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九章 유니몰아(有你沒我) (3)
초도성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소축십검이 성검문을 다스릴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아니 훨씬 더 많은 무인이 초도성에 발을 디뎠다. 그들은 한결같이 성검문으로 달려갔고, 문주를 뵙겠다고 명첩을 내밀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검문주를 만나겠다는 거다.
성검문주 허도기는 혈무대 싸움에서 쓰러진 후 아직도 혼수상태다.
문주 부재 시에는 소축십검이 문주 대행을 했는데, 유일하게 문주 대행을 할 수 있는 진개마저 혼절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식적으로 현재 성검문주는 부재(不在)다.
그런 사정을 얘기하면 무인들은 임시 문주라도 만나겠다고 사정한다. 현재 성검문이 우환 중이니 나중에 찾아와 달라고 말해도 듣지 않는다.
무림은 살아있는 생물이다.
뜨거운 피가 항시 혈맥을 타고 항시 흐른다. 무림에 흐르는 피는 희한해서 누가 길을 막아도 막히지 않는다. 인간의 혈맥은 무엇엔가에 막히면 터지지만, 무림의 혈맥은 장애물이 나타나면 뚫어내거나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서 새로이 길을 만든다. 절대 막히거나 터지는 일이 없다.
무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무림 전체가 터진 적은 없다. 무림의 주인이 아무리 바뀌어도 무림은 여전히 건재하다.
무림은 허도기가 쓰러진 상황에서 다른 길을 찾았다. 어떤 길인가? 역시 성검문이다. 최종적으로 무림의 운명이 성검문 허도기 손에 달렸다고 판단했다.
아걸은 쓰러져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허도기 역시 쓰러졌지만, 지금은 깨어났다고 본다. 아걸만큼 심하게 당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향후의 무림은 허도기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니 성검문에 모여들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부터는 성검문에 줄을 대야 한다.
“화산파 당주(堂主) 정중명(鄭仲明)입니다. 제 사제가 여기 봉공으로 머물고 있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가시죠.”
“봉공을 만나러 온 김에 문주님도 뵀으면 하는데.”
“문주님은 지금 혼수상태라서…….”
“알고 있습니다. 무림 동도의 한 사람으로 병문안이라도 드릴까 해서요.”
“이해해 주십시오. 문주님께서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해서 누구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성검문 무인은 찾아온 군웅들을 최대한 정중하게 맞이했다.
화산파 당주 정중명은 성검문 봉공 오유한(吳留邯)을 만나러 왔다. 화산파에서 같이 수학한 동문이니 얼굴이나 보겠다고 찾아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면 화산파의 오유한은 왜 화산파를 떠나서 성검문 봉공이 된 것인가?
그가 괜히 봉공으로 있는 게 아니다. 성검문에 줄을 대고 있는 것이다.
지금 같은 경우, 화산파는 오유한을 핑계로 성검문을 방문할 수 있다. 매우 자연스럽게, 어떤 장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검문 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정중명도 사제나 만나자고 성검문을 방문한 게 아니다.
그는 화산파 장문인의 명을 받들어서 왔다. 사제 오유하는 만나지 않아도 임시문주는 만나야 한다. 만약 허도기와 직접 대면할 수 있다면 임무 이상을 달성한 것이다.
“하북 팽가의 팽도숙(彭塗琡)입니다.”
“아! 소가주님이십니까?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성검문 무학을 견식 하고 싶어서 왔는데…….”
“죄송합니다. 지금 무학을 보여드릴 만한 분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분위기만 봐도 도움이 되겠죠. 며칠 묵었다가 갈까 하는데.”
“죄송합니다. 웬만하면 길을 내드리겠지만 지금은 보시다시피 객방이 꽉 차서. 둘러보고 나오시는 건 괜찮습니다만 머무실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러네요. 정말 많은 사람이 왔네요. 그래도 뭐 여기까지 왔으니까 검기는 느껴야겠죠?”
오대세가 하북팽가의 소가주가 성검문에 발을 들여놓았다.
소가주쯤이나 되는 사람이 괜히 찾아왔을까? 아니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찾아왔다.
무림은 혈무대 싸움의 승자로 허도기를 지목하고 있다.
둘이 모두 쓰러졌으니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이긴다. 무림은 먼저 일어나는 사람을 허도기라고 본 것이다. 양쪽 모두 생사불명이지만, 허도기 쪽에 더 승산이 있다.
무림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아걸 쪽에 달라붙어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걸이 어떤 상태인지는 짐작할 수 있다. 검을 맞는 모습만 보고도 생사 정도는 가늠할 수 있다.
