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九章 유니몰아(有你沒我) (2)
“아! 잘 잤다.”
아걸은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두 시진을 잤는지, 다섯 시진이나 잤는지…… 금방 잠들었다가 막 깨어난 것인지 아니면 아주 피곤해서 날이 밝도록 늦잠을 잔 것인지 모르겠다.
얼마나 잤는지 느낌이 오지 않지만, 어쨌든 무척 상쾌하다. 온몸이 새털처럼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앗! 허도기!’
퍼뜩, 머릿속에 허도기와의 대결이 그려졌다.
아! 그랬지. 허도기와 싸웠지. 허도기에게 일격을 허용했는데 용케 살았네.
아걸은 검에 맞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검이 흐른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번쩍! 섬광이 터졌다.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검에 베인 후이다.
아걸은 당시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허도기의 검은 한층 빨라졌다. 발검술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베어낼 수도 없고, 밀어낼 수도 없다. 일홀도에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절대 쾌검이다.
당시, 허도기는 일부러 허점을 드러냈다.
턱 밑 목 부분에 허점을 드러내서 아걸의 칼을 유인했다.
절대 고수의 싸움에서는 그 누구도 이런 짓을 하지 못한다. 일부러 허점을 드러내다니! 주먹으로 치고받는 싸움 같으면 실수를 한다고 해도 한 대 맞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도검 싸움은 다르다. 실수를 목숨을 빼앗긴다.
허점은 드러낸다는 것은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다.
허도기가 그 일을 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아걸을 유인했다.
아걸은 허도기가 보인 허점이 유인책이라는 점을 알고도 쳐들어갔다. 자신의 칼을 비켜내지 못하도록 만들면 된다. 허도기는 일단 방어 후에 공격해야 한다. 그러니 역공할 틈만 주지 않으면…… 방어 자체를 무너트리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분명히 허도기가 발검술을 펼칠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검이 터졌다.
자신이 칼을 내리치기 직전, 허도기의 검이 먼저 그어졌다.
온몸에 벼락이 관통했다.
전신이 용암 속에 던져진 듯 뜨겁게, 매우 뜨겁게 활활 타올랐다. 피가 끓고 살이 탔다. 전신 신경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살이 타들어 간다는 느낌은 어떤 뜻인지 안다. 검이 몸을 베고 있는 현상이다. 그런 극통이 몸 전체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허도기의 검이 순식간에 몸 전체를 헤집어버렸다는 거다.
말도 안 되는 검초다. 말도 안 되는 빠름이다.
‘그 검을 맞고도 살았네.’
부르르르!
아걸은 치를 떨었다.
솔직히 말하면 검을 맞는 순간에도 당하는 줄 몰랐다. 뜨거운 격통이 휘몰아친 다음에야 뭔가 잘못되었다, 맞았다 하는 느낌이 퍼뜩 일어났다.
그 외에 별다른 느낌은 없다.
검을 맞자마자 바로 정신을 잃었다.
흔히 하는 말로 몸이 쓰러지기도 전에 죽음이 찾아왔다. 검초가 그만큼 빨랐다.
허도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는 무사할 것이다.
자신의 칼은 허도기에게 닿지 않았다.
자신의 칼에는 일순격타의 묘리가 깃들어 있다. 칼이 몸에 닿기만 하면 허도기는 진기를 모두 잃어버린다. 칼이 닿는 충격으로 진기가 소실된다.
허도기의 검 역시 마찬가지다.
허도기의 검에는 아걸의 진기를 말끔히 지워버릴 수 있는 일순격타가 담겨있다.
두 사람은 그만한 묘리쯤은 모든 공격에 담을 수 있다.
한데 허도기의 검이 먼저 닿았으니…… 자신의 칼은 무위로 그쳤을 것이다.
분명히 반철도는 턱 밑을 베지 못했다.
허도기가 방어 후에 역공을 취해 올 줄 알았는데…… 방어 없이 곧장 역공을 취해왔다.
허도기의 발검술이 일홀도를 훨씬 압도했다. 허공을 그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났을까? 허도기가 일부러 놓아주었을 리는 없다. 혈무대에서 본 허도기의 눈빛에는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의가 엿보였다.
‘후후! 눈을 뜨면…… 어휴! 몽설에게 잔소리깨나 들을 것 같은데. 그래도 보고 싶어.’
어떻게 살아났는지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 허도기가 자신을 왜 놓아주었는지.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면 혈무대에 쓰러진 자신을 꺼내올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걸은 그만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한데…… 일어설 수가 없다!
눈을 뜨려고 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몸! 몸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누워있는 것인지, 앉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혈무대에 쓰러져 있는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몸에 다른 물체가 닿는 감촉은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다. 검이 너무 깊게 틀어박혀서 감각을 잃어버린 것인가?
