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七章 만사무휴(萬事無休) (5)
‘강하다!’
아걸은 숨이 턱! 막혔다.
허도기를 보는 순간 오르지 못할 태산이 눈앞에 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이제 이 정도면 허도기와 싸울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을 가졌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고 자신한다. 이 정도 칼이면 일홀도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고, 이제는 서리 성을 써도 괜찮을 것이라고.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인간이 건널 수 없는 격전을 치러왔다. 이십사 위문 고수들, 동영 군단, 허도기와 반 초 차이라는 동영 두주도 이겼다.
이 정도면 허도기에게 근접하지 않았나.
그런데 정작 호두기와 대면하자 한껏 들끓던 투지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자신이 티끌만큼 움직였다면 허도기는 한 뼘 정도 늘어났다. 자신이 일 장 정도 나아갔다면 허도기는 백 장을 달려갔다. 분명히 차이가 있다.
단지 기도만 보고 상대의 무공을 판단하는 것은 바보짓일 것이다.
맞다. 섣부르게 예단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알면서도 예단이 된다. 허도기가 너무 강해서 이번 싸움도 질 것이라는 느낌이 확 일어난다.
하지만 허도기는 꺾어야 할 검이다.
허도기가 불구대천지수라서가 아니다. 솔직히 허도기가 가족을 죽였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겠지만, 당시에 죽은 형들이 누군지도 모른다. 허도기가 가족을 죽였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한다.
허도기에게는 형들을 죽인 원한보다는 사부를 해한 원한이 더 깊고 크다.
사부와 허도기가 정정당당히 대결을 벌였다면 누가 죽어도 원한이 남을 리 없다. 일홀도가 조명십해에게 졌다면 그것으로 무림의 한 획이 그어진다.
허도기는 사부를 암산했다.
무인이라는 자가 이길 수 없다 싶으니 독을 썼다. 그것도 사제 간의 정리를 배신하게 하면서. 그 일 때문에 두 사형은 평생 무인이라고 칭하지 못했다.
형 세 명을 죽인 원한보다 사부를 죽인 원한이 깊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적인 원한도 뒤로 남겨둘 수 있다. 일홀도는 반드시 조명십해를 꺾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허도기를 넘어서 또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 언제까지 허도기라는 벽에 가로막혀서 머뭇거릴 셈인가.
씨익!
허도기가 혈무대로 올라서며 웃었다.
아걸은 미묘하게 눈살을 좁혔다.
‘이 정도면 됐다’라는 자만심을 버린다. 무인이 ‘자족(自足)’했다는 사실이 창피하다.
아걸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걸 같은 경우, 실수를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자만감이 떨어져 나간다. 고요함, 청정함, 평정심이 일거에 몰려들면서 도신일체를 이뤄준다.
저벅! 저벅!
허도기가 걸어왔다.
그는 거침없이 진개에게 다가왔다.
진개는 아걸을 위해 준비해 놓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황열이 옆에 서서 단단히 지키는 중이지만…… 허도기가 걸어오자 옆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쯧!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 끌고 다니고. 정도니 마도니를 떠나서 사람부터 돼야지. 이런 짓을 하면서 정도를 들먹이며 뭐하나? 쯧!”
허도기가 혀를 찼다.
진개가 분뢰절맥이라는 마공을 사용하다가 주화입마했다는 내용을 알고 있다. 아니, 그런 주장을 하는 아걸을 탓하는 듯한 말투다. 정도, 마도를 따지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이다.
스읏!
허도기가 손을 내밀어 진개의 목동맥을 짚었다. 그리고 이어서 눈꺼풀도 뒤집어 봤다.
지극히 태연한 모습이다.
진개는 분명히 분뢰절맥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하아! 어쩌다가…… 차라리 검에 맞고 쓰러지지. 소축십검이 풍을 맞다니.”
허도기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도기는 주화입마도 아니라고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뇌혈관이 터진 것, 풍을 맞았다고 한다. 분뢰절맥은 아예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다.
“설마 사부라는 사람이 제자가 분뢰절맥을 수련한 사실조차 몰랐다는 겁니까!”
옆에서 허도기의 행동을 지켜보던 황열이 차갑게 물었다.
“누군가?”
허도기가 되물었다.
그는 황열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지 모른다는 투로 묻는다. 황열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
“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죠. 진개가 분뢰절맥을 수련했다는…….”
