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600화 (600/600)

第百十章 아(哦)! 일홀도(一忽刀)! (5)

그의 이름은 세 개나 된다.

아걸, 서리흔, 허흔.

아걸은 ‘아걸’이라는 이름만 사용한다. 하지만 공식석상에서는 서리흔과 허흔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성검문주로 세상에 나설 때는 허흔, 일홀문주 자격일 때는 서리흔이 쓰인다.

그는 두 문파의 문주다. 그리고 한 문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비밀 직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는 논란이 있지만.

중원 최강의 문파인 성검문의 문주다.

중원 최강의 칼인 일홀문의 문주다.

또 중원 최강의 살수 집단인 취화원의 상부다.

아걸은 호황위 군주이기도 하다. 아니, 그가 호황위 군주라는 것은 황상의 일방적인 주문일 뿐, 아걸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논란이 있다는 거다.

황상은 승하한 황제가 아걸에게 진충도를 주었으니 그게 곧 호황위 군주라는 뜻이라고 우긴다. 그래서 아걸이 출사하지 않아도 매달 봉록을 하사한다.

아걸은 황상이 준 봉록을 모두 빈민구제에 썼다.

받지 않겠다고 해도 억지로 들이미는 데는 당해낼 장사가 없다.

호황위 군주라는 부분은 아직도 서로 ‘맞다’, ‘아니다’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승하한 황제는 이런 점까지 염두에 두고 진충도를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아걸도 진충도를 받아서 서랍에 넣을 때는 이런 경우를 예상했을 것이다.

서로 짐작하면서도 주고받았다.

황제는 미래의 불안을 넘겨주었고, 아걸은 황상의 마음을 받았다.

확실히 세상은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가 원하는 대로 기록된다. 없는 사실도 만들어 낼 수 있고, 있는 사실도 묻어버릴 수 있다.

성검문주와 대척하던 일홀문주, 명부판관이 알고 보니 조카였다는 사실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공표할 수 있다.

이미 중원 최강 무인인 아걸에게 성검문주라는 직위는 의미 없을지 모르지만, 무림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중심을 잡아줄 문파가 필요했다.

원래 무림은 살아있는 생물이다. 모든 문파가 독자적으로 자생해야 한다.

하지만 성검문이 워낙 강하게 이끌어나갔기 때문에 중원 무림은 그런 인도에 중독되었다. 반대로 자생력은 약해졌다. 오죽하면 야천이 무림을 넘보겠나.

당장은 성검문이 필요하다. 그래서 성검문주라는 직위도 받아들였다. 물론 성검문도 무림을 이끄는 문파에서 무공에 정진만 하는 문파로 탈바꿈할 생각이다.

아걸은 허도기가 저지른 과거의 참변을 묻어버렸다.

어머니를 자살로 몰아넣고, 세 형을 죽이고, 세 사형을 충동질해서 사부에게 삼인독을 먹이고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베어버린 만행을 묻어버렸다.

허도기가 저지른 악행을 말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허도기와 소축십검을 아주 강했던 무인으로 기억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허도기가 쓰러지기 전까지, 성검문은 철저하게 무림을 지배했다.

그 모습 그대로, 세상이 알고 있는 기억 그대로 내버려 둔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좋은 상태로 남아 있게끔 배려한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악행을 저질렀다.

찬탈하려고 사마외도를 이용했다. 그리고 이용한 자들을 가차 없이 죽였다.

정말 나쁜 짓을 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그런 만행이 들어있지 않다. 그들이 보여준 무공과 업적, 그리고 강호를 횡행하며 벌인 무수한 성과만 기억한다.

모든 것은 죽음에 덮였다.

황제의 말처럼…… 허도기가 죽자, 황제도 마음 편히 승하했다. 세외팔국도 언제 무슨 일을 벌였냐는 듯 소리 없이 물러갔다. 세상은 평온해졌다.

아무런 일도 없다.

몇 사람이 죽고, 성검문주가 바뀌었을 뿐이다.

* * *

‘헤레가’는 저주가 들린 마을이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헤레가로부터 십 리 안쪽으로는 발길을 들여놓지 않는다.

헤레가로 들어선 사람치고 살아나온 사람이 없다. 대다수가 죽어서 시신이 되어 강물에 떠내려온다. 그렇지 않으면 미쳐서 광인이 되어 나타난다.