‘혹시…… 죽은 거 아냐? 내가 죽어서 구천을…… 에이, 그럴 리 없어. 이렇게 멀쩡한데.’
아걸은 이를 악물며 일어서려고 했다. 한데, 몸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니, 몸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정말 죽은…… 건가?’
죽음!
칼을 들 때마다 어느 한시도 잊지 않는 말이다. 대결을 앞두면 반드시 죽음이 떠오른다. 하지만 죽음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영원히 의식하지 못하고, 몸도 굳어버린 상태를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이런 게 죽음인…… 가? 정신은 멀쩡한데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몸이 없어. 그저 생각만 어딘지 모를 곳을 둥둥 떠다녀.’
이렇게 암흑 상태에서 생각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생각도 어딘가로 흘러갈 것이다. 아니면 점점 스러지다가 완전히 소멸해 버리던가.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은 죽었지만 아직 저승 속으로 들어서지는 않았다는 뜻일까? 설마 이게 영혼이 승천하지 못하고 원귀가 되어서 구천에 떠돈다는 건가? 그럼 내가 원귀? 이렇게 생각만 존재하는 게 원귀 상태인가?
아걸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죽었는데…… 살았을 때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이 너무도 생생하게 생각난다.
일가족을 남겨두고 죽어가는 사람은 가족이 살아갈 것을 걱정한다. 그럴 때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고. 죽으면 그만인데 왜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냐고.
틀린 말이다. 죽었는데도 이토록 생생하게 생각나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허도기의 검은 몽설을 향할 것이다. 황제를 향할 것이며, 조위 대장군을 향할 것이다.
백살도축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어쨌든 처절한 피바람이 불 텐데, 몽설이 그 검들을 잘 받아낼 수 있을까?
물론 걱정한다고 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생각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걱정이 되는 것을 어떡하나.
희한한 것은 허도기는 이제 더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허도기 검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랐지만, 이제 자신과는 무관한 검이 되어 버렸다. 마찬가지로 일홀도 역시 더는 생각나지 않는다. 잊어버리는 일만 남았다.
이미 죽었잖은가.
두 번 다시 무공을 펼칠 일은 없다.
그때, 몽설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도 안 일어났네? 언제까지 누워있을 거야? 이럴 때 보면 정말 게을러.”
확실히 몽설의 음성이다. 죽은 자는 소리도 듣나?
“상처는 다 나았는데, 왜 안 일어나는 거지?”
‘상처가 다 나았다고? 무슨 말이야, 몽설?’
그런데 익숙한 음성이 또 들려왔다.
“그 빌어먹을 놈은 왜 또 닦아주냐? 그냥 내버려 둬도 돼. 누워 자빠진 놈에게 매일 세면을 시켜주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할배의 음성이다.
“그래도 깨끗해야죠.”
몽설이 말했다.
“그것참…… 안색은 제대로 들어왔는데 왜 깨어나질 않는지. 안색을 보면 멀쩡한데 말이야. 사혈이 베여도 상처가 아물면 곧 경맥도 이어지는 법인데.”
“사혈이 여섯 군데나 베였잖아요. 어쩔 수 없죠.”
“그만 씻겨. 허물 벗겨지겠어.”
“물로 닦는데 무슨 허물이 벗겨져요. 할아버지도 참.”
몽설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어 이건 무슨 소리 아걸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몽설과 할배의 얘기를 들어보니 몽설이 자신의 얼굴을 씻겨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죽지 않았다. 아직도 살아있다. 그런데 왜 몸이 느껴지지 않지? 몽설이 얼굴에 물을 끼얹고 있는데, 물로 씻기는 것이 아니라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있을 텐데 몽설의 손길은 물론이고 어떤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당했구나. 후후! 이래서 허도기가 놔줬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서?’
아걸은 실소를 흘렸다.
검!
아걸은 허도기의 검을 떠올렸다. 검이 몸을 그으면서 사혈을 그어냈다. 그 충격이 정신과 육체를 분리했고, 몸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했다.
아걸은 어떤 사혈이 베였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한다. 아픈 데도 없고 상쾌한 곳도 없다. 몸이 일절 느껴지지 않는데 어떤 감각을 느낄 수 있겠나.
일단, 눈을 뜰 수 없다. 촉각에 이어서 시각도 잃었다. 몽설과 할배의 말이 들리는 것을 보면 청각은 남아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니 신경도 잃은 것 같다.
냄새도 맡아지지 않는다. 은거 무인들이 들어왔을 때, 쌍겸이 씻지 않아서 냄새가 풀풀 날린다고 타박했는데…… 아걸은 어떤 냄새도 맡지 못했다.
미각도 잃었다. 황열이 익모초 즙액을 입안으로 흘려 넣었는데,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했다. 혹여 지독하게 쓴맛을 느끼면 정신이 들까 해서 복용시킨 것이다.
