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560화 (560/600)

第百十二章 혈검만휘(血劍晩暉) (5)

“보고드립니다. 토족 전사의 시신은 모두 백팔십일 구입니다. 동영 인자는 열일곱입니다.”

마침내 싸움이 끝났다.

토족과 동영은 많은 시신을 남긴 채 사라졌다. 살아서 도주한 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시신은 연무장에 두었습니다. 화장할까요?”

몽설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팔곡주 소명의 도움을 받아서 가슴과 등의 상처를 치료했다.

몽설은 대낮에 살이 드러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웃통을 반쯤 벗고 상처를 치료했다. 소명이 바늘로 맨살을 꿰매는 데도 신음 한마디 흘리지 않았다.

몽설의 머릿속에는 부주와의 싸움이 남아있었다.

그 싸움…… 순간순간에 벌어진 생사 다툼을 되새기면 고통조차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몽설은 이번 싸움으로 인해서 분명히 한 단계 더 도약했다.

“토족은 전멸했을 거야. 도주할 자들이 아니니까. 하지만 동영 인자는 아니다. 그들은 살 기회만 있으면 빠져나가. 부주가 모두 데려왔다고 할 수도 없고. 백살도축은 계속 방어한다.”

“네!”

“토족 전사와 동영 인자들의 시신은 궁성 밖에 전시해.”

“네? 전시요?”

이곡주 소호가 되물었다.

몽설은 시신을 전시하는 것 같은 행위를 하지 않는다. 싸움을 끝냈으면 모든 것은 거기서 마무리 짓는다. 강호의 무인은 거의 그렇게 한다.

하지만 지금 몽설은 호황위 군주로서 명령을 내리고 있다.

도성 사람들은 궁궐에서 천재지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이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화광이 충천한 것도 봤다.

이대로 모든 일을 숨길 수는 없다.

백성도 알아야 한다. 무단으로 황궁을 침범한 자는 어떤 처분을 받는지.

“효시까지 할 필요는 없어. 아니, 효시는 하지 마. 효시까지 하면 너무 잔인해 보여.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알려야 해. 지금 당장 궁궐 밖에 전시해.”

몽설이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이런 명령 뒤에는 허도기에 대한 견제도 들어있다.

허도기가 자칫 오판해서 검을 차고 황궁으로 들어서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래서 암습이 실패한 사실을 바로 알리려는 것이다. 그가 보낸 자들이 모두 척살되었다는 사실을.

“언니, 치료는 나중에 받을게요.”

몽설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직 다 꿰매지 못했습니다.”

팔곡주 소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아무 이상 없어요. 제 상처보다는 황상의 안위부터 살펴봐야겠어요.”

“네. 그러시면…….”

소명도 몽설이 황상의 안위를 살펴보겠다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몽설의 상처도 중요하지만, 황상이 무사한지도 파악해야 한다.

몽설은 취화원 살수에게조차 소현각 접근을 일절 금지했다. 황상을 보호하는 육곡도 내문 앞만 경호할 뿐, 정작 소현각이 있는 후원 쪽으로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몽설의 결단이다.

만약 제육곡이 뚫린다면 황상을 보호할 무인은 없다고 판단했다. 이미 길이 열렸는데, 누가 더 앞을 가로막겠나. 괜히 취화원 살수들이 황제를 보호한답시고 뒤로 물러서면, 오히려 적을 황제에게 안내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아예 후원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명령을 내려놓았다.

- 막으려면 적이 후원에 침입하기 전에 막아라. 그렇지 않으면 황실의 운명도 하늘에 맡기자.

저벅! 저벅!

몽설은 후원으로 들어섰다.

황제는 소현각에 있다. 소현각은 후원에 있는 전각 다섯 채 중 왼쪽 첫 번째 전각이다.

이런 사실들은 몽설도 알고, 부주도 알았고, 쵸 디엔도 알았다. 공부 허도기도 안다.

한데, 사실 소현각이란 전각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각 밑에 있는 지하 석실을 말한다.

쵸 디엔은 아마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부주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현각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지하 석실로 가는 출입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부와 부주가 아는 길은 지하 암로인데, 그 길은 몽설이 메꿔버렸다. 그러니 길이 막혀버렸다.

지하 암로가 막혔다면 지상으로 출입하면 되지 않나? 맞다. 그래서 후원도 침입했다.

부주가 후원을 들어가지 못해서 몽설과 싸운 게 아니다. 몽설을 만났을 때는 이미 후원을 침입했다가 문을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 나왔을 때다.

