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六章 전심전력(全心全力) (5)
‘허도기…….’
머릿속에 허도기가 떠올랐다.
허도기의 얼굴이 그려지고, 곧이어서 그의 눈부신 발검이 펼쳐진다. 몸이 두 동강 나는 듯 생생하게 기억된다.
첫 번째 검이 승부를 좌우한다.
어떤 칼을 쓰더라도 허도기의 발검보다 빠르지 않다.
즉, 어떤 상황에서든 늘 허도기에게 선공을 빼앗긴다. 누가 되었든, 어떤 무공을 사용하든 먼저 허도기의 검부터 막아내야만 그다음 싸움이 진행된다. 허도기의 검을 막지 못하면 그다음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다.
이쪽이 방어를 택하든 공격을 택하든 마찬가지다.
마지막 싸움에서 허도기의 검을 상당 부분 막아냈다. 반철도의 이빨이 빠질 때까지 싸웠다. 그만큼 많은 격검이 이루어졌다. 조명십해를 많이도 막아냈다.
그렇다고…… 그런 사실만 믿고 허도기 앞에 나설 수는 없다.
허도기라고 그 사실을 모를까. 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을 것이다.
무인의 삶이란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보충하는 일로 채워진다. 늘 그렇다. 부족한 부분은 수련으로 메꿀 수밖에 없다. 그러니 허도기 역시 이미 부족했던 부분을 메웠다고 봐야 한다.
이전 세 번까지의 싸움은 허도기의 완벽한 압승이다.
창피한 말이지만 정말로 간신히 목숨만 구했다. 천운이 따랐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싸움에서는 허도기도 부족한 부분을 알지 못한다.
네 번째 싸움…… 그 싸움에서는 허도기도 분명히 약점을 드러냈다. 그토록 많은 검을 쳐내고도 아걸을 잡지 못한 것이 약점, 부족한 부분이다.
지지 않았다고 이긴 것이 아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싸움에서 상대를 죽이지 못했다는 것은 결코 이겼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상태에서는 싸움이 끝났다고 해도 끝난 게 아니다. 여전히 싸움은 진행 중이다.
아걸과 허도기는 지금도 네 번째 싸움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비무는 엄밀히 말하면 다섯 번째 싸움이 아니라 네 번째 싸움의 연장이다.
이런 사실은 누구보다도 허도기가 잘 안다.
이번에 맞이하는 허도기의 발검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를 것이다. 보지는 않았지만 장담할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은 어떤 칼을 쓸까?
타닥! 타닥! 타타닥!
모닥불이 무심히 타들어 간다.
언제나 혼자다. 싸움할 때는 물론이고 싸움을 하러 가기 전에도 늘 혼자다.
혼자이지만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다. 머릿속에는 온통 허도기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아걸은 그저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것만 지켜봤다.
잠시 눈을 감는다. 입도 굳게 다물고, 귀도 막는다. 마지막으로 코를 막는다.
머릿속에 그려진 허도기에 대한 모든 생각을 지워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머릿속에서 계속 허도기가 그려질 텐데, 어떻게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냐고?
생각이라는 것은 호흡과 연관되어 있다. 호흡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눈코입 그리고 귀, 머리에 있는 일곱 구멍을 막으면 생각이 멈춘다. 눈을 감고 숨을 쉬지 않고 조용히 침묵을 지키면 생각이 떨어져 나간다.
영원히 그렇게 있을 필요는 없다. 생각이 떨어져 나가면 다시 눈을 뜨고 모닥불을 지켜본다. 그러다가 허도기나 그의 발검술이 생각나면 다시 숨을 멈춘다.
이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생각 없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하지만 목숨과 연관된 생각은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지우면 지울수록 반발이라도 하듯 더 급하게 떠오른다. 마치 지울 수 없다는 듯이.
그래도 생각을 떨군다.
아걸은 자신이 할 바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 싸움이 내일인데 인제 와서 뭘 하겠나. 날이 밝으면 초도성으로 들어갈 것이고, 허도기와 싸운다.
지금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푹 쉬면 된다.
문득, 몽설이 생각났다.
몽설과 하원랑의 싸움은 결판이 났을 것이다. 아니, 벌써 결판이 났다. 둘 중 한 명은 죽었다.
