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七章 만사무휴(萬事無休) (4)
성검문이 보인다.
성검문 옆에 설치된 혈무대도 보였다. 오늘 싸움을 위해서 새로 칠까지 해놓았다.
혈무대는 성검문의 상징이다. 아니, 무림의 상징이다.
누구든 무공만 갖췄으면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천하제일 문파에 도전할 수 있다. 시골 촌부라고 해도 일약 절정 무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무림은 무공만 강하면 인정받는 세계다.
부귀영화를 쫓아도 무방하다. 싸움에 미쳐서 날뛰어도 상관없다. 어떤 일에 목숨을 걸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이쯤에서 시작해 볼까.’
아걸은 혈무대가 환히 보이는 관도 한복판에 섰다. 그리고 허리에 찬 반철도를 뽑았다.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땅에 파묻히듯 굳건히 서서 혈무대를 노려보았다.
‘조금 민망하긴 한데…….’
아걸은 뭇 사람에게 주목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떠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무공이 강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쑥스럽다.
하지만 오늘은 주목 좀 받아야겠다.
“이야아아아아아!”
음성에 진기를 실어 크게 고함쳤다. 동시에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반철도를 크게 원을 그리며 천천히, 힘주어 내렸다.
이러한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혈무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만 하면 된다.
아걸은 반철도를 내려뜨릴 때 일부러 강하게 진기를 튕겨냈다.
이것 역시 뭇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끌어당기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뜻은 전혀 없다.
꽈앙!
반철도가 허공을 격하고 땅을 후려쳤다. 진기 실린 반철도가 강력하게 땅을 타격했다.
구르르르릉!
뒤늦게 땅 울음이 울렸다.
연후, 아걸은 다시 반듯하게 섰다. 반철도를 축 늘어뜨린 채 편안하게 서서 혈무대를 노려봤다.
이미 사람들의 이목은 자신에게 집중되었다.
벌써 많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봤었다. 그런데 기이한 행동까지 벌이자 단번에 주목했다. 이런 행동을 보고도 어떻게 쳐다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저게 반철도야?”
“그런가 봐.”
“저런 칼 싸운다고? 저게 쇠막대기지 칼이야?”
반철도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편협된 생각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다.
“거참 등장 한 번 요란하네.”
“그러게. 아무리 중원제일도라고 해도 그렇지. 꼭 이렇게 티를 내고 나타나야 하나?”
“다른 때는 조용히 나타났는데 오늘은 왜 이러지?”
아걸의 행동에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록 귓속말로 쑥덕거리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입 모양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니, 그들이 얼굴에 떠올린 표정만 봐도 좋지 않은 감정이 실렸다는 정도는 짐작한다.
초도성에서 아걸은 악인에 속한다. 성검문 허도기가 반대쪽 사람, 선인이다.
아걸은 독안혈검 전가성을 비롯해서 소축십검 상당수를 죽였다.
이런 행동은 성검문을 휘청거리게 했다. 실제로 성검문이 와해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다행히 허도기가 다시 성검문을 추슬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성검문은 힘없이 쇠락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허도기가 성검문을 추슬러서 간신히 옛 위명을 되찾아 가려는 참인데…… 아걸이 다시 명부판관이라는 이름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명부판관이 뭔가? 하늘을 대신해서 세상에 죄 있는 사람을 징벌하는 무인이 아닌가. 그러면 허도기에게 그만한 죄가 있다는 말이지 않나.
전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또!
초도성 주민은 허도기에게 죄가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는다. 솔직히 그런 점은 관심 밖이다. 현재, 성검문이 초도성을 먹여 살리는 대자원이라는 점만 신경 쓴다. 아걸이 자꾸 이런 식으로 성검문을 건드리면 초도성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타격이다. 당장 먹고 사는데 지장이 생기는 거다.
성공문이 없으면 초도성은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다.
사람들은 살 곳을 찾아서 떠날 것이고, 종래에는 성(城)은 고사하고 작은 마을로 전락해 버릴 게 환히 보인다.
초도성 사람들은 아걸이 미웠다.
그러니 아걸이 요란하게 등장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아걸도 이들의 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허도기와는 불구대천지수다. 설혹 성검문이 몰락하더라도 허도기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아걸은 칼을 뽑은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혈무대만 노려봤다.
아걸과 혈무대 사이에 끼어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피했다.