살고 싶으면 헤레가로 들어서지 마라!

아걸과 몽설은 작은 소로를 걸었다.

협곡 안쪽으로는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다. 옛날에는 논이었던 듯싶은데, 헤레가에 저주가 내린 후부터 사람 발길이 뚝 끊겼다. 오죽하면 경작조차 포기했겠나.

협곡은 험한 바위산이다.

“정말 저주가 내린 거 같네.”

몽설이 말했다.

“무서우면 말해. 내가 보호해 줄게.”

“아휴! 고마워라. 내가 신랑은 잘 뒀다니까.”

“고맙지?”

“그런 말을 하고도 낯 간지럽지 않아? 요즘 날이 갈수록 얼굴이 두꺼워지는 것 같아. 호호!”

몽설이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여기 아닌가? 헤레가.”

협곡을 빠져나오자 사람들이 말한 황폐한 집터가 나타났다.

옛날에는 이삼십 여호가 살았을 마을로 보인다. 하지만 불이 나서 온 마을이 타버리고 사람들도 떠나버리자 지금은 을씨년스럽게 집터만 남았다.

폐허가 된 마을을 지나면 바로 헤레가가 시작된다.

“자신 있어?”

“또!”

“앗차! 다시는 말하지 않는다면서 또 하고 말았네.”

“그거 버릇이야.”

“이 버릇을 누가 만들었는데? 내가 원래부터 이런 버릇이 있었어? 누구 때문에 생긴 버릇인데 내 타박을 해? 내가 처음부터 이런 말을 했어?”

아걸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지?”

“내가 뭐라고 말했나? 난 그저…….”

아걸이 쭈뼛거렸다.

그러자 몽설이 아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기운 내. 천하제일도잖아. 뭐 이까짓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래.”

“기운 내도 될까?”

“너무 나대지는 말고. 조금만.”

“하하하!”

아걸이 환하게 웃었다.

몽설과 함께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이 즐겁다. 하루하루가 사는 것 같다. 그때,

쒜에에엥!

문득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저주받은 마을 안쪽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풍겨온다. 마치 칼날들이 곤두선 지옥 굴로 들어선 느낌이다.

“굉장한데?”

몽설이 눈빛을 번뜩였다.

“이만하면…… 조명십해를 능가할 것 같지 않아? 천축(天竺)까지 오길 잘한 것 같아.”

아걸은 눈빛을 번뜩였다.

헤레가는 저주받은 마을이 아니다. 누군가가 내뿜는 예기(銳氣)가 너무 강해서 일반 사람들이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무인의 예기는 악기(惡氣) 또는 흉기(凶氣)로 느껴질 수 있다. 누군가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극심한 정신적인 충격에 본인 스스로가 쓰러진 것이다.

사람이 살지 못할 정도로 강한 살기를 뿜어내는 자가 지척에 있다.

“가자.”

아걸이 앞으로 걸어 나가려고 했다. 그때, 몽설이 다급하게 옷소매를 잡아채며 말했다.

“자신 있지? 아! 미안.”

염려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소름 끼치는 살기를 접하자 자신도 모르게 걱정이 흘러나왔다.

“누구냐?”

깡마른 노인이 말했다.

헤레가에는 사람이 살았다. 깡마른 노인이다.

키가 작은 데다가 살이 뼈에 달라붙어 있어서 얼마나 늙었는지 나이조차 알 수 없다. 상의는 벗은 상태였고 얇은 천으로 아랫도리만 가린 채 앉아 있었다.

“아걸이라고 합니다.”

아걸이 차분히 자신을 소개했다.

“중원제일도?”

“유마팔랍기(維摩八拉氣)가 천축제일공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킥킥!”

노인이 키득대며 웃었다.

“돌아가. 죽는다. 유마팔랍기는 어린애 장난이 아니야. 지옥의 살법이야.”

순간, 아걸이 눈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착 가라앉았다.

심유하게 가라앉은 바다.

몽설과 같이 웃으면서 걸어오던 때와는 전혀 다른 풍모가 물씬 풍겼다.

“사다 지분!”

노인이 알지 못할 소리를 중얼거렸다. 순간적이지만 두 눈에서 기광도 번뜩였다.