“갈(喝)!”
황열이 말하는 도중에 느닷없이 허도기가 일갈을 내질렀다.
황열은 허도기의 일갈에 호흡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방금 내지른 일갈에는 섬뜩기는 진기가 실려있다. 단숨에 황열의 단전을 후벼판다.
움찔!
황열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허도기는 잠시 황열을 노려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것이 분뢰절맥이라. 후후! 하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그럼 어디…… 중원제일도의 안목은 어떨까? 자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
허도기가 아걸을 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아걸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개는 틀림없이 분뢰절맥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이 마공이 아니라는 건가?
그때, 허도기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합장했다. 그리고 진기를 끌어냈다.
꾸르르릉!
전신에 집중된 힘이 혈무대를 흔들었다.
순간, 허도기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불끈 치솟았다. 징그러울 정도로 툭툭 솟구쳤다.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었고, 피부는 잘 익은 홍시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분뢰절맥! 분뢰절맥이다!
스슷! 스스슷!
허도기는 손을 내려 천천히 검을 뽑았다.
검에서 뿌연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수증기 같은데…… 무언가 실 같은 것이 가물가물 피어났다. 하지만 수증기는 검 주위를 맴돌 뿐, 허공으로 흩어지지는 않았다.
“화, 화염미천공(火焰彌天功)!”
결전을 구경하러 왔던 무림고수 중 누군가가 떨리는 음성으로 경악을 토해냈다.
“화염미천공?”
“화염미천공이라는 무학도 있었나?”
많은 무인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대다수 무인이 화염미천공을 알아보지 못했다.
쑥!
허도기는 진기를 풀고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방금 화염미천공이라고 경악성을 외친 사람에게 손짓했다. 혈무대 위로 올라오라는 뜻이다.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앗! 저분은…… 소림(少林) 운곡(雲谷) 장로님, 맞지?”
“맞아. 운곡 장로님이야.”
사람들이 허름한 승복을 입고 있는 노승을 알아봤다.
노승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림사에서 장로를 맡고 있던 운곡 선사다. 지금은 금분세수(金盆洗手)를 하고 무림에서 떠났으며 오로지 참선을 하며 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곡 선사는 오십이 안거(安居)를 났다. 십삼 년 동안을 수행에 용맹정진했다는 뜻이다.
운곡 선사가 차분히 혈무대 위로 올라왔다.
허도기는 합장 배례하며 손을 들어 혈무대 밑을 가리켰다.
무지한 사람들에게 화염미천공에 관해서 설명을 해주십사 하는 부탁이다.
운곡 선사가 합장한 후, 민초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미타불! 성검문 허장하(許獎霞) 문주의 방하무공(放下武功)이 화염미천공입니다. 아미파(峨嵋派) 고염(藁琰) 사태께서 허문주님의 영특함을 어여삐 여겨 선물한 무공으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요?”
운곡선사가 허도기에게 물었다.
“맞습니다.”
허도기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방하무공이란 본문의 무공이 아닌 외부의 무공을 일컫는다. 허장하 문주는 허도기의 부친이다. 당연히 전대 문주인 허도강의 부친이며, 성검문 전전대 문주다.
성검문 전전대 문주를 어여삐 여길 정도라면 아미파 고염 사태는 적어도 백 년 이전 인물이다. 관계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지 못한다.
대체로 방하무공은 후대에 전수하지 않는다. 당대에서 수련하고 단맥시킨다.
“문주께서 화염미천공을 알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운곡 선사가 정중하게 말했다.
“선사께서는 화염미천공을 어떻게 아시는지요? 저는 현 무림에는 아는 분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운이 좋아서 화염미천공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허장하 문주님께서 화염미천공으로 황하(黃河) 수적(水賊) 만통방(萬通幫)을 궤멸시키셨죠. 당시 만통방의 세력이 워낙 강성해서 무림 연합이 결성되었을 때라, 빈승도 참가했습니다.”
“아!”
“그러면 그렇지!”
여기저기서 탄성이 울렸다.
성검문이 무림 연합을 주도하여 만통방을 궤멸시킨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당시 성검문주의 무공을 본 사람도 많다. 운곡선사 한 명만 본 것이 아니다.
대부분 나이가 들어서 거동이 불편할 것 같은데…… 세수가 여든이 넘은 사람이었다면 그때 일을 기억할 것이다.
