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九章 유니몰아(有你沒我) (5)
생각이 뚝 끊어졌다.
할 수 있는 게 생각뿐이라서 온갖 생각을 이어왔는데, 어느 한순간이 되자 모든 생각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생각이라는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았다.
몇 날 며칠이고 생각을 이어가봤자 바뀌는 것은 전혀 없다. 일홀도를 가열하게 생각해 봤자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그러자 생각도 사라졌다.
그렇다 포기했다.
아걸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숨만 붙어 있지 몸은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인간 상태다. 그 상태가 너무 심해서 누가 몸을 만지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아걸은 몽설이 떠나가는 것도 알았다.
- 오빠, 잘 있어. 어쩌면 못 돌아올 거야. 오빠는 꼭 일어나야 해. 절대 이대로 무너지지 마.
몽설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틀어박혔다.
그녀는 아걸이 듣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아걸은 똑똑히 들었다.
몽설! 몽설! 몽설!
몽설을 목메어 불러보지만,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그녀가 허도기에게 간다면 틀림없이 돌아오지 못한다.
몽설이 왜 이런 판단을 했는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해야만 했다. 이렇게 찾아가는 일은 결단코 안 된다. 모르겠나? 허도기는 살아있다!
아걸은 한동안 애를 끌었다.
하지만 결국은 몽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왜 죽음은 찾아오지 않는 거지? 허도기의 검에 맞았을 때, 식물인간 상태가 아니라 정말로 죽었더라면 괜찮았을 것을.
죽은 것과 지금 상태가 뭐가 다른가.
몽설이 죽으러 간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가지 말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내가 대신 가겠다는 말도 하지 못한다. 떠나가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도 못했다.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한 삶!
일홀도를 백날이고 천날이고 연구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든 탐구는 정상적으로 깨어나서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의미가 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아걸은 삶을 포기했다. 그러자 생각도 끊어졌다.
‘차라리 죽었으면…….’
몸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생각까지 놓아버리자 암흑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아걸은 어둠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몸이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떠다녔다. 물컹거리는 물질 위에 올려진 것처럼, 수증기나 연기가 된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리면서 부유했다.
죽음이 가까이에 있다. 아니, 죽음은 멀리 있다. 몸을 잃은 상태이지만 죽지 않는다는 확신은 있다.
죽음은 어둠은 동질의 것이 아니다. 어둠 속에 있다고 해서 죽음이 가까이에 있지는 않다. 죽음은 저 멀리 있다. 자신은 살아있다. 단지 어둠 속에 몸을 담고 있다.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또 존재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 가물거린다.
삶을 포기하고 싶다. 이대로 묻히고 싶다.
빛이 간섭하지 않으면 어둠은 변하지 않는다.
가끔 어둠의 색이 보랏빛을 띠기도 하고, 푸른 빛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색깔들은 생각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생각이 이미 알고 있는 다른 색을 끌어들인 것이다.
어둠의 본래 색깔은 새까맣다.
새까만 색에서 변하면 안 된다. 변했다는 것은 생각이 작용했다는 거다.
아걸은 어둠에 물들어갔다.
최대한 깊이……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어둠에 물들어갈수록 죽음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어둠과 동화되는 것뿐이다. 이것만이 그를 죽음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
조금이라도 검은색이 변색된다 싶으면 ‘아! 내가 생각이란 것을 하고 있구나’하고 자각한다. 그리고 즉시 생각을 놓아버린다. 어둠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실제로 어둠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온다.
어둠을 본다. 어둠의 색이 변질하는지 본다. 생각이라는 빛이 어둠을 변질시키지 않도록 어둠 속에 침잠에 들어간다.
이러다가 숨이 끊어지면 정말로 좋겠다.
“몽설을 일단 만류해 놨다. 성검문에서 소식이 들어왔는데…… 허도기는 일어났단다. 일어난 지 좀 됐다는데……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고. 내 생각에는 깨어났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할배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전갈을 보냈다. 내 말이 들리냐, 이놈아! 혹시 들으면 빨리 깨어나라고. 휴우! 일어나지 못하는 너는 오죽하겠냐만.”
할배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걸은 할배의 말을 듣지 않았다.
