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五章 니거사파(你去死吧) (2)
저벅! 저벅!
하원랑이 다가왔다.
“하는 짓이 참 추해. 군에서는 일기장군이었다며? 뭐 하러 무림에 나왔어? 이런 짓을 하면서 사느니 군대에서 독불장군으로 지내는 게 낫지 않아?”
하원랑은 길 떠나는 사람에게 압박을 가했다.
네가 떠나면 네 여자가 베인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니 떠나가는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다.
“이럴 목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나. 너무 그러지 말라고. 닷새 동안 찬 이슬 맞으면서 남의 집 처마 밑에 있기도 쉽지 않아. 나이가 들었는지 뼈마디가 욱신거려.”
하원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줘. 내게 줄 거지?”
몽설이 손을 내밀었다.
“이거 뭐 의미가 있나?”
하원랑이 붉은 혈첩을 몽설에게 던졌다.
“장소는 여기. 시간은 지금. 혈첩은 아걸이 보라고 만든 것이고…… 원주에게는 아무 소용 없어. 내 말로 듣는 게 훨씬 빨라. 벌써 알아들었잖아. 하하하!”
하원랑이 웃었다.
“급하게 서두는 거 이해해 달라는 말로 들리는데.”
“아걸이 공부 앞에 서기 전에 당신 머리를 보내야 해서.”
“아무리 바빠도 조금 기다려. 나 아직 봉투도 안 뜯었어! 봉투는 뜯어야지.”
“그래서 혈첩을 받는 건 의미가 없다고 했잖아. 내 말로 들었으면 됐지, 뭘 더 확인해.”
스읏!
하원랑이 검을 잡아갔다.
몽설은 멀어져가는 아걸을 쳐다봤다.
그가 아직 시야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대문 앞에서 나누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는다. 묵묵히 앞만 보며 걷는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아니다. 아걸은 몽설을 믿는다. 동영 부주와 쵸 디엔을 꺾은 검이면 하원랑도 무너트린다고 확신한다.
몽설! 이겨!
몽설은 돌아서지 않는 아걸의 등에서 강한 응원을 전해 받았다.
아걸은 길을 가면서 칼에 손을 대지 않는다. 허리에 꽂아 놓은 상태로 그냥 걸어간다. 하지만 지금은 칼에 손을 대고 있다. 손잡이를 밑으로 꾹 눌러서 반철도 칼끝을 위로 세웠다. 다른 때는 전혀 하지 않던 행동이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어도 몽설은 봤다.
‘날 보고 있어. 걱정하면서 걸어가는 거야. 후후! 걱정하지 마, 오빠. 내가 알아서 해.’
최고로 힘든 싸움 속으로 걸어가는 아걸이 몽설에게 보내는 최고, 최대의 응원이다.
스읏!
아걸이 골목길로 꺾었다.
이제야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옆으로 꺾어 돌면서 그녀와 하원랑을 봤겠지만…… 고갯짓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갔다.
한데 이 모습이 또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아걸은 원래 앞으로 더 걸어갔어야 한다. 저택 네 개를 더 나아간 후에 큰길로 꺾어야 했다. 하원랑이 찝쩍거리는 소리를 더 듣기 싫어서 일부러 꺾은 것이다.
“후후후!”
그제야 하원랑도 웃으면서 물러섰다.
언제 검을 잡았냐 싶게, 싸우려는 의도가 전혀 읽히지 않았다.
“혈첩조차 뜯어보지 못했는데 싸우자고 우기는 건 너무 했나? 그럼 뜯어봐.”
“끝까지 압박을!”
그가 당장 싸우자면 검을 잡아간 것…… 그것조차도 아걸을 압박하기 위한 도구였다. 군대에서 퇴직한 장군이 살수 집단 우두머리를 벤다는 명분이다.
“가더라도 근심 하나는 안고 가야지. 자기 여자가 베일 수 있다는 사실을 느껴야 하지 않겠어?”
“네가 죽을 수도 있어.”
“그런 건 검으로 말하는 거고…… 후후! 내 눈에는 아주 재미있는 광경이 그려져. 싸우겠다고 공부 앞에 섰을 때, 원주 머리가 놓여 있는 걸 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아걸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면 준비를 해야 하겠지? 싸움이 급한 것은 사실이야. 협조해 줬으면 해. 오늘 안으로 끝내자고.”
하원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 목만 따면 되는 거야?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무공까지 과시하고 싶은 거야?”
“후후후! 사람 없는 곳에서 죽고 싶다는 건가?”
“방해받지 않은 곳에서 싸우고 싶다는 거지.”