“중원에서는 퇴빙이라고 하지. 여기서는 사다 지분이라고 하는데. 비범을 감춘 평범. 내 감각을 속일 정도로 뛰어난 평범이었나? 후후! 말이 이상하군. 뛰어난 평범이라. 좌우지간 중원 제일도란 말이 허언은 아닌 것 같군.”

눈빛을 가라앉히기 전의 아걸은 평범한 도객이었다. 하지만 눈빛을 가라앉힌 후의 아걸은 뭐라고 할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저 칼 한 자루였다.

“유마팔랍기는 전투 무공이다. 칼을 뽑으면 중간에 거둬들이지 않아. 거둘 수도 없고.”

“괜찮습니다.”

노인은 잠시 아걸을 주시했다. 그러다가 결심을 굳힌 듯 차분하게 말했다.

“유마팔랍기…… 써보지. 기다리게.”

노인이 폐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노인은 칼 한 자루를 들고 나왔다.

칼의 폭이 협검(狹劍)처럼 좁았다. 도신은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니, 휘어진 각도가 훨씬 심해서 활처럼 구부려놨다. 극단으로 치우친 환도다.

“이 칼을 잡은 지 이십 년이 넘었어. 하지만 이 칼을 들지 않으면 자네와 겨룰 수 없을 것 같군.”

“영광입니다.”

“그런 말은 살아난 후에 하지. 말했다시피 유마팔랍기는 중간에서 거둘 수 없으니까.”

“최상의 칼을 부탁드립니다.”

아걸은 허리춤에 꼽힌 뭉툭한 쇠뭉치를 꺼냈다. 보통 칼보다 절반 정도가 짧은 반철도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일단 중원으로 가야지. 할배가 많이 아프시다시까. 연세가 있으셔서 걱정이야.”

할배 아삼이 아프다고 연락을 취해왔다. 어지간한 병마라면 연락을 하지 않았을 텐데…… 아마도 이번 길이 마지막 만남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방금 ‘일단’이라고 했지? 그럼 할아버지는 만난 후에는 또 갈 곳이 있다는 말이네?”

“…….”

갑자기 아걸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말해봐. 그다음은 어디?”

“마지막으로 딱 한 군데…… 서역만 들리면 안 될까? 서역에 ‘프얼 구울’이라는…….”

아걸이 말을 하다말고 입을 꾹 닫았다.

몽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눈가에 차디찬 얼음이 맺히기 시작했다.

“여기 오기 전에는 딱 천축만 가보자고 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유마팔랍기가…….”

“그렇게 강한 유마팔랍기를 봤으면 됐잖아?”

“기대만큼…… 소축십검보다 조금 강한 정도?”

“그럼 뭘 기대했는데?”

“최소한 공부 정도는 되어야…….”

“정신 차려, 오빠. 공부의 검은 오빠가 만난 가장 강한 검이야. 그런 검을 만난 게 행운인 줄 알고 만족해. 이 세상에 그만한 검이 또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서역에 가면…….”

“좀 쉬자. 나도 취화원 좀 돌봐야지.”

“그러니까 나만 잠깐 갔다 오면…….”

이번에도 아걸은 중간에서 말을 멈췄다.

돌연 몽설의 눈에 쌍심지가 덮었다. 중원의 팔월보다도 훨씬 더운 날씨인데도 찬 서리가 맺힌다.

“서역으로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

“분명히 여기 오기 전에 유마팔랍기가 마지막이라고 했어!”

“누가 뭐래?”

아걸은 말끝을 흐렸다.

“내가 못 산다니까. 왜 이런 남자를 만나서.”

몽설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몽설은 짐작한다. 할배를 만난 후, 아걸은 프얼 구울인가 뭔가 하는 검을 보고 싶어서 안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을 입에 달며 졸라댈 것이다.

서역에는 다녀올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에 또 다른 검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강하다는 무공만 있으면 모조리 쫓아다니고 있으니.

아무리 그래도 조명십해 같은 검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허도기는 아걸이 만난 최강자였다.

“칼 내놔! 아예 칼을 압수해야겠어!”

몽설이 빽 소리 질렀다.

* * *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은 심한 격류(激流)였다.

힘껏 헤엄쳤지만

결국은 물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을 뿐.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물살에 떠밀렸을 뿐.

새삼 그리워진다.

그때 그 사람들…….

< 大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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