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587화 (587/600)

第百八章 망거목수(網擧目隨) (2)

‘틈을 보일 수 없어.’

감히 허도기 앞에서 잔재주를 부릴 수 없다.

허도기가 철옹성이라면 틈을 만들어야 한다. 일부러 허점을 드러내서 검을 끌어낸 후에 반격을 가하는 싸움은 어떨까? 그것도 시도해볼 만하다.

오음산이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틈을 보였다. 그리고 허도기는 거침없이 틈을 쳐왔다.

지금은 그런 싸움을 걸 수가 없다.

틈을 노리고 달려드는 일격을 피할 자신이 없다.

일부러 보인 허점도 허점이다. 분명히 틈이다. 허도기는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다. 그 검을, 공격해 올 부위가 어디인지 알고 있는데도 막아낼 자신이 없다.

스으읏!

아걸이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허도기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다.

허도기가 사람이었던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흔들린다. 검을 잡은 손도 미묘하게 떨린다. 실제로 손을 떨지는 않는다. 느낌일 뿐이다. 하지만 확신한다.

물론 허도기의 눈에는 자신도 같은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자신은 허도기의 손이 떨린다고 느끼는데, 허도기는 자신에게서 어떤 틈을 찾아냈을까?

스으으읏!

허도기의 손이 점점 검 쪽으로 다가간다.

확실히 허도기는 틈을 찾아냈다. 일 초 검공으로 몸을 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자신은 아직도 틈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데, 허도기는 이미 공격할 곳을 찾아낸 것 같다. 문제는 시간이다. 시기라고 할까? 언제 공격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틈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다. 이러다가 허도기가 공격해 오면 피해야 한다. 피할 수 없어도 피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공격은? 움직이다 보면 틈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차분히 기다리다 보면 공격할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누가 먼저 숨을 틀어낼까?

“후우!”

허도기가 숨을 멈췄다.

숨이 변화하기만 기다렸는데,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이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틈이다. 이 틈이 자신을 유인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틈은 틈이다.

슷!

반철도가 허공을 갈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공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틈이 열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공격하나. 그런데 한순간에 틈이 보였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펼치는 칼은 어떤 도초일까? 삼십육 문주의 도초 중 하나일까? 아니면 자신이 만든 일홀도일까? 그것도 아니면 칼의 힘을 빌린 자연도인가?

사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떤 칼을 쳐내고 있는지 알 리 없다. 어떤 초식을 그려내는지 알 바 없다. 한순간, 호흡이 터져 나오는 것을 봤고 몸이 따라서 움직일 뿐이다.

숨이 터지면서 턱이 떨렸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턱 밑이 보였다. 환히 드러난 목이…… 허도기는 사라지고 굵은 힘줄이 불끈 솟은 목만 보였다.

그러니 거리낄 것이 없다. 목을 노리고 칼을 쳐낸다.

파앗!

눈앞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 빛났다.

이 빛은 뭐지? 웬 빛이 칼 앞에서 어른거리지? 순간,

“컥!”

아걸은 거친 신음을 쏟아냈다.

이런 느낌, 잘 안다. 검에 맞으면 이런 통증이 일어난다.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듯, 번개가 머리끝에 떨어지는 듯……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진다.

‘맞았다!’

아걸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그의 신형은 이미 검력에 떠밀려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나가떨어지는 중이었다.

“엇!”

“터졌다!”

혈무대 밑에 있던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아걸과 허도기가 동시에 달려드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 빨리 달려들어서 움직인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 그들이 움직임을 보았을 때는 이미 승부가 결정 난 후였다.

반철도와 장검이 엇갈렸다.

장검이 반철도를 후려쳤다. 어디를 어떻게 배었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무엇인가를 베고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걸이 훌훌 나가떨어졌다.

반철도 역시 허도기를 후려쳤다.

어디를 쳤는지는 모르겠다. 허도기의 몸에서 붉은 핏줄기가 확 솟구쳤다.

양패동사(兩敗同死)!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몸에 병기를 작렬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졌다고 할 수가 없다. 동시에 치고 동시에 무너졌다.

“엇! 이렇게 빠를 수가!”

“어, 어디를 친 거야? 어디를 맞은 거지? 치는 것도 보지 못했어. 맙소사!”

