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583화 (583/600)

第百七章 만사무휴(萬事無休) (3)

아걸은 초도성으로 들어섰다.

그를 주시하는 사람은 없다. 입고 있는 옷이 워낙 남루하고, 차고 있는 칼조차 볼품이 없어서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한다. 마치 어느 한 군데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낭인처럼 보인다.

정제되었다거나 말쑥함과는 거리가 먼 거침? 황야에서 마구 뒹군듯한 몰골?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아걸은 길을 오는 내내 객잔에서 머문 적이 거의 없다. 따뜻하게 데워진 물로 목욕해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푹신한 침상에 몸을 눕힌 적도 없다.

중부를 떠난 이후, 아걸은 야생에서 살았다.

땅이 침상이다. 흙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었고, 풀 냄새를 맡으며 일어났다. 한기는 모닥불로 밀어냈고, 비가 쏟아지면 좁디좁은 동굴에서 들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피했다.

아걸에게서는 야생의 냄새가 풍긴다.

“명부판관은 언제 나타날까?”

“글쎄…….”

“들어왔다는 말은 못 들었지?”

“그런 말은 아직 못 들었어.”

아걸의 코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걸은 그들이 하는 말을 귓가로 흘려들으며 혈무대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초도성, 성검문, 혈무대.

이곳이 온 게 벌써 몇 번째인가? 어떤 때는 승리를 안고 돌아갔고, 어떤 때는 이기고도 졌다는 마음을 가졌다. 분명한 것은 허도기에게 이긴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거다.

허도기에게는 매번 지기만 했다.

싸움에는 이겼어도 허도기를 누르지 못했다는 상실감을 안은 채 물러났다.

혈무대를 보면 독안혈검 전무성이 생각난다.

혈무대에서는 그와 처음 싸웠다. 그때에도 잔뜩 긴장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 무공이 높아져도 매 싸움이 힘들다. 절대 쉬운 싸움이 없다.

이번 결전은 오음산 싸움처럼 장소를 넓게 쓰는 것도 아니다. 혈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만 싸운다. 그러니 승부는 금방 갈라질 것이다.

“대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뒤에서 다가와 옆에 나란히 선 사내가 나직이 말했다.

아걸은 사내를 힐끔 쳐다봤다.

“아정(亞廷)이라고 합니다. 전임 적랑대주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사내는 아걸을 보지 않았다. 전면만 보고 입술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할배가?”

“첫 번째 골목길에서 우측으로. 골목길로 들어서시면 대주님이 보일 겁니다.”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앞서 나갔다.

초도성은 성검문의 이목이 넓게 깔린 곳이다. 은밀한 대화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오늘도 그럴까? 오늘은 일홀문주와 성검문주의 결전이 있는 날이다. 양쪽이 서로에게 혈첩을 건넸으니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끝날 싸움이다.

당연히 초도성에는 아걸 같은 낭인이 상당수 들어왔다.

이 싸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다. 명문정파, 대문파, 각 세가에서도 사람이 왔다. 무인들이 너무 많아서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인다.

이런 날에도 성검문의 이목이 날카롭게 빛날까? 그렇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감시가 어려워 보여도 성검문은 충분히 감시할 수 있다. 초도성 주민이 전부 성검문에 협조한다. 주민 전원이 성검문도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낭인이 몇 명이든 타파의 무인이 얼마나 쏟아져 들어왔던 모두 감시할 수가 있다.

스읏!

아걸은 사내가 말한 첫 번째 골목길에서 방향을 틀었다.

“좋아 보인다.”

아삼이 빙긋 웃으며 맞이했다.

아삼은 좁은 골목길에서 의자 몇 개 놓고 차를 파는 노점상에 앉아 있었다.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차를 마시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몇 년 사이에 많이 늙었다.

“좋아 보이기는. 마지 못해 싸움판에 끌려가는 사람이 좋아 보일 리 있나.”

아걸이 할배 곁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킥킥킥! 어째 중원제일도라는 놈의 말투가 아직도 그 모양이냐?”

“중원제일도든 천하제일도든 할배 앞에서는 막말할 수 있는 거거든. 이런 것까지 못 하면 숨 막혀서 못 살아.”

“그러냐? 킥킥!”

아삼이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지금 나하고 이러고 있으면 곧 눈에 띌 텐데? 그러면 적랑대도 위험해지지 않을까?”

“네 놈이 이기면 되지.”

“그게 말처럼 쉽나.”

“아직도 허도기에 대한 대책은 세우지 못한 거야?”