소현각 밑에 있는 지하 석실은 소현각을 통해서는 들어가지 못한다. 입구는 다른 곳에 설치되어 있다. 후원 가장 오른쪽에 있는 보영각(寶零閣)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오직 몽설과 황제만 안다.

사실, 이런 출입구를 만든 것은 몽설이 아니다. 취운이 제안했고, 황제가 받아들였다.

몽설이 호황위 군주가 된 후, 조용히 공사가 진행되었다.

공부 허도기가 알 리 없다.

허도기가 부주에게 정보를 잘못 전달한 것은 아니다. 허도기의 정보는 황궁에서 나왔을 터이고, 황궁에 있는 간자는 황제가 피신하는 장소를 사실대로 말했을 터이다.

비도에 그려진 지하 암로는 막혔고, 소현각에는 지하 석실로 들어서는 문이 없고…… 부주도 참 답답했을 것이다. 목표를 눈앞에 두고도 처리하지 못하니.

저벅! 저벅!

몽설은 보영각을 통해서 지하 암로로 들어섰다. 그리고 소현각 지하 밀실을 향해 걸어갔다.

어두컴컴한 암로를 얼마나 걸었을까? 암로에 환한 빛이 들어왔다.

소현각 지하 밀실 앞에는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다섯 개나 밝혀져 있다. 그야말로 대낮처럼 환했다.

환관 도공이 보였다.

황상이 ‘도둑놈’이라고 부르는 환관 도공은 문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시립해 있었다.

“황제께 아뢔주세요.”

몽설이 환관에게 말했다.

“황제께서는 안에 안 계십니다.”

도공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네?”

“여기 오시면 드리라고.”

상선이 서신을 내밀었다.

몽설은 급히 서신을 받아서 읽었다.

지난밤 일에 대해 수고했다는 치하와 황제는 무사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황제께서 어디로 행차하신 겁니까?”

“저까지 떼어놓고 가실 때는 밀행 아니겠습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말을 입에 담기는…… 황상께서는 몸이 약하시지, 머리가 나쁘신 분은 아닙니다.”

“지금 밖은!”

몽설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토록 위험한 시기에 황제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러면 언제쯤 출타하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나중에 돌아오시면 직접 여쭤주시지요. 저는 말씀드리기가…….”

“네.”

몽설은 몸을 돌렸다.

황제는 이런 분이다. 환관까지 떼어놓고 불쑥 사라진다고 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도대체 어디로 가셨을까? 지금은 소현각이 제일 안전한데. 밖에는 아직도 동영 인자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황제를 찾아봐?’

언뜻 든 생각이다. 하지만 찾지 못한다. 황제가 도공까지 떼어놓고 나갔다면 지극히 은밀한 밀행이다.

저벅! 저벅!

몽설은 암로를 걸어 나갔다.

황제를 믿고…… 황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 시점에서 취화원 살수가 움직이거나 금군을 움직여서 황제를 찾는 것도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몽설의 모든 판단은 허도기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결정되었다.

* * *

저벅! 저벅!

황제는 서문을 나와 관도를 걸었다.

황제는 유생처럼 유삼을 입었다. 머리에는 유건도 썼다.

유삼은 황제의 병약한 모습과 어울려서 뜻밖에도 썩 잘 어울렸다.

저벅! 저벅!

황제는 어느 정도 관도를 걷다가 숲으로 들어섰다.

숲이라고 해서 깊은 숲은 아니다. 빙 돌아가는 관도 대신에 지름길을 택했다. 실제로 숲길은 많은 사람이 이용한다. 지금도 이른 새벽이지만 오가는 사람이 많다.

황제는 숲길을 걸으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때 한 사람이 나무 밑에서 두 손 모아 읍한 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걸이다. 그가 황제에게 읍을 한다.

황제는 아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걸은 읍을 풀지 않았다.

황제가 아걸에게 걸어갔다.

“새벽바람이 찹니다.”

아걸이 정중하게 말했다.

“무슨 말이 그래? 다른 사람은 ‘황상을 뵙니다’라거나 뭐 그런 말들을 하는데. 좀 앉을까? 아침 댓바람부터 걸었더니 다리가 아파.”

황제가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절 찾아오신 겁니까?”

“어제 사방에서 난리가 났어. 그런데 서문만 조용하더라고. 토족이 서문을 놓칠 리 있나. 그래서 이쪽에 귀인이 있다 싶었지. 지금, 이 시점에 찾아올 귀인이 누굴까 생각해 보니까 딱 한 사람이 떠오르더라고. 후후! 나는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했으니 즉시 알았고…… 아마 지금쯤이면 질부도 눈치챘을걸?”

황제가 웃었다.