성검문 쪽은 더 정확히 판별한다.
성검문에는 공봉들이 깔려 있다. 그들이 본문에 소식을 전한다.
허도기가 정말로 혼수상태라면 성검문 무인들의 안색이 침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의 안색은 밝다. 발걸음도 가볍다.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성검문이 무척 냉정하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이는 허도기가 무사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공봉들은 바로 이런 부분을 탐지해 냈고, 즉시 본문에 연락을 취했다.
무림 각문파가 성검문을 방문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보를 취합한 결과다.
휘이잉!
대청에 차가운 바람이 들이쳤다.
사방 문을 활짝 열어놓아서 다소 춥게 느껴지는 바람이 거침없이 들이쳤다.
문을 열어놓는다는 것은 대청 안의 모습을 공개한다는 뜻이다.
대청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떳떳하다. 어떤 은밀한 일도 진행하지 않는다.
대청 한가운데 의자에는 총관 송옥신(宋玉臣)이 앉아있었다.
물론 그는 임시 총관이다. 허도기가 성검문을 재정비하면서 인적 구성도 완전히 물갈이했는데, 그때 운이 닿아서 총관 자리에 앉게 되었다.
물론 임시로 자리를 맡겨놓고 지켜보는 중이라는 점은 알고 있다.
맡은 일을 잘 해내면 계속 총관을 맡을 수 있고, 실수하거나 능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즉시 해고된다.
그러던 도중에 허도기가 쓰러졌다.
저벅! 저벅!
대청 안으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무인이다. 얼핏 봐도 매우 강맹해 보인다. 군살 없이 근육으로만 몸을 만들었다.
“새로 야천을 이끌게 된 야천대방 패도참살(覇刀斬殺) 이위성(李委惺)입니다.”
그가 총관 송옥신에게 두 손 모아 읍했다.
“야천대방께서 무슨 일로?”
“성검문에 충성하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런 말씀은 문주님께 하셔야죠. 제게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주님을 뵐 수가 없어서 총관님을 찾아왔습니다.”
야천대방은 이름도 없던 자에게 허리를 숙였다. 성검문 총관이라는 위치에 허리를 숙인 것이다.
“저는 한낱 총관일 뿐입니다. 잡다한 일을 처리할 뿐 무림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총관 송옥신이 차분하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언제든 문주님이 깨어나시면 오늘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그러죠.”
송옥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칠(七). 야천대방 패도참살 이위성.
송옥신은 우측에 놓여 있던 장부에 방금 충성 맹세를 한 야천대방의 이름을 적었다.
야천대방이라면 최소한 백만 명 위에 군림하는 총수다. 그런 자가 이름도 없던 자신을 찾아와 포권했다. 물론 성검문 총관에게 포권했다.
야천대방은 총관이 형편없는 술주정뱅이라고 해도 포권을 취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와서 충성을 맹세한 일곱 번째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하북팽가의 소가주 팽도숙 밑에 적혔다. 여섯 번째로 찾아온 인물이 팽도숙이다.
무림이 성검문을 향해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 * *
“허도기가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이 지경인가? 그러면 정작 허도기가 깨어나면 대책이 없다는 거네.”
몽설이 말했다.
취화원의 세력은 상당히 커졌다. 문도도 많이 불어났다. 하지만 취화원은 모래 위에 지은 성이나 다름없다. 성검문이 제대로 용트림을 하면 단숨에 무너진다.
“그동안 허도기가 비밀리에 쓰던 세력은 두 군데예요.”
취운이 차분하게 말했다.
“야천과 마유.”
“네. 야천은 마유에 관리되고 있는데…… 야천대방이 직접 찾아갔다는 것은 마유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겠죠. 마유와 전쟁을 하지 않고 성검문을 찾아간 것도 허도기의 힘을 의식한 거고. 허도기가 허락해 줘야만 마유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뜻으로 읽으면 될 것 같네요.”
야천대방의 충성 맹세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하다. 야천은 실질적으로는 이미 성검문에 예속되어 있다고 봐야 하니까.
야천대방이 빙 돌려서 불만을 제기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야천은 손도 써보지 못하고 성검문에 넘어갔네. 야천을 성검문에서 빼내려고 참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몽설이 힘없이 말했다.
야천에 잠입해 있던 적랑대 간자들이 대거 살해되었다. 아걸이 죽인 사람도 많다. 야천을 전반적으로 아주 크게 뒤흔들었다. 그런데도 야천은 여전히 성검문 편이다.
절대 힘!