청각은 차단할 수가 있다. 생각이 끊어지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막으로 들어온 소리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바람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소리는 들리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아걸은 어둠과 완전히 일체가 되었다.
파앗!
어느 순간, 번뜩 칼 한 자루가 세워졌다.
머릿속에 칼 한 자루가 세워졌다.
어둠에 완전히 물든 검은색 칼이다. 어둠과 칼이 분간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걸은 칼이 태어났다는 것을 안다. 어둠이 실질적인 칼이 되어서 나타났다.
니한궁에서 피어난 칼, 니환일도다.
몽설의 혈검이 아걸의 니환궁에서 탄생했다. 아니, 조금은 다르다. 몽설의 니환일검은 진기와 영혼의 합일체다. 하지만 아걸에게서 탄생한 칼은 어둠일 뿐이다. 아걸은 니환일도에 어떤 진기도 생각도 밀어 넣지 않았다.
어둠이 스스로 칼 한 자루를 탄생시켰다.
아걸의 진신(眞身)이 어둠 속에 녹아있으니 아걸이 탄생시킨 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걸은 니환일도를 지켜봤다.
니환일도가 어둠 속에서 출렁거린다. 물론 출렁거림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출렁댄다고 의식할 뿐이다. 어둠을 칼이라고 보면 칼이 되고, 그저 어둠이라고 보면 어둠이 된다.
쒜엑!
니환일도가 위를 향해 솟구쳤다.
칼이 위로, 위로, 위로 올라간다. 끝없이 위로 올라간다. 어둠 저편으로 떠나간다. 끝없이…… 무한한 공간 너머로 어둠을 타고 흘러간다. 순간,
콰앙!
아걸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어둠을 놓아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의식을 잃었다고 말한다.
아걸은 의식을 잃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잠깐 어둠을 보지 못했다가 다시 지켜본다.
츠으읏!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니환일도라고 생각한 것이 어둠 속으로 파묻혔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
그것 역시 생각이 작용한 것인가? 칼이 보인 것 같아서 잠시 지켜봤는데, 역시 생각이었군. 어둠에 묻혀야 해. 생각이라는 것을 놓아버리고. 아! 이것도 역시 생각이군.
그때,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응? 빛?’
난데없이 환한 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아걸은 문뜩 한 생각이 들었다. 어둠이 만들어 낸 칼, 니환일도가 백회혈(百會穴)을 꿰뚫었다. 지금 보이는 광명은 백회혈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세상의 기운이다.
올바른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빛에 대해서 잘 아는 느낌? 너무 익숙해서 몸의 일부가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니환일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백회혈에서 쏟아져 들어온 빛과는 전혀 상관없이 어둠 일부분이 어딘가로 흘러간다.
쿠웅! 쿵!
니환일도는 거침없이 장벽을 뚫었다.
아걸은 비로소 니환일도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것 같았다.
후정혈(後頂穴), 뇌호혈(腦戶穴), 아문혈(瘂門穴), 대추혈(大椎穴), 신도혈(神道穴)을 관통하고 있다.
독맥(督脈)을 따라서 내려간다.
무인치고 독맥의 흐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뜻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다. 니환일도가 독맥을 거꾸로 뚫고 있다. 회음혈(會陰穴)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와야 하는데,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다.
‘이래도 되는군. 경맥을 거꾸로 거슬러 내려갈 수도 있어.’
쾅! 쾅!
니환일도가 요란하게 혈도를 뚫어나갔다.
원래 혈도가 막혔던 것일까? 그래서 몸이 느껴지지 않았나? 아니면 경맥의 흐름을 거슬러 내려가기 때문에 저항이 심한 것인가? 혹시 부작용이 생기는 건 아닌지.
우려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지켜보길 얼마간…… 드디어 니환일도가 회음혈을 돌아섰다. 순간,
꽈직!
아걸은 낭심이 걷어채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칠 척 거한이 발로 낭심을 걷어차는 느낌? 아니, 철퇴로 후려치는 충격이다.
“크윽!”
아걸은 아랫도리에서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두 번째 의식을 잃었다.
천지현관(天地玄關) 타통(打通)!
