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三章 작위하사(爵位下賜) (2)
“하! 하하하! 그래? 그렇게 됐다고?”
허도기가 웃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두 주먹은 불끈 쥐어졌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기습이 실패했다. 도저히 실패할 수 없는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몇 번을 고쳐서 생각해 봐도 왜 실패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쵸 디엔이 죽고, 부주가 패해? 하하하하!”
나오는 건 웃음뿐이다.
싸움을 유리하게 바꿀 기회가 적어도 세 번은 있었다.
제일 첫 번째 기회는 뭐니 뭐니 해도 탕산 싸움이다. 이십사 위문은 아걸을 쓰러뜨렸어야 한다.
바보 같은 놈들! 그것도 못 하나! 밥버러지들!
여태까지 무공을 갈고 닦았다는 놈들이…… 도대체 뭘 갈고 닦았다는 건가. 천 명이 넘는 인원으로, 그것도 고수라고 자부하던 놈들이 아걸 한 명을 없애지 못하나?
사실상 탕산 싸움은 아걸이 자신에게서 싸움의 주도권을 빼앗아 간 첫 번째 싸움이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싸움을 가볍게 흘려버렸다.
지금 말한 것처럼 ‘밥버러지들!’ 하고 욕했을 뿐이다. 이십사 위문이 그냥 무너진 것이 아닌데 그 원인을 너무 가볍게 간과해 버렸다. 그 싸움에는 동영 인자도 가세했는데, 목형술이 깨진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여겼다.
자신이 그럴 수 있어서 아걸이 한 것도 당연하게 여긴 것이다.
두 번째 기회는 두주와의 싸움이다.
두주는 아걸을 배웠어야 한다. 두주가 아걸을 베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자신이 아걸을 베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두주와 자신의 무공 차이는 거의 없다. 비등하다.
두주가 반 초 차이로 패했다지만, 다시 싸우면 누가 이길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두주가 졌다.
허도기는 두주가 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걸과 싸웠던 마지막 싸움을 떠올렸다.
그때 아걸은 자신의 필살 검을 막아냈다. 또 조명십해도 막아냈다.
절대적인 수세에 몰려서 쩔쩔매기는 했지만 그래도 막아내긴 막아낸 것이다.
싸움의 주도권을 뺏어간 마지막 싸움은 이번 싸움이다.
토족과 동영 인자들의 합공, 여기서는 반드시 황상을 죽여야 했는데.
사실 이십사 위문과 두주가 무너졌어도 싸움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진짜로 준비한 선물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토족과 동영 인자의 합공만 성공하면 모든 싸움이 일거에 끝날 터였다.
그래서 동영 부주를 특별히 부르기까지 했다.
자신이 직접 그를 보아야만 했다.
그의 무공을 보고, 성격을 보고, 일 처리 능력을 봤다. 간단히 몇 마디 나눴을 뿐이지만, 지극히 짧은 만남으로도 부주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부주는 완벽했다.
황상을 죽일 수 있는 완벽한 검이다.
만약 부주가 부족했다고 생각했다면 보충 수단을 마련했을 것이다.
토족과 동영 부주가 같이 들이치면 완벽히 성공한다. 더욱이 황제가 숨어있는 소현각의 밀도도 지니고 있다. 부주는 조용히 들어가서 저항하지 못하는 황상을 베면 된다.
이것도 못 하나?
“부주가 졌어? 후후!”
토족이 야수검을 잡았으니 그나마 낫다.
“쵸 디엔, 그놈만 제 할 일을 했군. 다른 놈들은…… 쯧!”
허도기는 혀를 찼다.
몽설의 혈검은 완성되었다. 혈검이 완성되지 않고는 부주를 죽일 수 없다. 또 혈검을 완성해 준 사람은 아걸이다. 아걸과 몽설은 만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아걸이 혈검을 완성해 주었다.
탕산 싸움, 아걸이 이십사 위문을 제친 것이 몽설에게 자극을 주었다. 몽설이 동영 두주를 젖힌 것도 큰 영향을 주었다. 혈검이 일홀도에 자극을 받았다.
이번 급습과 하등 상관없는 싸움들이 새삼 아프게 느껴진 것은 그 때문이다.
몽설이 혈검만 완성하지 않았어도 부주는 황상을 베었다.
어쨌든 모든 게 실패했다. 허도기는 과거를 곱씹으면서 후회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현실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방책을 수립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만한 힘이 충분히 있다.
“몽설 널 꺾어야겠구나. 널 베지 않으면 안 되겠어. 하지만 그 전에 아걸이 움직일 테고…… 결국은 아걸과 몽설, 너희 둘을 같이 꺾어야 한다는 건데.”