“내 쪽에 사람이 있다면 그쪽도 사람이 있잖아. 그 사람들이 우리 싸움에 끼어들 일도 없고. 그런데 그쪽 사람들 왜 그래? 은거 무인? 그 사람들, 참 웃겨. 세상이 싫다고 숨어서 살던 사람들이 지금은 세상 깊숙이 들어와 있잖아. 그 사람들, 호칭 좀 바꾸지 그래? 관도를 활개 치고 다니면서 은거 무인이라니.”
“오지랖도 넓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해. 급하다며? 어디서 싸울 거야? 원하는 대로 해줄게.”
“하하하! 하하하하!”
하원랑이 크게 웃었다.
몽설은 하원랑을 이끌고 강변으로 갔다.
강변에는 사람 눈을 의식하고 싸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구경하는 사람이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는데, 마음 놓고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다 보니 강변이 떠올랐다.
저벅! 저벅!
나지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실수했나?’
몽설은 미간을 좁혔다.
하원랑과 함께 강변으로 가는 길인데…… 성검문 무인들이 뒤를 따라붙었다.
몽설은 자신의 싸움을 은거 무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알릴 수도 없다. 그들은 이미 중부에 없다. 하원랑은 은거 무인들이 중부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미 그들은 아걸의 부탁을 이행하기 위해서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몽설은 취화원이나 아삼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무인의 싸움에 도움이라니 말이 되나? 말이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창피하다. 무인의 싸움은 정정당당해야 한다.
그런데도 ‘도움’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올렸다.
하원랑이 걸어온 싸움은 무인의 싸움이 아니다. 전쟁터의 싸움,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목적만 이루면 되는 싸움이다. 수단 방법은 개의치 않는다. 몽설만 죽이면 된다.
무인의 자긍심, 혈검을 견식하고 싶다는 호기심, 자신의 무공으로 혈검을 짓누를 수 있다는 우월감…… 이런 마음들이 일절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다. 하원랑은 몽설만 죽이면 된다. 자신이 직접 베든, 활을 쏘아 죽이든, 폭약으로 찢어 죽이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기만 하면 된다.
하원랑이 걸어온 그런 싸움은 그런 싸움이다.
하지만 몽설은 아삼이나 취화원에도 알리지 않고 강변에 섰다.
스으읏! 스스스스슷!
강바람이 강변을 휩쓴다.
몽설은 흘러오는 바람 속에서 땀에 찌든 냄새를 맡았다.
지난 며칠 동안 중부를 감시하던 성검문 무인들이 하원랑을 쫓아서 강변에 왔다.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검수들이 살기를 품은 채 강변 갈대숲에 숨어 있다.
“같이 덤빌 거야, 아니면 혼자 싸울 거야?”
스릉!
몽설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하하하하하!”
하원랑이 크게 웃기부터 했다.
“원주. 인제 보니 원주는 과대망상 환자군. 원주는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 같아.”
“아닌데. 난 냉정히 나를 보고 있는데?”
“내 검에 저자들 검까지 섞으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하! 분명히 말하지만…… 원주, 혈검은 조명십해 아래야. 나는 조명십해의 진수를 깨달은 사람이고.”
“조명십해라면 당신보다는 소축십검이 낫지 않을까?”
하원랑이 손가락을 들어서 아니라는 듯 좌우로 까딱거렸다.
“그들이 수련한 조명십해와 내가 수련한 조명십해는 달라. 그 검을 보여주지. 아주 재밌을 거야.”
스읏! 스릉!
하원랑이 검을 뽑았다.
파파팟! 파팟!
몽설은 즉시 니한궁이 정신을 집중했다.
상궁에 검 한 자루가 세워진다. 정신의 검, 혈검, 니환일검이 굳건히 일어선다.
“싸우기 전에 궁금한 점이 있어. 당신은 일기장군으로 유명하던데, 그럼 무기는 장창 아냐? 창술의 귀재로 알려졌던데. 왜 병기를 검으로 바꾼 거야?”
“무인이 병기를 바꾸는 데 이유가 있나? 더 강해지는 길을 택한 것뿐인데.”
“창술의 대가가 갑자기 검을 들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장창은 너무 위력이 강해. 그래서 재미가 없어. 내가 장창을 들면 원주는 일 장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해. 그러면 너무 심심해지잖아. 그래서 검으로 바꿨는데.”
하원랑이 히죽 웃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하원랑이 몽설을 무시한다거나, 겁박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다. 아니, 정말 그렇다는 자신감이 있다.
장창이 너무 강해서 검으로 바꿨다? 창보다 약한 검법만으로도 몽설을 상대할 수 있다?
“걱정하지 마. 검으로 해봐서 안 되면 장창을 쓸 거고, 그래도 안 되면 저놈들에게 도움을 청할 거니까. 원주는 최악의 경우…… 저들과 내 검의 합공을 막아야 하는 게 아니라 저들과 내 창의 합공을 막아야 하는 거지.”