천지현관 타통이란 임맥과 독맥의 연결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두 경맥의 교차점이 장애 없이 흘러서 하나의 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천지현관 타통은 하늘과 땅의 순환이 자유롭게 됐다는 뜻이다.
매우 거창한 말이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크게 별스럽지 않다.
말로는 타고난 자질이 있어야만 천지현관을 타통 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무림 밥을 십 년 이상 먹은 사람치고 천지현관 타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천지현관 타통은 자질보다는 노력이다.
진기 순환을 수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경맥이 서로 순환한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순환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 후부터는 일상생활을 할 때도 진기가 자연스럽게 순환하는 것을 느낀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진기가 순환한다. 의식적으로 진기를 일으키지 않아도 내공 수련이 이루어진다. 물론 집중하여 수련하는 것보다는 미약하지만.
무인에게 천지현관 타통이 굉장한 기회인 것은 틀림없다.
아걸도 열일곱 살 즈음에 천지현관을 타통 시켰다. 이제는 잠을 잘 때도 내공 수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뛸 듯이 기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천지현관의 타통이 아니었다.
진실한 천지현관의 타통은 무심(無心)에서 찾아온다. 고승이 득도할 때처럼 무공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을 때 조용히 찾아온다. 일부러 찾아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암흑이 찾아온다.
지금 아걸이 겪는 것, 이것이 천지현관 타통이다.
일순, 온몸이 어둠에 물든다. 진기 흐름이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몸이 바닷물 속에 잠긴 것처럼 붕 떠 있다. 아니, 정반대로 몸속에 바다가 들어찬 느낌도 든다.
내 몸이 작은 물방울이 되어서 바다에 흡수된 것 같은 느낌과 바다 전체가 응축되어서 내 몸 안으로 들어온 것 같은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이 동시에 일어난다.
스읏!
아걸은 눈을 떴다.
천지현관이 타통 되면서 잃어버렸던 몸이 찾아졌다.
첫 번째 충격이 울렸을 때, 백해혈이 타통 되는 순간에 몸이 돌아왔다. 몸에 충격이 가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몸은 이미 찾아진 것이다.
회음혈의 타통은 훨씬 거센 충격을 몰고 왔다.
그때는 의식이 어둠 속으로 침잠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의식을 잃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후우!’하고 긴 숨까지 토해냈다.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몸을 찾았다.
아걸은 눈을 떴다. 눈꺼풀이 위로 밀려 올라가면서 눈이 떠졌다.
깨끗하게 벽지가 발라진 천정이 보인다. 벽지가 발라져 있다는 것은 허름한 농가가 아니라는 거다. 몸을 덮고 있는 이불도 보였다. 매우 부드럽다.
침상 그리고 침상 곁에 드리워진 휘장.
잘 사는 집이다. 평범한 집은 절대 아니고 어느 정도 부를 갖춘 집이다.
스읏!
아걸은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후웁! 훕! 후우욱!
방문 밖에서 숨소리가 들린다.
호흡이 정제된 고수가 한 명, 약간 들뜬 호흡을 가진 중수가 일곱 명, 모두 여덟 명이 방문 밖을 지키고 섰다.
아걸은 일어나서 몸의 상태를 살폈다.
아무 이상이 없다. 어깨의 움직임이 편안하다. 팔도 잘 움직인다. 두 다리도 정상이다. 언제 몸을 잃었냐 싶게 아주 멀쩡하다. 오히려 힘이 넘친다.
옷자락을 펼쳐서 허도기에게 당한 상처를 살펴봤다.
끔찍하다. 몸을 완전히 포 뜨듯이 그어냈다.
‘이런 상처를 입고도 용케 살아났네. 나도 참 질긴 목숨이군.’
아걸은 쓴웃음을 흘렸다.
지금쯤 몽설은 허도기와 일전을 벌였을 것이다.
몽설의 말을 들은 후부터 몇 날이 지났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싸우고도 남았을 만한 시간이 흘렀다는 건 안다. 결국은 몽설을 구하지 못했다.
초도성으로 가자.
그녀의 시신만이라도 자신이 직접 수습해야 하지 않겠나.
스르르!
아걸은 미끄러지듯 걸어가서 방문을 열었다.
덜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