“그게 말처럼 쉽냐고.”

“네 놈은 항시 사고가 부정적이야. 네 놈에게 반철도를 안겨줄 때가 생각나네. 아직 멀었다고 팔짝팔짝 뛰었잖아. 그때 억지로라도 칼을 쥐여주지 않았으면 여기까지라도 왔겠냐?”

“그래서 그렇게 사지로 몰아붙이셨어?”

“그랬다. 이놈아! 키키!”

할배가 웃었다.

그러고 보면 그 당시의 싸움이 가장 힘들었다. 지금도 동박을 유인할 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뛴다.

천하제일검은 허도기인데…… 허도기에게는 칼도 들지 못하는 자를, 서리 성을 받지도 못하고 일홀도조차 인정받지 못한 동박이 가장 힘들었던 상대로 기억된다.

솔직히 그 싸움에 비하면 서리형개와 서리가헌과의 싸움은 힘든 편이 아니었다. 소축십검과의 싸움도 힘든 줄 모르고 한 걸음씩 건너왔다.

물론 모든 싸움이 다 힘들었다.

사형들이나 소축십검과 싸울 때는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심한 중상을 입기도 했다. 초가평과의 싸움은 어땠나? 온몸이 숯덩이가 된 상태에서 싸웠다.

어느 싸움이든 쉬운 싸움은 없었다.

그중에서도 심적으로 가장 압박감이 심했던 상대가 동박이다. 정말 그 싸움은 가슴이 떨렸다. 아마도 초강 고수와 칼을 부딪치는 첫 번째 싸움이라서 그랬을 거다.

“그놈들이 진개를 잡았다. 이미 성안으로 들어왔어. 우리가 보호하고 있다.”

“무사히 들어왔네. 후후!”

“언제 내놓을까?”

“싸움이 있기 전…… 그때가 좋겠어. 경계가 심할 텐데 내놓을 수 있을까?”

“어렵지. 네 놈이 길을 열어줘야지.”

“난 싸워야 할 사람인데, 그런 일까지 해?”

“네가 안 하면 우리가 무슨 수로 길을 열어!”

아삼이 버럭 노갈을 내질렀다.

“그러네. 그럼 내가 짠! 하고 길을 열어야겠네. 하하!”

아걸이 농담조로 말했다.

“그놈 잡으면서 쌍겸이 되게 다쳤다.”

“그럴 줄 알았어.”

“예상했냐?”

“쌍겸이라면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했는데…… 사마라는 꼬리표가 붙어서 늘 물불 안 가리거든. 뭔가 해야 한다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어.”

“그란데도 싸움판으로 내몬 거야?”

“할배, 난 오늘 허도기와 싸운다니까. 그거 하나면 내 모든 죄가 용서돼.”

“킥킥킥! 그건 그래. 오늘 죽을 놈한테 뭘 따져.”

“하하하!”

아걸이 웃었다.

“여기 차 끓여왔습니다.”

말 몇 마디 하는 사이에 노점상 주인이 차를 끓여왔다.

아걸은 평범한 녹차를 훌쩍훌쩍 마셨다.

찻물이 정수(淨水)가 아니다. 차도 하품(下品)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차가 이승에서 마시는 마지막 차일지도 모른다. 십중팔구는 그렇게 생각된다.

할배도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일부러 차 한 잔이라도 내주려고 아걸을 만난 것이다. 은거무인들이 진개를 잡았다는 소식 정도는 굳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아걸도 그런 점을 생각했기 때문에 골목길로 들어선 것이다.

“아! 할배, 나 돈 없다. 찻값 내줄 거지?”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난들 돈 있냐!”

“그럼 어째? 튀어?”

“에라이! 중원제일도라는 놈이 찻값 떼어먹고 도망가냐! 우선은 내가 셈한다만, 네 마누라에게 가서 이자까지 받아낼 거다.”

“할배, 참 간도 크네. 거기가 어디라고 찾아가. 살수들이 득실거리는 곳인데. 하하!”

아걸이 웃었다.

“에잉! 이런 놈 뭐가 예쁘다고. 차 다 마셨으면 가봐!”

아삼은 고개를 돌려 맞은편 담벼락을 쳐다봤다.

아걸은 찻잔을 들어서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빈 잔을 기다란 의자 옆에 얌전히 올려놓고 일어섰다.

“할배 만나서 다행이다. 할배 덕분에 잘 컸어. 허도기 누르고 진짜 좋은 술 한 병 살게.”