그 싸움은 몽설이 이겼다.
만약 몽설이 졌다면 벌써 취화원 살수들이 소식을 전해왔을 것이다. 혹여 몽설이 알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어도 취운이라면 소식을 전해왔다.
그런 소식은 취화원이 알리지 않아도 허도기가 말해준다.
싸움을 앞에 두고 허도기에게 그런 소식을 듣느니 먼저 아픔을 정리할 수 있게 하는 쪽이 낫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나? 지금이 딱 그렇다. 지금은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이 오히려 희소식이다.
취화원은 여전히 몽설이 통제하고 있다.
몽설이 이겼다. 몽설이 여전히 취화원을 장악하고 있다.
은거 무인도 걱정된다.
진개를 잘 잡았을까? 분뢰절맥은 무서운 무공이다. 분뢰절맥이 절정에 이르면 혈검하고도 맞선다. 분뢰절맥은 고금 오대 마공 중 하나다.
진개의 성취가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그가 이를 악물고 수련했다면, 절대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싸움도 은거 무인들이 이겼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역시 소식이다. 만약 은거 무인들이 졌다면 취화원이 당장 소식을 전해왔다. 일이 틀어졌으니 아걸도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나. 아무런 연락도 취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은거 무인들이 예정대로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거다.
양쪽 모두 이겼다.
이제 남은 싸움은 자신밖에 없다.
‘이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거네.’
파앗!
발검술이 눈앞에서 눈부시게 번뜩였다.
아걸은 즉시 눈을 감았다. 두 귀를 막고 호흡까지 막았다.
잠시 허도기의 발검술이 떠오르는 듯하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묻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텅 비어진다.
숨을 멈추면 생각도 끊긴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눈을 감으면 잠시 어둠이 일렁거린다. 눈앞에 무엇인가가 있는 듯이 여겨진다. 하지만 곧 그런 느낌마저 사라진다.
인간이 영원히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 시간만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허도기의 발검술을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제 와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스슷!
숲에서 기척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당연하다 초도성이 코앞인데 설마 이 정도의 경계망도 펼쳐져 있지 않을까. 자신이 취하는 일거수일투족이 허도기에게 보고되고 있을 것이다.
아걸은 담요에 몸을 눕혔다.
하늘의 별을 보면서 잠을 청한다. 적이 눈앞에 있지만 염려하지 않는다.
드르렁! 쿨! 드르렁!
아걸은 피곤했는지 코까지 골았다.
“아걸 맞지?”
“맞아.”
“어떻게 여기서 발견됐지?”
“그래도 우리 눈에라도 띄었으니 다행이지. 우리까지 뚫렸으면 어쩔 뻔했어.”
성검문 무인 두 명이 낮게 속삭였다.
성검문은 초도성 주변에 열 겹의 경계망을 펼쳐놨다.
아걸은 여덟 개를 뚫고 아홉 번째 경계망에서 발견되었다. 이전에 펼쳐진 여덟 개의 경계망을 뚫고 들어온 곳이다.
아홉 번째 경계망까지 넘으면 남은 것은 초도성 성문에 배치된 경계망이다.
성안은 염려하지 않는다. 성안에는 초도성에 머무는 공봉들이 쫙 깔려있다. 지붕 위로 날아가든, 땅 밑으로 기어가든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경계망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검문의 일부다. 초도성 성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성검문 사람이다. 무인이든 범인이든, 장사하는 상인도 성검문 사람으로 취급한다.
초도성이 곧 성검문이다.
그러니 초도성 성벽에 펼쳐놓은 열 번째 경계망이 마지막 경계망이다.
“그런데 저놈 지금 뭐 하는 거야? 자는 거 맞지?”
“응. 완전히 곯아떨어졌어. 코까지 골잖아.”
“우리가 있는 걸 모르나?”
“웃기는 소리. 이미 알고 있을걸?”
“그렇겠지?”
“그럼.”
“제길! 모르면 얼마나 좋아. 이럴 때 살짝 다가가서 목이라도 따면 공을 세우는 거잖아.”
“죽으려면 뭔 짓을 못 해. 저놈이 우리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을 거 같아? 그런데도 저렇게 잘 자는 건 우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보고나 해.”
