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七章 만사무휴(萬事無休) (2)
참으로 어렵다. 꾸준히 앞으로 나가기는 하는 데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린다. 반 시진 동안 수십 번을 움직인 끝에 겨우 일이십 장을 나아갔을 뿐이다.
암기는 여전히 폭풍처럼 쏟아진다.
얼마나 많은 암기가 쏟아졌는지 발 디딜 곳이 없다. 자칫하면 땅에 떨어진 암기에 찔릴 판이다.
이토록 거친 암기 공세라니!
“미치겠네. 이거 어떻게 좀 안되나?”
나통이 신형을 날리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움직이다가는 조만간에 진기가 바닥날 것 같다. 암기를 막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실제로 화살을 제대로 막지 못해서 몇 대 정도는 몸을 훑고 지나갔다.
화살촉에는 독이 발라져 있는지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시커멓게 변색하였다. 살갗을 불로 지지는 듯 싸한 통증도 치민다. 심한 경우에는 벌써 고름이 맺혔다.
“이 사람들 좀 안아.”
한항이 나통에게 진개와 쌍검을 건넸다.
“왜?”
“이래서는 안 되잖아. 어쩔 수 없지. 내가 좀 나서야겠어.”
“뭘 어떻게 하려고?”
“내가 잘하는 게 있잖아.”
“네가 잘하는 거? 뭐?”
나통이 되물었다.
한항은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고 했지만…… 한항의 검법이야 익히 아는 것이고…… 그가 잘하는 게 뭐지? 뭐가 있더라? 퍼뜩 생각나는 게 없다.
“후후! 내가 잘하는 걸 하면 되지. 여기서 한 시진만 버텨. 어떻게든 길을 내볼 테니까.”
한항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첫 번째 목표는 사력을 다해서 잡아야 한다. 첫 번째 맹수를 잡아야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맹수를 쉽게 잡는다.
한항은 한 명을 점찍었다. 너 하나만은 반드시 잡고 말겠다는 듯 두 눈에 단단히 각인시켰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행동을 관찰했다.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잠시 멈칫거리는 정도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한항은 목표를 읽었다.
스슷! 스스슷!
어둠 속을 은밀히 움직인다.
한항은 거의 십여 년 만에 초초십이환(悄悄十二幻)을 펼쳤다.
세상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오은문(悟隱門)의 신법이다. 하지만 은밀하기로는 취화원의 사생락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자부한다.
사실이 그렇다. 초초십이환을 펼치면 어둠과 하나가 된다. 어둠에 녹아드는 열두 가지의 신법은 어떤 상황에도 어울린다. 날이 저물 무렵부터 동틀 무렵까지 모든 어둠 속에 스며든다.
타타탁! 타탁!
바쁘게 움직이는 은거 무인들이 보였다.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니 불나방처럼 이리저리 뛰고 있다.
한항은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초초십이환을 펼친 적이 없다. 어둠을 드러내기 싫었다. 초초십이환이 어둠 속에 녹아드는 신법이지만, 한항에게는 신법 자체가 어둠이다.
초초십이환이 드러나면 오은문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오은문에서 일어났던 추하디추한 애증이 드러난다. 야천 일전통 만큼이나 지저분했던 사문의 역사가.
그래서 아걸과 비무를 할 때도 초초십이환은 쓰지 않았다.
스슷! 스스슷!
어둠에서 어둠 속으로 신형을 움직인다.
맹수들은 한항이 은거 무인의 무리에서 벗어나 어둠 속으로 스며든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십 명이 여섯 명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한항이 움직인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한 명, 한 명만 잡으면 된다!
타다닥! 타다닥!
맹수가 위기를 느꼈는지 아니면 본능적인 움직임인지 그를 피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한항은 느긋하게 그를 쫓아갔다.
서둘 필요가 전혀 없다. 자신은 맹수를 보지만, 맹수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
어둠 속에서 초초십이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스읏!
드디어 목표의 등 뒤로 접근했다.
초초십이환은 은밀한 대신 느리다. 한항이 일부러 서둘지 않은 이유도 있다. 그는 무려 반 시진을 소모한 끝에야 목표의 등 뒤로 다가섰다.
나통에게 한 시진만 버티라고 했는데, 자신이 말한 것 중에서 벌써 절반을 썼다.
상관없다. 한 명만 잡으면 된다!
