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十二章 혈검만휘(血劍晩暉) (2)
몽설은 전혀 급하지 않았다. 급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니 몸도 마음도 여전히 차분하다. 적이 모습을 드러내면 자신도 마주쳐 가야 할 것 같지만 그럴 필요 없다.
시간은 그녀 편이다.
쒜에에엑! 쒜에엑!
적이 공격을 가해왔다.
삼면에서 돌풍이 일어나며 검초가 들이닥쳤다. 인자의 모습이나 검은 보이지 않는데, 살풍만 거세게 몰아친다. 금방이라도 몸에 검이 떨어질 것 같다.
몽설은 기다렸다.
‘아직 일러.’
뭐가 이르다는 것일까? 누가 봐도 늦다. 지금 당장 검을 전개하지 않으면 그나마 일 초식조차 펼치지 못한다. 적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그래도 몽설은 꿈쩍하지 않았다.
니환일검에 몸을 맡기면 육신에 대한 위협이 사라진다. 몸에 대한 미련이 떨어진다. 격심한 격전 중에서도 적의 칼날이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서로 아름다운 춤을 교환할 뿐이다.
쒜에에엑! 쒜에엑!
몽설은 강침 세 자루를 보았다. 아니, 니환일검이 세 방향에서 강침 세 개를 찾아냈다.
적이 뻗어낸 검이다.
그래도 몽설은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일면 싸움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쒜에에엑!
드디어 적이 검권 안에 들어섰다.
손을 뻗기만 하면 검이 닿을 수 있는 거리, 적의 검이 몸에 격타하는 거리.
순간, 니환일검이 움직였다. 몽설도 니환일검을 쫓아서 같이 움직였다. 영혼이 움직이니 몸도 움직인다. 영혼과 몸과 검이 하나가 되어서 움직인다.
타당! 탕!
검과 검이 부딪쳤다.
저들의 검이 먼저 다가왔지만, 동시에 삼면에서 격돌이 일어났다. 순간, 몽설의 움직임이 더욱 빠르게 변했다. 지금보다 배는 빨라진 것 같다.
쉬이이잇!
그녀가 허공을 휘돈다. 동시에 혈검이 춤을 췄다.
일검무회(一劍無悔)!
혈검 다섯 번째 초식, 후회 없이 검을 쓴다. 일 검을 전개하니 더는 바랄 게 없다.
퍽! 퍼억! 퍽!
파육음이 터졌다.
몽설의 신형은 검과 검 사이를 누볐다. 상대가 쳐오는 검을 비켜내면서 자신의 검을 찔러넣었다.
상대방의 검 세 자루가 빗겨 지나간다.
거친 물살을 헤치고 부드럽게 역류하는 연어처럼 저들의 검초 사이를 누비면서 정확하게 몸만 후려쳤다. 저들이 검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풀썩! 털썩!
복면인 세 명이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희한한 것은…… 이런 현상이 매우 당연해 보인다는 점이다. 복면인이 검을 맞고 나가떨어지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몽설의 검은 빠르지 않다. 누구든 충분히 피할 수 있다. 평범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동영 인자의 움직임이 매우 느렸다. 너무 느려서…… 이런 움직임조차도 맞추지 못하면 검을 쓰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몽설은 별로 빠르지 않게 평범하게 검을 쳐냈는데, 오히려 상대방이 너무 늦게 움직여서 격타당한다는 느낌이다. 순간,
팟! 파앗!
땅에서 검 두 자루가 불쑥 솟구쳤다.
금형술에 이은 토형술이다. 금형술로 시선을 빼앗고, 토형술로 살검을 날린다.
검 한 자루가 몽설의 아랫배를 노렸다. 또 한 자루는 등 부위, 허리를 노린다.
순간, 몽설이 발을 들어서 힘차게 땅에 굴렀다.
꽈앙!
발이 땅을 짓눌렀다.
엄청난 진각(震脚)이 울리면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이 뒤흔들렸다.
쒜엑! 쒜에엑!
땅의 흔들림은 저들의 검초에 영향을 미쳤다. 검이 제대로 찔러오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리고…… 이번에도 저들은 느린 검이 되어 버렸다.
정말 말도 안 된다.
진각이 울리기 전까지 저들의 공격은 쾌공 중 쾌공이었다. 기습도 완벽했다. 한데 진각이 울리자마자 당장 굼벵이처럼 느린 움직임으로 변했다.
‘위험하다! 피해야 해!’
흔들리는 검초를 본 사람은 한결같이 같은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쒜에에엑! 쒜에엑!