그들이 수군거렸다.
사람이 있건 없건 아걸은 여전히 심하게 코를 골았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지극히 태연한 모습이다.
“음!”
사구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보고를 받고 혹시나 해서 달려왔는데 확실히 맞다. 아걸이 누워서 자고 있다.
경계망이 뚫렸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경계망 속에는 적위군이 섞여 있다. 은거 무인들을 찾기 위해 배치한 무인들이다.
아걸은 그들마저 감쪽같이 뚫어버렸다.
만약 은거 무인도 그들을 뚫는다면? 뚫을 수 있다. 그러면 지금쯤 은거 무인들은…… 이미 성안으로 잠입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아니다. 아걸이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뚫고 왔는지는 몰라도 다른 자들은 절대 뚫지 못한다. 적위군은 무공은 약해도 경계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는다.
사구정은 판단을 내려야 했다.
아걸이 특출한 놈이라고 믿고 적위군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불러들여서 성안에 집중적으로 배치할 것인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은거 무인만큼은 밖에서 막아야 하는데.
초도성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진개가 노출된다.
공부가 은거 무인들을 제거하라고 명령한 데는 진개를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진개를 죽이는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비무 전에 성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일홀도의 감각…… 맞아. 이놈은 특출해. 이놈이라면 적위군도 막지 못해.’
사구정은 경계망을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적위군을 믿는다. 그때,
퍼엉!
사구정의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사오 리쯤 떨어진 곳에서 붉은 화광이 솟구쳤다.
거리는 멀지만 짙은 밤이라서 불꽃이 잘 보인다.
사구정의 눈빛에 반짝 기광이 떠올랐다.
적위군이 은거 무인들을 찾아냈다.
‘그러면 그렇지. 놓칠 리 없지.’
사구정은 태연히 잠들어 있는 아걸을 쳐다봤다.
아걸과 자신의 무공 차이는 얼마나 될까? 아걸은 잠들어 있고 자신은 눈을 뜨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공격을 취한다면? 그래도 베지 못할까?
‘너는 공부님 검에 베일 팔자.’
사구정은 아걸에게 일별을 던진 후, 신형을 쏘아냈다.
쒜에엑!
한 마리 비조가 어둠을 뚫고 날아간다.
스읏!
아걸은 눈을 살며시 떴다. 온전히 눈을 뜬 것이 아니다. 가느다랗게 실눈을 떴다.
아걸은 어느 순간부터 분심공(分心功)이라도 해도 좋고, 양심공(兩心功)이라도 해도 좋은 기공을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자신도 모르게 생겨난 능력이다.
그는 잠을 자는 중에도 신경의 일부분은 멀쩡하게 깨어있다. 처음부터 잠이 들지 않은 것처럼.
깨어있는 부분은 주변을 지켜본다.
일부러 경계하는 것은 아니다. 깨어있다가 보니 작은 소리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독사가 소리 내지 않고 기어와도 단박에 알아챈다. 개미가 살을 밟고 기어오르는 것까지 감지한다. 몸을 움직여서 쳐내지는 않지만, 움직임은 느낀다.
얕은수면 상태라고 할 수도 없다. 잠들어 있는 한쪽은 정말로 푹 쉰다.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어서 꿈도 꾸지 않는다. 신경의 일부가 깨어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이러니 숲에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이 나타난 순간부터 사라지는 순간까지 모두 다 지켜봤다.
불꽃이 터진 것도 안다.
‘은거 무인들이 발각되었어.’
은거 무인들에 관한 생각이 꿈결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이제 그들은 사구정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하지만 곧 꿈에 묻혔다.
드르릉!
아걸은 코를 골았다.
깊이 잠들어 있는 다른 한쪽이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더불어서 깨어있는 다른 부분마저 수면 속으로 끌어들였다.
실눈이 스르륵 감겼다.
은거 무인들의 일은 온전히 그들에게 맡긴다.
자신이 할 일은 오직 하나, 천하제일인 허도기를 상대하는 것이다. 내일 있을 결전에 자신의 영혼까지, 티끌만 한 진력까지 모두 끌어내어서 집중시킨다.
드르릉! 쿨! 드르릉!
깊은 숲에 코 고는 소리만 높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