조용히 맹수의 등 뒤로 다가가 단검을 흘렸다.
스읏! 싸악!
“큭!”
맹수가 단발마를 흘리며 쓰러졌다.
단검은 정확하게 맹수의 목을 베었다. 목젖을 단숨에 잘라서 비명조차 크게 흘리지 못했다.
서로 거리가 삼사 장밖에 나지 않는다면 맹수들은 은거 무인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들이 맹위를 떨치는 것은 이들의 전투 경험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피와 살을 내주며 쌓아온 경험 덕분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한항은 재빨리 맹수의 옷을 벗겨서 갈아입었다. 건(巾)을 풀어서 머리를 맹수처럼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품에서 누런색의 인피(人皮)를 꺼내 얼굴에 뒤집어썼다.
한항은 변장의 달인이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변장하는지 본 사람은 없다.
평소, 한항은 변장술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가 사용하는 변장술도 오은문의 절학이다. 사람을 연구한 끝에 만들어낸 학문이다. 한낱 변장술을 학문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오은문은 학문을 탐구하는 심정으로 사람을 연구했다. ‘흡사’와 ‘동일’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스읏!
한항은 맹수의 검까지 가로챈 후, 일어섰다.
스으읏!
누군가 다가온다. 하지만 경계심은 일어나지 않는다. 혈적대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뭐야! 왜 이리 와? 자리 지키라니까!”
화통 심지에 불을 붙이던 맹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해진 위치를 임의로 벗어나면 손발이 엉킨다. 제대로 된 암습을 가하지 못한다.
맹수는 느닷없이 다가온 동료가 달갑지 않았다. 그때,
슉슉!
옆으로 다가온 동료가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
“엇!”
화통 심지에 불을 붙이던 자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동료는 곧 따라붙었고, 재차 검을 휘둘렀다. 혈적대원이 사용하는 실전 검법이다.
“크윽!”
맹수는 두 번째 검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검이 심장을 찔렀고, 지극히 짧은 비명을 토해내며 쓰러졌다.
“응? 뭐야!”
“미쳤어!”
다른 곳에 있던 맹수들이 이 광경을 보고 소리쳤다.
동료가 동료를 벴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혈적대 검법으로, 자신들과 똑같은 움직임으로 벴다. 기습을 당하면 베일 수밖에 없지만, 정면에서 부딪치면 맞받을 수 있다.
스스스슷!
맹수를 벤 동료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맹수들끼리 서로 믿지 못하게 만든다. 동료가 자신을 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그래서 일부러 자신을 노출하며 맹수의 검법으로 적을 베었다.
스슷! 스스슷!
맹수들이 일거에 잠적했다.
이들은 역시 싸움 경험이 많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목숨을 보전하는지 방법을 안다. 그리고 한 점 망설임 없이 즉시 시행했다.
‘이것으로 활로를 뚫었어.’
단순히 맹수 두 명을 벤 것뿐인데…… 이것만으로도 활로를 뚫기는 충분하다.
이제 맹수들의 공격은 상당히 느슨해졌다. 서로 간의 연대감도 거의 끊어졌다. 동료 속에 배신자가 있다는 생각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이라면…… 은거 무인들은 활로를 찾는다.
그래도 한항은 몸을 숨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은 할 일이 더 남아있다. 추격의 뿌리를 완전히 끊으려면 한 번 더 공격해야 한다. 이것 역시 오은문이 찾아낸 인간 심리다.
타타타타탁!
은거 무인들이 틈을 찾았다. 찾지 못할 리 없다. 당연히 재빨리 움직인다. 포위망을 탈출하려고 한다. 일차 포위망만 벗어나면 쾌속 질주한다. 그러면 맹수도 따라잡지 못한다.
그러자 앞쪽에서 몇 사람이 움직였다.
은거 무인은 알지 못하지만, 한항은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똑똑히 봤다.
스슷! 스스슷!
몇 명이 관도에 매설된 화약을 폭발시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한항은 그 순간을 노렸다. 누군가가 화약을 폭발시키기 위해 달려가리라 생각했다. 다만 화약이 어느 곳에 매설되었는지를 모를 뿐이다.
쒜에에엑! 쒜에엑!
한항은 일단의 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그때,
타타타타탁! 타타타탁!
사방에서 한항을 향해 암기가 쏟아졌다.