혈검이 저들의 몸을 갈랐다.
이번에도 금형술을 벨 때처럼 일검무회를 사용했다. 전심전력이 깃든 혈검으로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몸과 검이 하나가 되어서 번개로 변했다.
꽈앙!
일검무회는 너무 빨라서 오히려 상대방이 느린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푸아악! 푸욱!
검이 땅을 훑자, 피 분수 두 가닥이 솟구쳤다.
몽설은 순식간에 복면인 다섯 명을 베어냈다. 그때.
짝짝! 짝짝짝!
후원 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중원에 혈검이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대단한 성취군. 방금 그 한 수만으로도 다오 푼 라야를 격파할 만해. 정말 대단한 무공이야. 어쩐지 쵸 디엔이 너무 쉽게 무너졌다 했지.”
키가 작은 노인이다. 용모는 매우 평범하다. 입고 있는 옷도 평범하다. 하지만 노인의 두 눈빛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호기심 많은 어린애처럼 번뜩거린다.
‘강자.’
몽설은 한순간에 상대방이 무시할 수 없는 강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궁이 부르르 떨린다. 니환일검이 팽팽하게 곤두선다. 최강의 적이 나타났다고 경고한다. 쵸 디엔과 마주 섰을 때도 일어나지 않던 반응이다.
“군주에 대한 말은 들었는데, 소문이 잘못되었군. 세상 사람들은 군주를 너무 몰라. 소문이 상당히 과소평가되어 있어. 내 생각에 군주는 절대 아걸 아래가 아닐 것 같은데?”
“부주?”
“부주님. 님자를 붙여야지? 어린애는 어른에게 존칭을 써야 하는 법이야. 중원은 유교 나라잖아. 어릴 적부터 삼강오륜을 배운다며? 말에 존경심을 담아.”
몽설은 부주의 농담에도 맞장구치지 못했다. 부주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대꾸 한마디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에 휘감겼다.
꿀꺽!
몽설은 마른침을 삼킨 후에야 억지로 입을 열었다.
“사람 욕심이 참 끝도 없어. 곧 죽을 사람이 그렇게도 존대를 받고 싶을까.”
“버르장머리가 없군. 여유도 없고. 후후후! 긴장 좀 풀지. 그래서야 어디 일 초인들 제대로 받겠나.”
“긴장은 무슨!”
몽설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볼에 걸려서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웃다가 말은 아주 어색한 웃음이 되고 말았다.
두주도 아니고 부주가 이렇게 강했나? 아걸은 남해로 내려가서 부주를 죽였다. 그리고 두주도 물리쳤다. 그런데 자신은 겨우 부주 한 명 앞에 놓고 이토록 쩔쩔매는 것인가.
저벅! 저벅!
두주가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중원에 오니까 공부 허도기와 우리 두주님 사이에 있었던 옛날이야기가 귀에 거슬리더라고? 두주님이 반 초 차이로 패했다느니 어쨌다느니 뭐 그런 내용인데…… 그 반 초라는 게 기분 좋으면 이기고, 기분 나쁘면 지는 거거든.”
- 반 초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무공으로는 반 초 승부일지라도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다. 한 사람은 승자, 한 사람은 패자가 된다. 반 초 승부나 십 초 승부나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산다. 그러니 무인에게 반 초 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반 초든 십 초든 그것이 전부다.
아걸은 부주와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실제로 아걸에게는 반 초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면 완전히 진 것이고, 이기면 완전히 이긴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아서 이겼을망정.
몽설이 말했다.
“내가 아는 사람은 다른 말을 했는데, 네게 말해줄 생각은 없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후후! 아걸이 뭔가 말을 한 모양인데, 궁금하지 않아. 내 생각이 맞거든. 구질구질하게 반 초 차이에 매달리는 족속들은 언젠가는 무너져. 나도 두주님한테 가끔은 이길 때가 있단 말이지. 기분 좋을 때. 물론 두주님의 기분이 나보다 더 좋으면 내가 지고. 서로 한 끗 차이인 것 같긴 한데 묘하게 밀려. 그게 이제 소위 말해서 반 초 차이라는 건데. 어때? 군주. 군주는 허도기와 몇 초 차이지?”
“묻지 말고 알아보지.”
“알아볼 생각이야. 그 전에…… 그렇게 자신 있다면 소현각이 어딨는지 가르쳐주고 시작하는 건 어때? 우리 승부에 황제 목숨을 거는 거지. 나도 뭐 얻어가는 건 있어야지 될 거 아니야.”