아걸이 미친놈처럼 칼을 뽑아 들고 혈무대를 노려본다. 중간에 끼어있는 사람들을 노려본다. 혹여 정말 광분해서 날뛴다면 중간에 낀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갈라지며 넓은 길이 나타났다.
일다경, 이다경…… 시간이 무심히 시간이 흘렀다.
아걸은 꼼짝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제 자리를 지켰다.
“뭐 하는 거지?”
“공부께서 먼저 나타나라 이건가? 그건 예의가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나이 어린 사람이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그거 같은데 뭘. 성검문주께서 먼저 혈무대에 오른 다음에야 혈무대에 오르겠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일단 나는 왔으니까 너도 나타나라 이거 아냐.”
“좌우지간 오늘 둘 중 한 명은 요절나겠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한 시진쯤 지났을 때,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골목길에서 모습을 보인 사내들은 황급히 사람들을 뚫고 아걸 곁으로 다가왔다.
쒜에에엑! 쒜에엑!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은거 무인들이 아걸 뒤에 늘어섰다.
모두 여섯 명이다. 다섯 명은 멀쩡한 상태이고 한 명은 황열의 등에 업혀 있다. 할배에게서 전해 들었지만 진개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쌍겸께서는?”
“괜찮아. 하지만 오늘은 안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적랑대에 맡겨놓고 왔어.”
장태전이 말했다.
“아!”
아걸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걸은 이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자신에게 끄는 동안 적랑대가 이들을 은밀히 이동시켰다. 성검문 무인들의 눈을 피해서 은밀히.
사람 많은 초도성에서 성검문도의 눈을 피하는 것이 뭐 그렇게 어렵냐 싶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면 안다. 무척 어렵다. 성검문의 눈과 귀가 골목마다 틀어박혀 있다. 그중 누군가의 이목에라도 걸려들면 당장 적위군이 달려들 것이다.
저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진개를 탈취하려고 한다.
적랑대가 미리 길을 뚫어놓은 덕분에 은거무인들이 무사히 아걸 곁에 내려섰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은거 무인들이라는 사람들인가?”
“은거는 무슨! 무슨 은거가 세상을 버젓이 나돌아다녀. 은거의 탈을 쓴 무인들이지.”
은거 무인들이 아걸 곁에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은 명부판관의 수족으로도 유명하다. 명부판관이 상대방의 죄를 드러낼 때는 항상 은거 무인들이 뒤를 받쳐주었다. 주로 수집한 증거를 내놓는 역할이다.
지금도 그런가? 그렇다. 황열의 등에 진개가 업혀 있지 않은가.
“어! 저 사람은…… 진개 아니야?”
“맞아. 성검문주!”
진개는 임시로 성검문주를 맡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일부 사람은 진개를 성검문주로 인지한다.
“진개도 잡힌 거야?”
“하! 도대체가…….”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진개가 혼절한 모습으로 업혀 있다. 그것도 은거무인의 등에. 딱 봐도 사로잡힌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소축십검이 은거무인들에게 제압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저벅! 저벅!
아걸이 걸음을 떼어 놓았다.
은거 무인들이 뒤를 바짝 쫓았다.
“놈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이런 식으로 정면 돌파하는 게 정말 최선일까?”
나통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잡힌 자가 진개인 이상 충돌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싸우지 않고 혈무대까지 가는 방법은 이게 제일 좋아요.”
아걸이 걸어가면서 말했다.
스슷! 스스슷!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그리고 일단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걸 곁에 늘어서지 않고 검을 뽑아 든 채 앞을 막아섰다.
한눈에 쓸어보니 대략 이십여 명…… 그 뒤로 다시 사방에서 달려오는 자들이 삼사십 명쯤…… 대략 쉰 명은 넘는 무인들이 진개를 노리고 달려왔다.
상황이 급해 보였다. 달려오는 자들이 합류하기 전에 이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개님을 내놓지?”
앞을 막아선 무인이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걸이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성검문은 정도 문파다! 그러잖아도 소축십검이 어떻게 해서 마공을 수련했는지 알아보고자 하는데, 누가 감히 조사도 해보지 않고 천하의 마인을 내놓으라는 것이냐!”
아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초도성을 쩌렁쩌렁 울렸다.
앞을 막아선 무인은 어깨를 움찔거렸고, 뒤늦게 달려오던 자들은 주춤 걸음을 멈췄다.
