁! 타탁!
아걸은 타오르는 불길에 손을 녹였다.
이번 싸움은 몽설에게 맡긴다.
당장 달려가서 도와주는 게 마땅하다 싶지만…… 몽설과 취화원을 위해서 그러지 않는 쪽이 좋다고 판단했다.
몽설에게는 구곡이 있다.
오곡은 정보 취합으로 전투에서 빠지고, 육칠팔구곡은 취화원 살림살이를 거든다.
전투나 살수를 일이삼사곡이 전담한다.
사곡은 각기 백 명으로 형성되었다. 사백 명이다.
토족 전사는 몇 명이나 동원되었을까? 자신과 은거무인들이 상대했던 때처럼 칠백 명 정도 된다면…… 단순한 생각이지만 취화원이 밀릴 것 같다.
더욱이 취화원은 백살도축 중에 희생이 많아서 사백 명이 채 안 된다. 그리고 취화원의 무공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한 후진도 많다. 싸움이 벌어지면 희생이 불가피하다.
‘그래도…….’
맞다. 그래도 이 싸움은 몽설이 이겨내야 한다.
몽설은 무림에서 칼밥을 먹어야 한다. 이번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칼날 위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자면 험난 역경도 스스로 견뎌내야 한다.
장담하건대 이번 역경만 견뎌내고 나면 몽설은 한층 더 발전할 것이다.
어쩌면 취화원은 성검문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성할지 모른다.
취화원 살수들은 정동 싸움을 치른 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각 곡에 유리한 진법과 형태를 만들어 냈다. 공격 형태를 만들어 냈다. 어떻게 싸우는지를 알아버렸다.
싸움은 강적을 만날수록 더욱 발전한다.
“내일 낮에 보자. 잘 싸워.”
아걸은 모닥불을 보면서 다시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