“호호호! 미안. 난 너무 자신 있어서 알려주지 못하겠는데? 알려줘봤자 어차피 찾아가지도 못할 귀신한테 알려줘서 뭐 해? 괜히 미련만 남아.”
“킥킥킥킥! 킥킥!”
그러자 갑자기 부주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장단을 맞춰주니까 오만방자하기는. 이봐, 군주. 사태를 정확히 알아야지. 너 하나 잡고 나면 여기는 무주공산이야. 내 맘대로 휘젓고 다녀도 된다 이거지. 소현각이 어디 있는지는 천천히 알아도 돼. 누가 내 앞을 막겠나? 킥킥!”
‘엇!’
몽설은 깜짝 놀랐다.
부주가 한 이야기 때문에 놀랐다. 새삼스럽게 사태를 파악해서 놀란 것이 아니다. 다른 의미로 놀랐다.
몽설이 놀라건 말건 부주가 말을 이었다.
“황궁에 고수가 많은 줄 알았더니 이렇게 형편없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들어오는 건데. 킥킥!”
부주는 근위대장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근위대장과 몽설이 힘을 합치고 있을 때는 그 누구의 침범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위대장이 죽자, 당장 힘의 공백이 생겨 버렸다.
이제 자신마저 꺾이면 황궁은 그야말로 무인지경이 되고 만다.
부주 말이 맞는다.
금군은 물론이고 취화원 살수 중 그 누구도 부주를 막지 못한다. 부주의 검은 지옥문을 여는 열쇠다. 부주와 맞선 자는 모두 지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허도기가 밀고 들어올 결심을 하면 언제든 들어올 수 있었다는 거다.
몽설은 이 점 때문에 놀랐다.
허도기에게는 지금도 황제를 베는 것쯤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을 꺼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한다. 그래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 거다.
황제를 죽이는 게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죽이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자신의 손이 아니라 타인의 손에 무너지게 해서 자연스럽게 황권을 넘겨받으려는 거다.
몽설은 부르르 치를 떨었다.
말은 부주에게 들었는데, 새삼 허도기가 무서워진다.
부주가 황궁을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다닐 지경이라면 허도기는 어쩔 것인가.
부주를 꺾은 후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사실, 대비책이라는 게 마땅할 리 없다. 아걸에게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는 근위대장을 대신할 고수를 찾아내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지금이라도 허도기가 밀고 들어오면 막을 방도가 없어. 하아!’
몽설은 부주 덕분에 허도기란 존재에 대해서 새삼 눈을 떴다.
“싸움이 벌어지면 말이 필요 없지. 반 초든 일 초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죽으면 끝인데. 상수에게도 이기고 하수에게도 질 수 있는 게 싸움이거든. 이건 내 낭군 중원제일도 아걸이 한 말이야. 당신보다 두 수는 윗길인 고수가 한 말.”
스읏!
몽설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가?”
“서로 주고받을 말도 없을 거 같은데 시작하지.”
몽설은 긴장감이 다소 풀렸다. 아걸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풀렸다. 그래서 싸움을 시작하려고 한다. 긴장감이 풀리지 않았다면 싸우자는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쯧! 그런다고 변한 게 있을까? 정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알겠다면 할 수 없지. 그럼 막아봐.”
스릉!
부주가 검을 뽑았다.
순간,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단지 검만 뽑았을 뿐인데, 어느새 거센 광풍이 일어나 몽설의 몸을 핥았다.
“웃!”
몽설은 깜짝 놀라서 엉겁결에 검을 들어 올렸다.
쒜에에엑! 퍼억!
부주의 검이 이미 몸을 훑었다. 너무 빨라서 식별조차 되지 않는…… 쾌검이다.
“크윽!”
몽설이 어깨를 붙잡으며 비틀거렸다.
상대의 검이 오른쪽 팔을 베어냈다. 어깻죽지 부근에 깊은 검상이 팼다.
어떻게 이렇게 빠를 수 있나!
몽설은 질린 눈으로 부주를 쳐다봤다.
“후후! 첫 일 검에 피…….”
부주가 검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았다.
몽설의 피다.
“호황위 군주의 피 맛이라서 그런지 다네. 좋아. 이런 피 맛이라면 괜찮아.”
저벅! 저벅!
부주가 거침없이 걸어왔다.
“음!”
몽설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처럼 뒷걸음질 쳤다.
니환일검이 반응하지 않는다. 강적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고 바짝 곤두서기는 했는데, 그 이후 떨림을 보이지 않는다. 영혼이 얼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