몽설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창도 없으면서…….’
하원랑이 말한 창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숨어 있는 자 중 누군가가 장창을 가지고 왔나? 그럴 수 있다. 때가 되면 장창을 쓴다는 말도 거짓이 아니다.
스읏! 척!
하원랑이 기수식을 잡았다.
그는 두 발을 넓게 벌렸다. 무릎을 살짝 구부려서 즉시 퉁겨 나갈 수 있는 모습이다.
“더불어서 한 가지.”
하원랑이 말을 하면서 무릎을 더 깊이 구부렸다.
앞으로 달려 나가기보다는 들어오는 검을 받아내겠다는 수비식으로 보인다.
“조명십해의 무리는 하나 같이 뛰어나서 어느 것도 버릴 게 없어. 헌데도 강약이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게 잠기일력타와 삼륜축첩공. 후웁!”
하원랑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진기를 새롭게 일주천한다. 검에 진기를 집중시킨다.
“삼륜축첩공이라고 하면 잠기일력타를 연속해서 세 번 펼쳐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지. 그런 게 아니야. 조명십해를 깊이 들어가 보면 잠기일력타와 삼륜축첩공은 완전히 다른 무리야. 이것조차도 구분하지 못한 자들이 바로 소축십검이었던 거고. 지금부터 내가 쓰려는 건 은장재계이살이다. 소축십검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는 조명십해의 기본! 개천 같은 얕은 물에 살법을 숨긴다. 후후! 물론 원주도 이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은장재계이살의 진실한 뜻을 알게 될 거야.”
파앗!
하원랑의 검에서 불꽃이 튀기는 듯했다.
‘틈이 없다!’
몽설은 하원랑을 공격하지 못했다.
스읏! 슷!
하원랑이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몽설은 그가 다가오는 만큼 물러섰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면서 거리를 넓혔다.
검에 깃든 살기가 몸서리쳐질 만큼 차갑게 전해져 온다.
‘이게 은장재계이살이라고?’
몽설은 찡그린 미간을 풀지 못했다.
흔히 은장재계이살은 비검(秘劍)으로 불린다. 죽음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얕은 물에 살기를 숨긴다고 하지 않나. 이 말은 살기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다. 죽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얕은 물을 건너게 한다.
그런데 하원랑은 살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살기가 너무 진해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겠다.
세상이 알고 있는 은장재계이살과는 안전히 다르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하원랑은 다리를 넓게 벌리고 있다. 무릎은 깊게 가라앉혔다. 움직이기가 불편한 모습이다. 그러니 다가서는 것도 빠르지 않다. 매우 느리게 반보씩 다가선다.
하지만 그 반보…… 반보에 불과한 걸음이 몽설에게는 일 장씩 쑥쑥 다가서는 것처럼 보였다. 검이 주는 압박감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서 자신도 모르게 물러섰다.
스스! 스슷!
하원랑이 다가섰고, 몽설은 물러섰다.
넓은 백사장에 두 사람의 발걸음이 그려졌다. 두 사람이 만든 걸음이 큰 원을 그렸다.
“안 싸울 건가?”
하원랑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내 검은 살상 검이 아니라서. 살기를 품은 사람이 먼저 공격해와야 하지 않나? 언제 공격해 올 거야? 내 신법을 잡을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
몽설이 도발적으로 말했다.
“후후후! 이겼군.”
하원랑이 말했다.
그가 펼친 기수식은 완전한 수비검이다. 공격보다도 방어에 치중한 검이다. 공격권을 몽설에게 넘겨주고 첫 번째 초식을 방어하겠다고 말한 것이나 진배없다.
물론 몽설은 공격을 생각했다. 하원랑의 기수식을 보고도 공격을 생각하지 않는 무인은 없다. 모르긴 해도 이미 백여 차례 넘게 공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머릿속에서만 펼쳐진 공격이지만…… 한데 그 많은 공격이 모두 막혔다.
어느 쪽에서, 어떤 각도에서 공격하든 하원랑의 검에 걸렸다.
파르르! 파르르륵!
몽설의 검이 떨리기만 할 뿐, 뻗어 나오지 못했다.
일차 접전에서는 몽설이 졌다.
공격하라고 선제권을 내줬는데, 하지 못했다. 오히려 하원랑의 진격에 밀려서 뒷걸음질 쳤다.
몽설이 공격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검을 맞댄 두 사람만 안다.
“자, 그럼 은장재계이살의 다른 모습. 이 검이 공격에서는 어떻게 바뀌는지 보여주지.’
스읏!
하원랑이 자세를 고쳤다.
두 발을 어깨너비로 좁혔다. 검은 중단으로 들어서 가슴을 겨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