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554화 (554/600)

第百十一章 낙화혈룡(洛花血龍) (4)

“수고했어. 이제 우리가 맡을게.”

이곡주 소호가 말했다.

이곡은 원래 서문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서문에만 침습이 없다. 동문, 북문, 남문 모두 들이치는데 서문에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사실, 정문을 제외하고 다른 곳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격해 오는 숫자가 이십 명 안짝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주의를 돌리기 위한 눈가림용 공격이다.

그 정도면 취화원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이곡주 소호는 독자적인 판단을 내렸다.

이것은 원래 합의된 것이 아니지만, 지금은 이곡을 정문으로 돌리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서문에는 열 명만 남겨둔 채 전원 정문으로 달라붙었다.

원래 정문은 제일곡 다음에 육칠팔구곡이 순차적으로 맡기로 되어 있었다.

육칠팔구곡은 살수 요원이 아니다. 취화원을 보조하는 보조원들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취화원 절기를 수련했고, 제일곡이 방향만 제대로 틀어준다면 그다음부터는 유인하는 것에 불과해서 육칠팔구곡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요행히 서문 쪽 살수가 도착했다.

“수고해.”

월영이 팍팍하게 말했다.

그녀의 음성은 바싹 매달라 있었다. 심한 갈증 때문에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 현재도 싸움 중이다.

소호는 월영의 어깨를 짚어서 쉬라는 뜻을 표시한 후, 즉각 명령을 내렸다.

“제일곡이 방향을 틀었다! 제대로 유인해!”

제이곡 살수들은 소리 없이 전장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제일곡이 어떻게 찢겨 나가는지 똑똑히 봤다.

저들은 야수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후려친다. 암영검을 경험한 후에는 어둠이건 그늘이건 가리지 않고 무조건 공격한다. 칼질 한 번 더 하는 것이 목숨을 잃는 것보다 낫다는 주의다.

그러니 암영검이 깨졌다.

눈뜬장님처럼 무조건 칼을 휘두르는데 상대할 재간이 없다.

“암영검에 이런 맹점이 있었네. 온 세상을 다 들쑤셔 놓겠다고 덤벼드는 데는 도리가 없어. 이곡도 희생이 크겠네.”

오곡주 취운이 중얼거렸다.

어쨌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저들은 중문을 넘어서지 못한다.

월영은 한 사람을 노려보았다.

토족 전사 백여 명이나 있지만, 그중에 딱 한 사람만 눈에 들어온다.

이런 걸 보고 숙살(宿殺)이라고 한다.

전생에서부터 악연이 얽혀 있어서 서로 간에 반드시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관계라는 뜻이다.

이 싸움에서 수많은 사람이 싸우고 죽는다. 하지만 자신과는 무관한 것 같다. 오직 너와 나, 딱 둘만 이 싸움의 주인공처럼 여겨진다. 상대를 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월영이 한 사내를 보고 그렇게 느꼈다.

취화원 제일곡이 멸절되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는다. 토족 전사들이 황상을 베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의 눈은 이미 한 사람에게 꽂혔다.

원래 숙살이라는 것은 없다. 단지 너만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가 숙살 형태로 드러난다.

“자망.”

“네.”

“제일곡을 맡아.”

“네? 네.”

“지금부터 제일곡은 네가 지휘해.”

“곡주님, 전 곡주님처럼 강단이…….”

“네가 지휘해.”

스릉!

월영이 검을 뽑았다.

월영의 눈은 이미 활활 타올랐다.

그녀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몽설도, 소호도, 자신의 수하인 자망, 자괴도 무시했다. 오직 한 사람, 이름도 모르는 자만 노려봤다.

“아!”

자망은 손을 들어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월영은 이미 깊은 어둠에 묻혔다. 암영검의 정화, 암중심처(暗中深處)에 들었다. 이 상태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깨우지 못한다. 오직 그녀 자신만이 자신을 부를 수 있고, 꺼낼 수 있다.

암영검이 극고에 이르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 한복판에 던져진다고 한다. 그곳에는 싸움은 없고, 고요와 평화만 존재한단다.

암중심처라고 한다.