감각을 모두 잃고, 딱 하나 청각만 살아있다.
확실한 것은 아직 안 죽었다는 점이다. 아직 죽지 않았는데 몸을 잃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몸을 느껴야 진기를 일으키고 말고 할 텐데 아무 느낌도 없으니. 몸도 사라지고 진기도 사라져 버렸으니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아아아악!’
아걸은 입을 벌려서 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는다.
몸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놈아.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몽설이 지치기 전에 빨리 정신 차리는 게 좋아. 자칫하면 엄한 놈에게 색시 놓쳐. 몽설, 저것이 지금은 너만 보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 같아? 너도 알다시피 예쁘고 젊은 여자잖냐. 무공은 좀 높아? 뭐가 부족해서 네놈 병시중만 하고 있어.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나서서라도 시집 보낼란다.”
할배가 말했다.
‘나 깨어났는데, 깨어난 사실을 알릴 방도가 없네.’
아걸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어떠한 기척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눈을 떠서 할배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그런 움직임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생각만 빙빙 허공을 휘돌았다.
“일어날 거지? 잠깐만 누워있을 거지? 할배가 녹선마황을 여섯 항아리가 썼어. 그동안 정말 많이 기르고 있었는데 그걸 다 썼지 뭐야. 그거 아깝다고 얼마나 닦달하는지 알아? 나보고 약값으로 취화원 내놓으래.”
몽설이 이야기하듯 조곤조곤 말했다.
“내가 할아버지 손주 아니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여자와 정나서 떠난 놈은 손자가 아니래. 무조건 돈 내놓으래. 빨리 일어나서 할아버지 혼 좀 내줘.”
몽설의 음성은 매우 편안했다.
“정신은 없지만 그래도 내 목소리 들리지? 조위 대장군이 암살당하셨어. 기어이 그렇게 됐네.”
조위 장군에 대한 일, 세외칠국이 요동치고 있는 상황…… 그녀가 들은 이야기가 환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날, 허도기가 같이 쓰러졌어. 그 싸움 양패야. 내가 보기에는 허도기가 먼저 친 것 같은데, 맞지?”
‘맞아.’
“가가도 대단해. 허도기 검을 맞고 어떻게 계속 칠 수 있어? 어쨌든 두 사람이 같이 쓰러졌으니 양패동사야. 천하제일검과 중원제일도가 같은 경지라고. 오빠가 진 게 아냐. 훌륭해. 이건 칭찬이야.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칭찬.”
몽설이 아걸을 칭찬했다.
그녀는 또 다른 말도 했다.
“정 힘들면 모든 미련 다 놓고 그냥 가. 억지로 버틸 필요 없다고.”
‘넌 어떻게 신랑보고 죽으라고 하냐? 악착같이 버티라고 해야지. 안 그래? 하하!’
몽설에게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다.
“그냥 가. 뒷일은 내가 마무리 지을게. 허도기가 아직 혼수상태라는데, 아무래도 깨어나지 않았나 싶어. 성검문이 알게 모르게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거든.”
아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든 몸을 찾아야 한다. 이대로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는 없다. 허도기가 일어났다면 모두 위험하다. 제일 먼저 몽설과 할배가 위험하다.
‘일어나야 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양패동사. 내 칼에 허도기가 쓰러졌다. 후후! 많이 발전했네.’
아걸은 차분했다. 몸이 느껴지지 않으니 도법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바동거릴 필요가 없다.
생각만으로는 무공이 발전하지 않는다. 놀라운 무리를 깨닫더라도 몸에 습득시켜야 한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 무리는 아무짝에도 쓰지 못한다.
아걸은 지금까지 사용한 도법을 다시 살펴봤다.
허도기의 쾌검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의 칼이 허도기처럼 빠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일홀도로 허도기의 쾌감을 쳤지 않나. 허도기처럼 빠르지 않아도 양패를 일으켜 냈다. 그렇다면 다시 싸워도 똑같다.
허도기의 빠름은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완벽함만 생각하면 된다.
아니, 허도기와의 싸움은 이미 염두에서 떠났다. 지금 생각하는 것은 싸우는 것이 아니다. 도법 그 자체의 완성이다.
내가 지금껏 이런 도법을 구사해 왔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더 빠르지 않을까? 더 완벽하지 않을까? 아니, 쉽고 편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모든 싸움, 모든 무인의 행동을 돌아보면서 도법을 가다듬는다.
아걸은 일홀도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의식이 있는 시간을 모두 일홀도 연구에 집중시켰다. 몸을 쓰지 못하니 할 일도 없다. 하루 몇 시진인지도 모를 모든 시간을 일홀도에 집중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
몸을 느낄 때까지 오직 일홀도만 본다. 간간이 몽설과 할배의 음성을 들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