허도기는 ‘절대 힘’이다. 그에 비하면 아걸은 잠시 차갑게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다.
야천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니 대방이 성검문을 찾아가서 충성 맹세를 한 것이다. 만약 아걸을 ‘절대 힘’으로 봤다면 성검문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도기가 깨어났다는 증거가 없는데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니 정작 그가 깨어나면 무림은 신속히 재편된다. 허도기를 ‘절대 힘’으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앙복한다.
취운이 차분하게 말했다.
“야천 대방은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정작 중요한 사람은 사령인데, 사령이 보이지 않아요.”
“사령을 아직 못 찾았어요?”
몽설이 고개를 들어 취운을 쳐다봤다.
취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언니, 그럼 설마!”
“설마가 아니라…… 그럴 것 같아요.”
취운이 말했다.
취운은 몽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했다. 아니, 안다.
조위 대장군이 암살당했다.
조위 대장군을 죽인 자는 흑살이라고 했다. 흑살은 마유의 살수다. 사령이 보낸 자다. 사령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황상 곁에 스며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황상이 위험하다!
“이상한 점이 있어요. 조위 대장군을 죽인 칼은…… 대장군보다 황상에게 먼저 겨눠졌어야 해요. 지금 상황에서는 대장군은 중요하지 않죠. 황상을 무너트려야 해요.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대장군이 무너지는 시점에서는 황상도 쓰러졌어야 해요.”
황상을 쓰러트릴 길이 아직도 남아있나? 호황위를 맡으면서 암살 통로를 모두 막았는데…… 이제는 금군을 통하지 않고는 황상 곁에 이르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사령이 직접 움직였다면 방심하지 못한다. 마유를 이끄는 마인이라면 어떤 길이든 찾아냈을 것이다. 더욱이 허도기의 명을 받고 움직였다면…….
“조장군님이 암살당한 게 허도기가 쓰러진 후예요. 오고 가는 길을 생각하면 혈무대 결전이 있기 전에 명령이 떨어진 거죠. 만약 혈무대 싸움에서 허도기가 이겼다면……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났을 거예요. 상군도 쓰러지고, 장군도 쓰러지고, 황상도 암살당하고. 다행히 허도기도 같이 쓰러져서 황상이 살해되지 않은 것 같아요.”
“때를 기다린다?”
“예. 허도기가 일어났다는 확신이 들면 황상도 암살당할 것이라는 판단이에요. 암살 명령은 이미 떨어졌고…… 사령이라면 암살 통로를 열어놨을 거고요. 그런데도 아직 암살하지 않는 건 사령이 독단적으로 시기를 늦추고 있다. 전 이렇게 생각해요.”
“사령과 허도기 사이에 연락이 원활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허도기가 아직 일어나지 못했거나?”
“네.”
“음!”
몽설은 침음했다.
성검문이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다 무너진 것 같았는데, 어느새 다시 복원되고 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절대 힘’인 허도기가 있다.
결국, 허도기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이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내가 나서야 해.’
몽설은 이를 꽉 깨물었다.
아걸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 지금, 허도기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혈검으로 쳐야 한다.
허도기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를 영원히 잠재워야 할 필요가 있다.
“언니, 내가 가야겠어요.”
몽설의 말도 안 되는 말을 했는데…… 취운은 마치 이 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만류하지 않았다.
어차피 허도기가 일어나면 취화원은 무너진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잔인하게 짓밟힌다.
“제가 뒤를 받치겠습니다.”
취운은 만류 대신 동참을 선택했다.
“아니. 언니는 뒤에 남아서 취화원을 이끌어요. 성검문에는 월영 언니와 화요 언니의 도움을 받을게요. 성검문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어갈 길을 마련해 달라고 해요. 허도기에게 바로 가야겠어요.”
“허도기가 깨어나 있으면…….”
취운이 말끝을 흐렸다.
“싸워야죠.”
몽설이 차분히 말했다.
혈검 대 조명십해…… 허도기 상태가 어느 정도였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혈검이 질 것이다.
혈검은 아직 일홀도조차도 넘어서지 못했다. 비록 다오 푼 라야를 꺾고 동영의 유음류를 이겨냈지만, 아직 일홀도에는 반 초가 모자란다. 조명십해에는 한 초 차이가 벌어질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식별도 안 되는 차이이지만 고수들 간에는 어른과 어린아이만큼이나 큰 차이다.
몽설은 성검문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허도기가 혼수상태라면 암살할 수 있겠지만 만약 깨어있다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만류할 수가 없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취운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길을 열라고 지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