아걸이 다시 일갈을 내질렀다.
“너희 눈에는 진개의 모습이 정상으로 보인다는 것이냐! 정녕 분뢰절맥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야!”
아걸의 음성에는 진기가 실렸다. 그것도 아예 작심하고 내뱉은 소리여서 전신 진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어지간한 청룡음을 훨씬 능가한다.
그의 엄청난 진기가 앞을 막아선 무인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비켜라! 분뢰절맥을 수련한 마인은 누구도 옹호할 수 없다! 만약 옹호하고자 한다면 가차 없이 벨 터! 너희가 감히 마인을 옹호하겠다는 것이냐!”
아걸이 반철도를 들어서 무인을 가리켰다.
아걸은 결정타 ‘분뢰절맥’을 입에 담았다.
아걸의 음성이 워낙 큰 탓에 사람들은 황열의 등에 업힌 진개를 주시했다. 그저 얼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진개의 몸에 나타난 마공 흔적을 찾았다.
진개의 상태는 누가 봐도 비정상이다. 우선 지렁이가 꿈틀거리듯이 툭툭 튀어나온 혈맥이 눈에 띈다. 징그러울 정도로 두드러지게 튀어나와 있다.
온몸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특히 머리카락이 노란색으로 변색하고 있다. 검은 머리였는데 노란 물이 들고 있다. 혼절한 상태에서도 체내의 열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모발까지 태운다.
분뢰절맥의 특징이 분명하다.
“음! 분뢰절맥…… 진개가 마공에 손댔다는 소문은 있었는데, 정말이었나?”
“그러면 이해가 되네. 좌수검이 보통 강했어야지. 우수검을 쓰던 자가 느닷없이 좌수검의 고수가 되어서…… 난 또 진개가 양손을 다 쓰는 줄 알았지 뭐야.”
상황을 지켜보던 무인들이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초도성 사람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정도 무인들이 이렇게 말하는데 무슨 말을 할까. 진개가 정말 분뢰절맥이라는 마공을 수련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제일 문파의 수장인 진개가 마공을?
무엇보다도 성검문 무인들은 자신들이 아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걸 무리는 단지 여섯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성검문 전체가 달려들어도 이길 수가 없다. 아걸이 누군가? 탕산 절혼곡에서 이십사 위문 무인 천여 명과 싸워서 이긴 자가 아닌가. 공부 외에 누가 그를 상대할 수 있나.
무인들이 오도 가도 못 하고 쩔쩔맬 때, 성검문에서 사구정이 뒷짐을 지며 나타났다.
사구정은 이미 아걸에 대한 말을 들었다. 은거무인들이 나타난 사실도 안다. 그들이 진개를 업고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이제는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성검문 대문을 나서자 당장 두 부류 무인들의 대치 상태가 보였다.
“물러서라.”
사구정이 물러서도 좋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성검문 무인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포위망도 완전히 풀어버리고 완전히 물러섰다.
저벅! 저벅!
아걸은 환히 뚫린 길을 걸어갔다. 그 뒤를 은거 무인들이 바짝 뒤쫓았다.
사구정은 아걸에게는 관심 없다는 듯 혈무대를 점검했다. 기둥도 살피고, 계단도 구석구석 만져봤다. 진개가 업혀 있지만, 철저히 무시하는 모습이다.
척!
아걸은 혈무대 위로 올라섰다.
은거 무인 네 명은 혈무대 밑에서 주위를 경계했다. 진개를 업은 황열만 아걸과 함께 혈무대 위로 올랐다.
혈무대는 결전을 벌이는 당사자만 올라설 수 있다. 하지만 황열은 아걸의 보조 자격으로 올라섰다.
“공부님, 납십니다!”
성검문 안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활짝 열린 대문 너머로 청삼을 입은 허도기가 보였다.
사람들은 묵묵히 지켜봤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일제히 함성이 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걸이 한 말이 있다. 마공을 수련한 듯한 진개가 황열 등에 업혀 있다. 변명이든 뭐든 허도기가 한마디 해야 한다.
허도기를 쳐다보는 초도성 주민들의 눈에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정말 진개가 마공에 손댔나? 성검문에서 마인이 나온 것인가?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아냐, 그럴 리 없어. 소축십검이 마공을 수련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조명십해는 어떤 무공보다 강한데 마공이라니.
저벅! 저벅!
허도기가 성문을 나와 혈무대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