월영은 암중심처에서 한 사람을 쏘아보고 있다. 이제 곧 살법을 전개할 것이다. 취화원 암영검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살학이 곧 터지려고 한다.

월영이 누구를 노려보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가 노려보는 곳에는 토족 전사가 백여 명이나 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어느 한 사람에게 눈길이 꽂혔다.

“제일곡 관주(觀主)!”

자망이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제일곡은 일체 모든 행동을 삼가한다. 절대 움직이지 않고 부동 상태에서 제일곡주를 지켜본다.

원래 관주라는 명령은 훈련상태에서나 발할 수 있는 명령이다. 지금처럼 도검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관주’ 명령을 내리는 것은 손 놓고 칼을 맞으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자망은 관주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월영이 보여줄 살학은 암영검 최고봉이다. 평생 두 번 보기 힘든 절정 살법이다.

토족 전사에게 칼을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살학만큼은 지켜봐야 한다.

스읏! 슷! 스읏!

“꼰샥낙넨.”

“네.”

꼰샥낙넨은 쵸 디엔의 부름에 답했다.

“널 노리는 자가 있네.”

“저 말입니까? 하하!”

꼰샥낙넨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정말이다. 여살수 한 명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채,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다른 토족 전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서 상대해줘.”

“후후! 내가 만만해 보였다 이건가?”

꼰샥낙넨이 씩 웃었다.

걸어오는 여인이 누군지 안다. 제일곡을 지휘한 월영이다. 충분히 상대할만한 여자다. 여인은 주변에 도검이 난무하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걸어온다.

쉐에에엑!

누군가 월영을 쳐갔다.

순간 월영의 신형이 안개처럼 흐릿해졌다.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흐릿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섬광을 동반한 번갯불이 파팟! 튀었다.

월영은 공격했던 토족 전사는 검에 목이 꿰뚫렸다.

스읏!

월영이 검을 빼내자 토족 전사는 힘없이 무너졌다.

“사생락이군. 후후! 저거면 날 상대할 수 있다고 본 듯한데…… 이거 은근히 기분 나쁜데. 왜 하필 나야?”

꼰샥낙넨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즉시 신형을 띄웠다. 그리고 월영을 향해 마주쳐갔다.

슷! 스슷!

두 사람은 서로를 봤다. 서로 곧 싸워야 한다는 점도 안다. 서로를 향해서 마주쳐가고 있지 않나.

쒜에에엑! 쒜엑!

두 사람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공방을 시작했다.

서로 간에 이미 용건은 알고 있다. 싸우는 거다. 그것밖에 더 있나? 주고받을 말도 없다.

쒜에엑!

만도가 거칠게 사방을 휘저었다.

꼰샥낙넨의 움직임은 무척 빠르다. 맹수가 마구 사방을 휘젓고 다닌다. 칼날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마구잡이로 번뜩인다. 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방이 찢겨 나간다.

꼰샥낙넨이 광란에 가까운 칼을 휘두르자, 토족 전사들이며 취화원 살수들이 일시 손을 멈추고 물러섰다.

반대로 월영은 무척 침착했다. 꼰샥낙넨과는 정반대로 차분하게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스스스슷!

그녀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듯하다가 다시 피어났다.

“암영검은 이미 끝났다. 사생락을 펼쳐!”

월영은 말하지 않았다. 싸움을 시작하면 그 후부터는 말이 필요 없다. 먼저 치는 놈이 이기는 거다.

“머리는 얼음처럼 차게, 손은 고요하게, 죽음의 기운을 빌려와서 적의 몸을 더듬는다.”

사생락의 구결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쎄엑!

꼰샥낙넨이 만도를 쳐왔다. 역시 빠르다. 굉장히 빠르다. 하지만 빠름보다 놀라운 것은 만도에 깃든 변화다. 칼에 부딪히는 순간, 만도는 바로 변화한다. 어떤 식으로 변할지는 모르지만, 칼날 수백 개가 전신을 난타할 것이다.

난타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병기를 부딪치지 않는 것이다. 아예 격전을 피해서 몸을 훌쩍 빼내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꼰샥낙넨의 공격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은 월영의 생각만이 아니다. 꼰샥낙넨의 칼을 본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했다.