“본문의 졸공(拙功)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도기가 두 손 모아 읍했다.
운곡 선사는 묵묵히 합장하고 혈무대에서 내려갔다.
“진개를 본문으로 데려가라! 풍 맞은 사람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짓은 사람 할 짓이 아니다!”
허도기가 차갑게 말했다.
그러자 사구정이 조용히 올라와서 진개를 업었다.
황열은 사구정을 막지 못했다.
진개가 펼친 무공은 분뢰절맥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화염미천공으로 둔갑해 버렸다. 화염미천공과 분뢰절맥의 차이점을 말하지 못하는 한 허도기를 막지 못한다.
억지로 앞을 가로막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당장 허도기의 검이 날아온다.
명분에서, 무공에서 모두 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아걸이 황열에게 말했다.
황열은 어금니를 잘끈 깨물고는 혈무대에서 내려갔다.
“그러면 그렇지! 성검문이 마공에 손댈 리가 있나!”
“명부판관, 저놈! 공명심에 눈이 뒤집혀서는! 잘 알아보고 혈첩을 던지든가 말든가 할 것이지!”
사람들이 당장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허도기가 품에서 붉은 서신을 꺼냈다. 아걸이 허도기에게 보낸 혈첩이다.
“이거 아직도 유효한가?”
허도기가 웃으며 말했다.
아걸은 입가에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유효하지.”
“아직도? 뭐가 더 남았을까?”
“이번에는 당신 양심에 묻겠어.”
“양심? 하하하!”
“이십여 년 전에 음산사마, 노궁인혼마 등이 성검문에 난입했는데, 어떻게 침투할 수 있었는지. 원음독진이 펼쳐지고, 비조침이 날았는데 그러는 동안 소축십검은 무엇을 했는지. 허문승, 허문학, 허문기의 무공이 그저 그런 마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정도로 약한 것인지.”
“네가 형님 핏줄이라는 말을 하고 다니는 줄은 알고 있다만…….”
아걸이 손을 들어 허도기를 제지했다.
“방금 말했잖아. 당신 양심에 묻겠다고. 날 설득할 필요는 없어. 당신 스스로 당신에게 대답하면 돼.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물으려고. 그 혈첩, 유효하지 않나?”
“후후!”
허도기가 혈첩을 찢어서 허공에 흩날렸다.
“우리는 이따위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이걸로 말해야지. 안 그래?”
허도기가 허리에 찬 검을 툭 건드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가 쓴 기록이다. 패자는 아무리 할 말이 많아도 쓸 수가 없다.
이 싸움에서 허도기가 이기면 명부판관은 설 자리가 없다.
아걸은 지금 말한 대로 화염미천공을 분뢰절맥으로 오인하고 허도기를 모함한 무뢰배에 간주될 것이다. 틀림없이 그렇게 기록될 것이다.
아걸이 허도기를 이긴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진개에게서 어떤 단서를 얻기는 틀렸다. 그는 성검문 안에 들어갔다. 그러니 지금쯤 모르기는 해도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사구정이 진개를 살려둘 리 없다.
진개의 시신은 완전히 소멸하여 흔적조차 찾기 힘들 것이다. 화장하든, 독에 녹이든…… 어떤 식으로든 완벽하게 시신을 없애버릴 것이다.
아걸은 다른 증거를 찾아야 한다.
증거를 찾지 못하면 이십 년 전 사건은 이대로 묻히는 것인가? 아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아걸이 한 점의 오염도 용납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증거를 찾기 전까지는 골육상잔을 증명할 방도가 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진다면…… 오염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증거를 조작하는 것은 간단하다.
이것이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는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
스읏!
아걸이 반철도를 꽉 움켜쥐었다.
스스슷!
허도기가 발검 기수식을 취했다.
허도기의 발검술은 기수식이 없다. 다만 검을 잡으려고 손을 허리춤에 댔으니, 그것을 기수식으로 여긴다.
순간, 초도성 전체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개미 기어나가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모두가 숨죽였다.
천하제일검과 중원제일도가 드디어 맞섰다.
명부판관이 어떻고, 혈첩이 어떻고, 마공이 어떻고…… 이런 이야기를 떠드는 사람은 없다.
지금은 오직 두 사람의 결전에 온 촉각을 곤두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