저벅! 저벅!

아걸이 걸어갔다.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걸어갔다.

아삼도 아걸을 보지 않았다. 맞은편 담벼락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눈을 떼면 무슨 말이 쏟아져 나올지 몰라서.

‘몽설?’

아걸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몽설을 봤다.

중부에서 이별한 지 며칠 되지 않는다. 그때 이별 인사를 나눴으니 오늘은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초도성으로 왔다.

오지 않으면 안 됐을 것이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이승에서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까지 냉정함을 지키고 있기는 힘들었을 거다.

“뭐 하러.”

“그냥.”

“중부에서 봤으면 됐지.”

“그래도.”

“싸움, 볼 거야?”

몽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지 말지.”

“알았어. 안 볼게.”

아걸이 손을 뻗어 몽설의 손을 쥐었다.

“하원랑, 힘들었어?”

“별로. 모르나 본데…… 나 이제 고수야. 허도기 누르면 나한테 도전해. 받아줄게.”

“그럴게.”

“꼭 내 검을 받아. 나보다 한참 아래인 하수한테 지지 말고. 져도 내가 인정하는 사람에게 져. 허도기는 인정 못 해.”

아걸은 몽설을 쳐다봤다.

몽설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아걸이 강하다는 점을 알지만, 허도기는 터무니없이 강하다.

할배도 그렇고…… 오음산 싸움이 어땠는지 알고 있기에 더 염려될 수밖에 없다.

아걸은 그 후, 상당히 성장했다. 오음산 싸움 때와는 전혀 다른 칼을 지녔다. 아걸 자신도 이만하면 일홀도이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말할 정도다.

하지만 아걸이 성장했으면 허도기도 성장한다.

초절정고수는 자신의 부족함을 민감하게 느낀다. 그리고 보충하는 방법도 찾아낸다.

허도기의 검 역시 오음산 때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아걸이 손을 들어 몽설의 뺨을 어루만졌다.

“갈게.”

몽설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아걸은 몽설 주위에 포진해 있는 곡주 네 명에게 눈인사했다.

월영, 청란, 규화, 사사는 아걸과 몽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사방을 감시했다. 하지만 무인의 눈으로 감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재미있는 구경을 한다는 표정이다.

그녀들은 전혀 살수 같지 않다.

특히, 사사는 색혼경을 수련해서 표정, 손짓, 움직임이 사내의 욕정을 끌어낸다. 한데 오늘은 매우 평범하다. 예쁘고 착해 보이는 여인이 무인을 구경하는 것처럼 보인다.

살수의 최종단계인 퇴빙이다.

아걸은 그녀들을 알고 있으니 그녀들의 모든 몸짓에 무공이 가미된 것을 찾아낸다. 하지만 그녀들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공 흔적을 찾기가 무척 힘들 것이다.

몽설의 무공이 높아짐에 따라 곡주들의 경주도 한결 높아지고 있다.

‘취화원이 몽설을 지켜주니…… 안심해도 돼. 이 정도면 마음 놓고 싸워도 되겠어.’

아걸은 몽설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가 놓았다.

저벅! 저벅!

아걸은 눈앞에 보이는 혈무대를 향해서 걸었다. 그런 어느 순간,

“아걸이다!”

“바, 반철도! 반철도다!”

“아걸! 아걸이야!”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누군가가 허리춤에 꽂힌 반철도를 알아봤다. 쇳덩어리처럼 뭉툭한 칼인데 용케 알아봤다.

초도성 사람 중에는 아걸을 알고 있는 자도 꽤 있다.

벌써 혈무대에 선 게 몇 번인가? 그 모든 싸움이 초도성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모르긴 해도 아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상당수일 것이다.

“아걸이 왔네. 아! 오늘은 명부판관으로 온 거지?”

“천하제일검을 모함해도 분수가 있지. 중원제일도가 되니까 천하제일도 엿보고 싶나?”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초도성 민심은 아걸 편이 아니다. 아직도 허도기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적랑대도, 취화원도 더는 아걸에게 접근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아걸에게 접근하면 그는 당장 성검문 표적이 된다. 아걸이 혈무대에서 허도기와 싸우는 동안, 아걸에게 접촉했던 자들은 은밀히 찾아온 성검문 무인들의 검을 맞이해야 한다.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그리고 몇몇은 어두운 골목에서 쓸쓸하게 죽어갈 것이다.

아걸은 그런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저벅! 저벅!

혈무대를 향해서 진중하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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