허도기는 눈가에 살기가 피어났다.
그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두려움을 되살려냈다.
형을 칠 때, 형이 반위에 걸려서 생사 절명의 상태에 있을 때도 검을 들지 못했다. 혹여 있을지 모를 실수가 두려웠다. 조금 더 확실한 순간이 필요했다.
형이 죽더라도 일홀문주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면 모반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 당시, 일홀문주의 칼은 자신보다 강했다.
일홀문주가 삼인독에 중독되고, 형이 죽은 후에야 검을 들었다.
그때의 두려움을 되살려낸다.
황상을 죽이기는 쉽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죽이면 안 된다. 지금은 자신의 편일 것 같은 장군들도 역모가 확실해지면 대장군 쪽으로 돌아설지 모른다.
대장군에게는 세외팔국을 단숨에 밀어낼 수 있는 군사가 있다.
저들의 군세로 대장군을 밀어붙일 수 있다면 뜸 들이지 않고 진작 몰아쳤을 것이다. 정작 싸움이 벌어지면 진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싸움을 미적거린 것이다.
그 사이, 남쪽 왜군이 철수했다.
황상을 죽이는 것은 여전히 제일 목표다. 하지만 대장군이 군세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으로 유도해야 한다.
‘병권, 병권, 그놈의 병권. 아걸, 그놈만 없었어도…… 후후! 진작 베지 못한 나를 탓해야지, 누굴 탓해.’
황상을 베기 위해서는 황상 곁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몽설과 아걸을 떼어내야만 한다.
“완벽하게 떼어낼 수 있지. 후후!”
허도기는 살광을 번뜩였다.
* * *
아걸과 몽설은 산에서 오 일을 지냈다.
닷새 동안 두 사람은 무공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무공의 무 자도 입에 담지 않았다.
오 일의 산속 생활은 몽설의 치료 시간이다.
몽설은 당장 앓아누워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한 중상이다. 그런 몸으로 습격의 뒤처리를 하고, 아걸을 찾겠다고 도성 밖으로 뛰쳐나와 사방을 헤맸다.
아걸이 공부 허도기와 싸운다고 할 때도, 두주와 싸우기 위해 남해로 갈 때도 ‘일홀도니까’ 하면서 담담하게 대처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어느 것이 진짜 그녀의 모습인가? 말할 것도 없다. 몽설은 아걸의 싸움에 결코 담담할 수 없다. 아니, 조바심이 나서 몸부림을 칠 지경이다.
그런데도 애써서 담담한 모습을 취한다. 애쓰는 모습을 보여봤자 아걸에게 부담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걸을 편한 모습으로 보내주어야 한다. 이 여자는 어떤 상황도 견뎌낼 거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줘야 한다. 지금도 그렇다. 어떻게 생각하면 섭섭할지도 모르겠지만, 아걸이 없어도 혼자서 잘살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두 사람의 하루는 아걸이 일어나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으로 시작된다.
산속 밤은 춥다.
아걸은 불을 지피고, 방으로 들어와서 몽설의 이마를 짚어본다.
열이 있으면 물수건을 해와 냉찜질을 해주고, 열이 없으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몽설은 아걸의 손길을 느끼지만, 눈을 뜨지 않는다. 잠에서는 깼지만 계속 잠든 모습을 보여준다.
불편해하고 신경 쓰는 게 싫다. 아니, 일홀도의 안주인이라면 불편한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든 유연하게 대범하게 받아들인다.
“어떻게 넌 아픈 모습만 보여주니?”
“그랬나?”
“처음 만났을 때도 칼 맞고 들이닥쳤잖아.”
“아니지. 기억이 잘못됐네. 처음에는 멀쩡했지. 나중에 칼 맞고 돌아왔지.”
“어쨌든 내가 치료해줬잖아.”
“기억나. 치료한다는 핑계로 옷 다 벗긴 것. 어떻게 처음 보는 여자 옷을. 기가 막혀서.”
“정말 치료였다니까.”
“그런 치료, 다른 여자한테 해 봐!”
“녹선마황도 없어. 녹선마황이 있어야 치료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있으면 하겠다는 소리네?”
“아니. 절대 안 하지.”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음흉해.”
“하! 정말이라니까. 다른 여자는 곁눈질도 안 줘.”
“호호호! 좋아. 믿어줄게. 오늘 밥은 어때?”
“잘됐어. 이제 나도 장작불 밥을 잘 짓는다니까.”
“또 새카맣게 태웠지? 타는 냄새 많이 나던데.”