맹수들은 동료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니 당연히 그가 누군지 파악하려고 한다. 예정에 없던 행동을 하는 자가 배신자이지 않나.
서로가 서로를 주시한다. 감시한다.
그러던 중에 한항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 그는 관도를 향해 달려가서는 안 된다.
배신자!
맹수들은 즉각 공격했다.
적도 죽여야 하지만 배반자를 처단하는 게 선급하다. 배신자가 뒤를 노리는 한,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암기는 헛된 곳만 후려쳤다.
스슷! 스스슷!
한항은 이미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은신처에서 신형을 날리기 전에 엄폐물을 찾아놓는 것은 기본이다. 어둠을 이용하는 무공은 엄폐물을 얼마나 잘 찾느냐에 따라서 성취가 결정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항은 관도까지 다다르는 데 필요한 엄폐물 열두 개를 찾아놨다.
암기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암기가 자신을 향해 날아올 즈음에는 이미 두 번째 엄폐물 뒤로 몸을 숨긴 후이다. 암기가 땅을 후려칠 때, 자신이 세 번째 엄폐물 뒤에 있을 것이다.
움직임에 망설임이 있을 리 없다. 쾌적하게 질주한다.
저들은 한항이 숨었던 엄폐물을 뒤늦게야 찾았다. 한항이 이미 다른 은폐물로 떠난 후에야 그가 머문 자리를 찾아낸 것이다.
확실히 늦다.
“아아아악!”
비명이 터졌다. 맹수들이 쓰러졌다.
관도에 매설된 화약은 폭파되지 않았다.
쒜에에엑! 쒜에엑!
은거 무인들이 빠르게 질주했다.
앞에서 일어난 비명은 한항이 만든 것이다. 그러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한항은 은거 무인들이 지나쳐가는 것을 보면서 마지막 열두 번째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겼다.
‘후우!’
그는 그제야 거친 숨을 토해냈다.
이제 끝났다. 지금부터 맹수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배신자가 동료 중 몇 명이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바로 옆에 있는 동료조차 믿지 못할 때 이들의 손발은 엉클어지게 되어 있다.
약정된 모든 공격이 무너진다.
이게 변장의 달인이 할 수 있는 공격이다.
팡! 팡!
검은 하늘에 붉은 화탄이 쏘아졌다. 그리고 어둠을 밀치며 밝은 모닥불이 확 피어났다.
적위군은 일제히 포위망을 해제하고 모닥불이 피어난 곳으로 모여들었다.
모닥불 앞에는 사구정이 서 있었다.
“하나!”
“둘!”
적위군은 모닥불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번호를 말했다. 앞번호를 받아서 뒷번호를 댔다.
“서른넷!”
끝이다. 더는 번호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흔한 명이었는데 서른넷…… 일곱 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정백(鄭伯)이 배신했습니다.”
적위군이 말했다.
“정백이 맞나?”
“…….”
사구정이 되묻자 적위군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백이 배신할 놈이냐!”
“…….”
이번에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혈적대는 혈적대를 믿는다. 철저하게 믿는다. 자신의 뒤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된 놈은 미리 죽여버린다.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막아준다는 믿음이 있다.
그렇기에 정백의 배신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혈적대에 대한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졌었다. 정백이 동료를 추살하자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너희들 탓이 아니다. 이건 내 실수야.”
사구정이 침음하듯 말했다.
“내가 직접 지휘해야 했는데…… 너무 늦게 도착했어.”
사구정은 탄식했다.
힘이 없어서 막지 못한 것이 아니다. 약간의 부주의가 은거 무인들을 놓아주었다.
이번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한다. 은거 무인 중에 변장에 달인이 있다. 그가 변장술을 쓰지 않아서 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움직였다. 한항!
정백은 한항이다. 한항이 적위군으로 변장해서 뒤를 쳤다.
“가자!”
사구정은 망설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움직였다. 이곳에서는 놓쳤지만 초도성에서는 잡을 수도 있다. 초도성에서 놓치더라도 성검문에서 잡으면 된다. 성검문에서 잡지 못하더라도 적위군은 허도기 옆에 있어야 한다. 공부의 힘이 되어야 한다.
공부에게는 하찮은 힘이겠지만 그래도 옆에 있다 보면 도움이 될 때가 올 것이다.
쒜에에엑! 쒜에엑!
사구정은 적위군을 이끌고 신형을 쏘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