월영은 피하지 않았다. 아예 움직이지를 않았다. 가만히 서서 거친 만도를 전신으로 받아냈다.

쫙!

만도가 월영의 몸을 갈랐다.

월영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허리도 쑥 잘렸다. 몸이 삼등분으로 쪼개졌다. 그 순간,

철컥!

월영의 검이 꼰샥낙넨의 목을 쳤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피어난 살검, 암중심처에서 터져 나온 살화.

그리고 또 그 순간 꼰샥낙넨이 만도를 빙글 휘돌려서 월영의 몸을 강타했다.

파파파팟! 파팟!

두 사람 몸에서 동시에 피가 솟구쳤다.

월령이 팔이 싹둑 잘려서 허공 높이 떠올랐다.

꼰샥낙넨은 목에 검을 박은 채 주춤주춤 물러섰다.

“으으…….”

꼰샥낙넨이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월영은 팔이 잘렸는데도 태연한 신색으로 꼰샥낙넨을 쳐다봤다.

“내가 이겼어. 네가 졌고.”

월영이 빙글 돌아섰다.

그녀의 오른팔은 팔꿈치 부분에서부터 절단되고 없었다.

자망이 급히 달려와서 치료하려고 했다. 하지만 월영이 손을 들어서 만류했다.

“팔 하나 잃었을 뿐이야. 팔 하나로 놈의 목을 취했으면 내가 이득이야.”

“그래도…….”

“우리 싸움은 끝났어. 좀 쉬어야겠다.”

월영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듯 태연히 걸어갔다.

“이거 좋지 않은데.”

쵸 디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토족은 방향을 잃어버렸다.

곧바로 진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전선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토족 전사 백 명이 뿔뿔이 흩어져서 싸우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중문을 치고 들어가 내문까지 쳤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중문을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취화원 살수들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다리를 붙잡는다.

그들을 상대하다 보니 전장이 넓어졌다.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전장이 넓다 보니 난전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서로 어지럽게 얽혀서 싸운다.

취화원에게 말려들었다.

거침없이 쭉 뚫고 들어가면 될 줄 알았는데, 취화원은 어느새 예봉을 무너트렸다.

더욱 놀라운 점은 예봉이 무뎌진 사실도 몰랐다는 점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 지경이다. 싸움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나아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드디어 취화원의 공격이 변했다.

일단의 살수들이 도리깨를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거리를 두고 쇠 도리깨로 토족 전사들을 후려친다. 그들을 베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어느새 검수들이 튀어나와 앞을 막는다.

진형이란 것이 불쑥 튀어나왔다.

취화원은 암기도 사용한다. 활도 쓴다.

쉐에에엑! 쒜엑! 쒝!

사방에서 암기 쏟아지는 소리가 귀를 어지럽힌다.

토족은 난전에 강하다. 하지만 취화원 살수들은 난전을 벌이는 게 아니다. 난전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매우 정밀한 공격을 하고 있다. 목표를 정하고, 한 명씩 정확하게 꼬꾸라트린다.

좋지 않다는 느낌은 다른 데서도 들려왔다. 사방에서 울리던 쇳소리가 점차 잦아지고 있다.

서문 쪽에서는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거세게 일어났던 숨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는 형국이다.

기습은 실패했다.

“흠!”

쵸 디엔은 침음했다.

토족 전사들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은 확실히 좋지 않다.

“쉽지는 않을 줄 알았지. 띠엥 담 레이.”

“네.”

띠엥 담 레이가 즉시 대답했다.

“책임지고 우리 토족을 장렬하게 보내라.”

“네? 아! 네.”

띠엥 담 레이가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최선을 다해서 죽음으로 인도하겠습니다. 그럼 족장님은?”

“할 일을 해야지.”

“다녀오십시오. 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띠엥 담 레이가 인사했다.

탁탁! 타아아앗!

쵸 디엔은 신형을 띄었다.

토족 전사의 머리를 밟고 허공 높이 뛰어올랐다. 이어서 담장을 밟고, 지붕을 밟고 더 높이 뛰어올랐다.

쉐에엑!

그는 중문을 넘어서 안으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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