“누룽지. 누룽지 먹으려고 일부러 조금 태웠지.”
“조금 맞아? 솔직히 말해 봐. 오늘도 숯이지?”
“누룽지라니까.”
두 사람은 티격태격 다퉜다.
두 사람은 앞날에 대한 계획도 세웠다.
몽설은 바닷가에서 조금만 집을 짓고 푸른 바다를 보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아걸은 지금처럼 산속에서 나무나 하고 사냥이나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금이 딱 좋다고. 지금처럼 둘만 오붓하게 있으면 바랄 게 없다고.
물론 몽설이 취화원 원주를 그만뒀을 때 얘기다. 아걸이 일홀도를 손에서 놓았을 때 얘기다.
그전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두 사람은 아이에 대한 얘기도 했다.
“난 힘이 닿는 대로 낳고 싶어. 아무리 못해도 열 명은 넘길 거야. 집안이 아이들 소리로 시끌벅적했으면 좋겠어. 소리도 빽빽 지르고. 호호!”
“난 몽설 닮은 여자애 하나면 돼.”
“그건 싫어. 아이가 너무 외로워.”
“내가 잘 돌봐줄 건데?”
“아빠하고 형제하고 같은 줄 알아? 가가도 혼자 살았으면서 몰라? 외로웠잖아.”
“난 할배에게 휘둘리는 바람에 외로울 틈이 없어서.”
“호호호! 나도 그래. 원주님께 들들 달달 볶이는 바람에 눈코 뜰 새 없었거든. 그래도 난 취화원 자매라도 있었지. 가가는 정말 외로웠겠다. 혼자서.”
그런 말들을 하다 보면 낯빛이 어두워진다.
서로에게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본인 스스로는 답답함을 느낀다.
정말 그런 날이 올까?
바닷가에 집을 짓고 아니면 산속 오두막에서 아이를 낳고,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나무도 하고 사냥도 하고…… 그러면서 살날이 올까? 오지 않을 것 같다. 두 사람에게는 너무 먼 얘기 같다.
“상처. 다 아물었다.”
아걸이 말했다.
사실,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나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몽설은 못해도 한 달 이상을 푹 쉬어야 한다. 다만, 이제 더는 상처가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 잘 돌봐줘서 많이 나았어.”
“이젠 내려가야지?”
아걸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나랑 같이 있는 게 지겨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호호! 나도 한번 해 봤어. 보통 여자들은 이럴 때 다 이런 식으로 말해.”
“아니, 너만 그렇게 얘기해.”
“아니라니까. 모두 다 이렇게들 얘기한다니까.”
두 사람은 또 티격태격 다퉜다.
아걸이 따뜻한 물을 가져와서 몽설에 몸을 닦아주었다.
“호황위 군주는 항상 깔끔해야 해. 위엄을 보여야지. 후후! 추레한 모습은 용서가 안 된다니까.”
“그게 아니라 내 몸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야?”
“넌 내 여자야.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봐.”
“자기 여자라고 마음대로 볼 수 있을 거 같아?”
“아니야?”
“나한테 잘 보여야 보여줘. 밉보이면 어림도 없어. 아직도 그걸 몰랐어?”
“그런가?”
“호호!”
몽설이 깔깔대며 웃었다.
마지막 한순간, 마지막 한마디마저도 허투루 놓치고 싶지 않다.
진중한 얘기라 얘기가 아니라 가벼운 얘기, 서로 웃고 떠들 수 있는 그런 이야기.
아걸과는 가벼운 얘기만 나누고 싶다.
치기 어린 말도 좋다. 질투 어린 말이나, 음탕한 말이라도 상관이 없다. 사람들이 음담패설이라도 눈살을 찌푸려도 아걸이 받아주기만 하면 괜찮다.
무공에 관한 말만 아니라면 어떤 말이든 나누고 싶다.
혈검은 상관이 없다. 혈검에 대해서는 수백 마디도 교환할 수 있다. 하지만 일홀도는 무섭다. 일홀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까 봐 마음이 조려진다.
혈검은 무리에 입각한 무공이다. 그러니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일홀도는 살인도다. 오직 치고받는 싸움 끝에 탄생시키는 처절한 무공이다. 사람을 무너트리면서, 타인의 패배를 밟고 올라서는 무학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무너진다.
언제까지 이기기만 할 것 같은가. 패배는 반드시 찾아온다.
몽설은 그 패배가 바로 코앞에서 벌어질까 봐 두려웠다. 허도기에게 당할까 봐.
“안고 싶어. 나 좀 안아줘.”
몽설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