“너무 무모한 행차이십니다. 토족이나 동영 인자가 숨어 있었으면 어쩌실 뻔했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유생으로 변복했잖아. 유생을 누가 주목해. 앉으라니까.”

황제가 멀뚱히 서 있는 아걸을 다그쳤다.

아걸은 황제 옆에 앉았다.

숲길에는 많은 사람이 오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곳까지는 들어서지 않았다. 당연히 숲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자네 솜씬가?”

황제가 시신들을 보며 말했다.

“네.”

“이런 일이 있고도 황궁에는 안 들러? 어제 질부가 죽을 둥 살 둥 발버둥 친 거 아나?”

“알고 있습니다.”

“토족 족장 쵸 디엔은 간단히 벤 것 같은데 동영 부주에게는 상당히 고전한 것 같아. 큰 상처도 두 곳이나 입었어.”

“네.”

“냉정하군.”

“몽설은 강호인. 취화원 원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왕이면 최고로 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는 아니야. 보통 사람은 부인이 위험하다고 하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영원히 이별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팔짱 끼고 있는 사람은 없어. 무인도 살기 피곤하군. 확실히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아니야.”

황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들어가시지요. 모시고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그 전에.”

황제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아걸에게 건넸다.

“이건?”

“펴 봐.”

아걸은 서신을 펴서 읽었다.

충(忠)!

큼지막한 서신에는 대붓으로 쓴 듯한 글씨 한 자만 적혀있었다.

“누가 쓴 건지 알아보겠어?”

“이건!”

아걸은 살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사부다. 사부 글씨체다.

사부는 그가 어렸을 때 유명을 달리했다. 사부와 만난 시간도 길지 않다. 하지만 할배가 사부의 유품을 챙겨왔었다. 그중에는 사부가 남긴 글이 다수 있었다. 본인의 심득을 적어놓은 일종의 심서(心書)인데, 심서를 읽으면서 사부의 글씨체를 알았다.

‘충’이라는 한 글자, 분명히 사부가 적은 글이다.

“호황위 군주는 가상의 인물이라고 했나? 후후! 아냐. 이 사람이 호황위 군주였어.”

“그렇습니까?”

아걸이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차분히 대답했다.

사부가 호황위 군주였다는 말은 지금 처음 알았다.

사부의 칼은 성검문도 지키고 황궁도 지키고 있었나. 무인이…… 참 오지랖도 넓다. 결국, 성검문은 허도기에게 찬탈당하고, 황궁도 어지러우니…… 사부가 진 것인가?

“그건 내가 받은 것이고, 내가 준 것도 있지.”

황제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소도를 꺼내 아걸에게 건네주었다.

아걸은 묵묵히 소도를 받았다. 황제가 칼을 차고 있다는 사실은 첫눈에 알아보았다. 칼의 날카로운 기운이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잖아도 황제가 차고 있는 칼이니 보통 칼은 아니겠거니 하고 무심히 흘려버리던 참이다.

“그 칼은 진충도(眞忠刀)라고 하지. 진짜 좋은 칼이야. 도검을 무 베듯 베어버려. 이 글을 받고 짐이 일홀문주에게 준 칼인데, 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사람을 시켜서 찾아왔지.”

“네.”

“그 칼을 네게 줄까 하는데.”

아걸은 진충도를 두 손으로 받들어서 황제에게 내밀었다.

“제가 받을 칼이 아닙니다.”

“후후!”

황제가 웃었다.

황제는 몽설에게 호황위 군주를 맡겼다. 하지만 몽설이 곧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몽설은 무인이지 관에 얽매여 있는 관인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 벌어진 사태만 해결하면 곧바로 군주 직을 버리고 떠날 것이다.

그런 점은 아걸도 마찬가지다. 결코, 호황위 군주가 될 사람이 아니다. 또 몽설을 군주로 내세우고, 다시 아걸에게 군주를 제시할 생각도 없다.

황제가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죽은 후의 황실이다.

황제의 머릿속에는 이미 차기 황제가 구상되어있는 듯하다. 그리고 극심한 공격을 받으리라는 것도. 그렇다면 분명히 태자는 아닐 것이다.

아걸은 여기까지 생각했다.

황제의 뜻을 안다. 하지만 받을 수 없다. 자신은 무인이다. 강호인이다.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가 승상만 있는 것은 아닌데. 그 칼은 잠시 보관해줘. 내 뜻을 짐작할 테니,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줘도 돼. 자네의 천거로 생각하지.”

“네.”

“그래. 그리고 앞으로 질부가 힘든 싸움을 할 거야. 도와줘. 이건 황제가 내리는 명령이야. 이것마저 거부하면 내 백만 대군을 몰아칠 거야.”

“알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걸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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