무인들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그들 역시 고수다. 전 중원이 알아주는 절정 고수들이다. 그런데도 허도기와 아걸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순간의 격돌을 감지하지 못했다.

아걸은 뒤로 나가떨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치명타를 당한 듯하다.

허도기는 뒤로 네다섯 걸음이나 뒤뚱거리면서 물러섰다.

승자는 허도기다. 아걸은 쓰러졌는데, 허도기는 비록 한칼을 맞았을망정 아직도 굳건히 버티고 서있다.

한데…… 아! 아니다.

쿵!

허도기가 썩은 고목처럼 무너졌다. 그리고 꼼짝하지 않았다.

“엇! 저기 가슴!”

“공부도 상반신이!”

사람들은 비로소 두 사람이 어디를 어떻게 가격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걸은 오른쪽 가슴에서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상체가 길게 갈라졌다. 붉은 피가 개울물처럼 펑펑 쏟아져 나오는 중이다. 아마도 절명했을 것으로 보인다.

허도기가 비슷한 부위에 칼을 맞았다.

왼쪽 빗장뼈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길게 베였다.

허도기의 상처도 아걸 못지않게 깊다. 아걸보다 조금 더 버티다가 쓰러졌지만, 역시 절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 상처가 깊다.

아걸은 허도기의 왼쪽 옆으로 빠져나가면서 반철도를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왼 목을 목표로 칼을 휘둘렀다. 단숨에 내리치는 칼이었을 것이다.

한데 허도기의 검이 이상하다.

허도기는 발검과 동시에 베지 않았다. 머리 위로 검을 올렸고, 아걸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반철도와 장검은 같은 선을 따라서 흘렀다.

아걸은 오른쪽 상공에서 왼쪽 아래로 비스듬히, 허도기는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칼과 검이 마차 바퀴처럼 나란히 움직였다.

아걸은 도약하면서 시간 손해를 봤다.

아걸은 자신이 시간 손해를 보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대체로 도약해서 칼을 쳐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손해를 감수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허도기의 발검술이면 능히 아걸을 치고도 남았다.

그런데 허도기는 발검술을 쓰지 않았다. 발검과 동시에 격타를 하지 않고, 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허도기가 칼을 위로 쳐들면서 그도 아걸이 잃은 손해만큼 시간 손해를 봤다.

허도기가 일부로 손속을 늦췄다고는 볼 수 없다. 두 사람처럼 간발의 승부를 가릴 때는 누구도 여유를 부리지 못한다. 여유란 실력 차이가 압도적으로 벌어질 때나 부릴 수 있는 것이다.

허도기가 발검술을 한 수 늦춘 것은 두 사람의 거리가 검권 밖으로 벌어져 있어서 생긴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그다음은 빠름이다.

칼이 더 빨리 몸을 긋는가, 검이 더 빨리 베는가.

두 사람 중 누구라도 빨리 베는 쪽이 빠져나간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당한다.

같이 베일 염려는 없나? 있다. 아니, 이런 생각이 일반적이다.

대다수의 싸움에서는 대부분이 선후(先後)로 베이고 벤다. 먼저 베인 후에도 얼마든지 벨 수 있다. 그래서 베고 난 후에도 긴장을 풀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이 쏟아내는 검초, 도초는 일반적이지 않다.

도검에는 전신 진기가 밀집되어 있다. 검날에 종이만 스쳐도 밀집된 진기가 화약처럼 터진다.

병기가 닿는 순간, 벼락에 관통당하는 충격을 받는다.

벼락 맞은 사람은 모든 사고와 행동이 일시에 정지된다. 검이나 칼처럼 무게 있는 병기를 휘두르면 힘이 풀려도 관성에 의해 계속 쳐나가게 되어 있는데, 이런 관성력조차 죽어버린다. 그야말로 허수아비가 되어서 풀썩 무너진다.

일순격타(一瞬擊打)라고 한다.

일순격타는 특별히 수련하는 공부가 아니다. 허도기나 아걸 정도의 무인이 되면 저절로 검과 진기가 어울리면서 특정한 검기를 형성해 낸다.

검에 깃든 진기를 폭발적으로 터트리는 힘!

두 사람 모두 일순격타를 펼칠 줄 안다. 실낱같은 차이라도 자신의 칼이 먼저 닿으면 상대방의 공격은 한순간에 무력화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결과는 양패동사다.

동시에 살초가 닿았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일순격타를 쳐냈다. 두 사람의 진기와 초식 흐름, 그리고 반사신경, 싸움 감각까지 똑같이 작용했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맞다. 아무리 초절정고수라고 해도 두 사람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합치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말이 안 된다고 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물론 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둘 중 한 사람이 상대방의 일순격타를 이겨내고 계속 칼을 쳐낼 경우다. 벼락 맞은 사람이 벼락 맞는 순간에 이성을 멀쩡하게 유지한 채 앞으로 걸어가는 것과 같은 경우다.

일순격타의 충격을 이겨내고 계속 도검을 쳐내려면 집채만 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힘이 필요하다. 장정 백여 명이 밀어내는 힘을 한 손으로 막으면서 계속 칼을 써야 한다.

전자로도 후자로도 혈무대 상황은 설명되지 않는다.

“아걸!”

황열이 재빨리 혈무대 위에 뛰어올라 아걸을 부둥켜안았다.

아걸은 축 늘어져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상반신은 피로 범벅이 되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황열은 급히 손가락을 목동맥에 대어서 피의 흐름을 살폈다.

피가 흐른다. 상당히 미약하지만 아직은 살아있다. 호흡은 거의 끊긴 상태이지만, 살았다고 확신한다.

“정신 차려! 정신!”

황열이 급히 손가락을 곧추세워서 상반신에 있는 요혈을 격타해 나갔다.

아걸 정도의 상처를 입으면 움직이는 것 자체가 무리다. 자칫 상처가 더 악화할 수 있다. 현재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구명 조처를 해야 한다.

허도기 쪽도 바쁘기는 매한가지다. 사구정과 의원들이 뛰어 올라와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는데, 상처를 수습하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여기 머물면 위험해!’

황열은 급히 주위를 쓸어보았다.

혈무대 주변에는 성검문 무인들이 쫙 깔려 있다. 그중 상당수가 오면서 부딪쳤던 적위군이다.

적위군이 눈에 살광을 머금고 혈무대를 노려봤다.

어쩌면 움직이기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면 아걸이 쓰러지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 올라왔어야 한다. 혹여 아걸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던 것이 실수다.

파앗!

황열이 급히 은거 무인들을 찾았다.

은거 무인들은 예정된 장소에서 대기 중이다. 물론 은거 무인 주위에는 성검문 무인이 두세 명씩 달라붙어 있다. 하지만 은거무인을 잡아두지는 못할 것이다.

황열과 은거 무인들의 눈빛이 교차했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황열은 아걸을 품에 안아 들고 즉시 혈무대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구경꾼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치료가 급하다. 하지만 더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더 급하다.

초도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적이나 마찬가지다. 악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무인이 상당수다. 그들이 상처를 입고 쓰러진 아걸을 얌전히 보내줄 리 없다.

‘여기로!’

문득,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가 급히 손짓했다.

황열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체, 그가 가리키는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낯선 자가 손짓을 하는데도 은거 무인들이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면 믿을 수 있는 자다.

촤촤촥! 촤촤촤착!

황열이 골목길로 접어들기 무섭게 뒤따라온 은거 무인이 재빨리 길목을 차단했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황열을 쾌속하게 신형을 쏘아냈다.

아걸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다.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데, 지금은 상처를 돌볼 여력도 없다.

하필이면 적진 한가운데서 싸움을 벌여서는.

“여기!”

골목길에서 낯선 자가 불쑥 튀어나오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적랑대는 이런 일에 익숙하다. 이들은 이미 이런 사단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서 준비해놓았다.

“의원은!”

“안에 모셔놨습니다.”

황열은 어떤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의원부터 찾았다.

아직은 초도성 안이다. 혈무대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적위군이 집집이 수색을 시작하면 금방 발각된다. 아니, 집주인이 먼저 고변할 수도 있다.

“휴우!”

황열은 낯선 자에게 아걸을 넘겨주면서 한숨을 토해냈다.

아직 아걸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의원 손에 넘기니 한결 안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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